들어가는 글

자끄 엘륄의 저서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사회학적 저서들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 저서들이다. 이들 두 종류 책들은 내용도 다르고, 글 쓰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마치 서로 다른 음이지만 함께 연주되면 음악을 풍성하게 하는 화음과 비슷하다.

예컨대 그의 기술 관련 책들, <기술의 역사>, <기술 체계>, <기술 담론의 허구> 등은 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담고 있는 반면 <도시의 의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면서 도시 문명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이 두 종류의 책은 서로 다른 듯 하지만 실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해서 한쪽만 보면 그의 전체 사상의 윤곽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자끄 엘륄의 <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는 두 종류의 책들 중 전형적인 신학적 작품에 속한다. 이 책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끝난다. 앞서 들었던 <도시의 의미>와 비슷하게 창세기에서 시작해 요한계시록까지, 신구약성서 전체 범위를 망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도시의 의미>를 비롯해 다른 신학적 작품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이 책은 저술을 목적으로 쓰인 책이 아니라 강연 녹취록이다. 1974년 자끄 엘륄이 인도했던 세미나 내용을 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발뎀 반더버그가 녹취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 엘륄의 사상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반더버그가 이 책의 탄생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역할을 했다. 에필로그는 아예 반더버그가 쓰기도 했다.

둘째로, 녹취록인 관계로 책을 읽으면 마치 엘륄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더욱이 번역자의 배려로 본문 전체가 경어체로 번역되어 있어서 글 속에서 엘륄의 현존(?)을 강하게 체감할 수 있다. 20세기 마지막 예언자 자끄 엘륄이 성경과 씨름하고, 또한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하는 음성을 담은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특하다.

셋째로, 그러다 보니 다른 책에 비해 비교적 읽기가 수월하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다는 말은 아니다. 엘륄의 저서는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아마도 그의 글이 깊은 사유로부터 솟아 나온 탓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본서는 그가 특정 장소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내용을 녹취한 탓에 상대적으로 청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더구나 번역이 훌륭하다. 해서 이 책은 다른 책과 비교해 읽기 수월하다.

넷째, 본서는 그가 성경 공부를 인도했던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으로 성서신학적 분위기가 농후하게 깔려 있다. 잘만 사용한다면 좋은 성경 공부 교재도 될 듯 싶다. 이상이 본서가 다른 신학적 작품들과 구별되는 특성이다.

본서는 엘륄의 성경 세미나 중에서 세 개의 본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창세기 1-3장이고, 두 번째는 욥기 32-42장, 세 번째는 마태복음의 하늘나라 비유들을 고찰하고 있다. 이 3가지 주석학적 작업 뒤에 짤막한 4부가 덧붙여져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인 1장 1-2절에 대한 고찰이고, 마지막 에필로그는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개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에필로그는 엘륄이 성경 세미나에서 발표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편집자인 반더버그가 임의로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반더버그의 글도 아니다. 왜냐하면 에필로그 내용은 전에 엘륄이 썼던 <요한계시록 주석>을 요약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에 엘륄이 썼던 책 내용을 반더버그가 요약해 에필로그에 덧붙혀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본서가 성경 전체를 망라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편집자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엘륄의 사유의 심오함과 광대함을 어느 정도 보여 줄 수 있었고, 구성의 완성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본서는 1980~1990년대 유행했던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과 구성적으로 비슷하게 되었다. 브라이언 왈쉬, 리처드 미들톤, 알버트 월터스 등은 기독교인이 세계를 바라볼 때,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권했다. 그런데 엘륄은 '기독교 세계관'이나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와 유사한 제안을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본서를 창조-타락-구속의 구조로 살펴보고자 한다.

<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 / 자끄 엘륄 지음 / 빌렘 반더버그 엮음 / 전의우 옮김 / 비아토르 펴냄 / 426쪽 / 1만, 8000원

신화와 계시

그 전에 한 가지만 첨언하고자 한다. 이 책은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전체 역사를 망라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보고 비웃을 것이 뻔한 메타 내러티브(거대 담론)다. 범위 못지 않게 엘륄이 선택한 본문들의 언어도 문제다. 창세기, 욥기, 마태복음의 본문은 신화적 언어와 비유적 이미지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해서 신화학자들은 본서를 신화론(mythology)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엘륄은 시종일관 신화들과 싸우며 신화를 공격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많은 언어가 신화적 언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여 외형적으로 성서와 신화 사이의 유사성이 많은 점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성서와 신화는 완전히 다르며, 심지어 정반대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서를 신화가 아닌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와 신화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본질은 완전히 반대다. 이에 대해 반더버그의 다소 난해한 프롤로그가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다.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는 한마디로 세계관이다. 세계관이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전체적인 상을 말한다.

세계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모르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줌도 안 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만으로 세계의 전체상을 그리고 있다. 세계의 전체상 없이는 하루도 이 세계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상이 없는 삶은 전쟁보다 견디기 힘든 아노미(anomie)적 삶이다. 신화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미지의 공백, 곧 우리 지식의 빈틈을 메꾼다. 여기에는 과학도 동원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세계관에 기초해 각자가 속한 문화에 의미와 가치와 신념을 부여한다(xii).

성서 계시는 바로 신화를 우상숭배라고 공격한다. 계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곧 우리의 세계관에 허다하게 나 있는 빈 구멍 뒤편으로 미지의 '타자'가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다가 아니며,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진짜 이 세계의 근원이고 기초라고 말해 준다. 이런 점에서 계시는 우리의 세계관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칼 바르트식으로 말해서 계시는 '타자적'이다. 이러한 계시는 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요구한다. 계시로 인해 우리가 구성했던 세계에 대한 멋진 그림은 산산이 찢겨진다. 이것이 바로 신화와 계시의 심연의 간극이다.

성경이 신화적 언어를 활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타자는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된다면 그것은 타자가 아닐 것이다. 타자의 상징화를 위해서 신화적 언어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신화가 아니다. 같은 이유로 성경은 종교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종종 성경을 세계관으로 변경시키고, 기독교 문화를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기독교 도덕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그가 X와 기독교를 구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엘륄의 글로 손쉽게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 있다.

창조

그는 먼저 창세기 1-2장의 두 개의 창조 기사를 살피면서 유대-기독교 전통의 창조 이야기를 들려준다. 엘륄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축자영감설에 부정적인 반면에 성서비평학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말한다. "무오영감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중략)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습니다."(5쪽)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성경)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본문이 철두철미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6쪽) 이러한 탓에 보수적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1장을 읽으면서 상당히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엘륄은 성서의 영감성을 확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확신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구약성서와 고대 근동 지역에서 생산된 신화들의 차이점을 누누이 지적하고 있는 데서 감지할 수 있다. 그는 폴 리쾨르나 르네 지라르와 유사하게 비교신화학적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데, 그는 고대 신화와 구약성서를 비교하면서 구약성서의 명백한 차별성을 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 외에, 지금 소개한 창조 설화의 시각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보이는 시각과는 정 반대입니다. 둘은 공통점이 전혀 없으며, 인간 창조 부분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16쪽) 엘륄의 글을 읽으면서 독자 여러분들은 축자영감을 부정하면서도 성서의 영감성을 확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문서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구약성서 구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3개의 전승 가설, 곧 야훼 전승(J 전승), 엘로힘 전승(E 전승), 그리고 제사장 전승(P 전승) 가설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수용한다(13쪽). 야훼 전승은 경건주의 전승이라 할 수 있는데 구원하시고 치료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의 두 번째 창조 기사가 여기에 속한다. 또 하나는 엘로힘 전승인데, 이 전승은 더 대중적 특성을 지닌다. 여기서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어 중재자가 필요한 분으로 묘사된다. 창세기 1장의 첫 번째 창조 기사가 여기에 속한다. 한편 제사장 전승은 다분히 지적인 특성을 가지며, 주변 민족의 비슷한 기사들을 참조하여 이것을 성서 속에 변경해 집어넣는 경향이 뚜렷하다(13-14쪽).

이러한 문서설을 바탕으로 창조 기사를 읽을 때, 먼저 그는 창조 기사를 유대-기독교 신앙의 기초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창조 기사가 토라가 씌어진 한참 뒤인 BC 8~7세기경에 구원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였다고 말한다. 즉 유대-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창조 신앙이 아니라 구원 신앙이라는 것이다(17쪽). 먼저 구원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창조 이야기가 쓰였다. 먼저 존재했던 하나님의 구원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from what?)' 구원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나중에 쓰인 것이 창조 기사라는 말이다.

창조 기사의 또 다른 목적은 하나님에 대해 계시해 주려는 의도를 갖는다. 창조 기사가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처음부터 엘로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요한복음 1장 1-2절의 계시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다. 특히 두 번째 창조 기사는 야훼 전승인데, 여기서 하나님은 이제 높고 높은 보좌에 앉아서 천지를 호령하는 군주가 아니라 인간 땅에 내려 오시어 인간과 함께 거니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43쪽). 특히 두 번째 창조 기사에서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로운 실존임을 계시한다. 이는 인간에게 불어넣어진 하나님의 '숨'과 '선악과'가 보여 주는 것이다(49~50쪽).

에덴에서의 인간 생활은 참인간의 삶을 보여 주는데, 인간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자연 만물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았으며, 그렇게 창조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소유했다. 해서 다른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다.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창조 기사의 내용인고로 성서 독자는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논쟁을 염두에 둘 이유가 없다.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 된다.

타락

창세기 1-3장을 해설하면서 이제 엘륄은 타락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타락'이라는 말은 어떤 점에서는 부적절하다. 4장의 제목,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 보여 주듯 엘륄에게 '타락'은 '단절', 곧 '소외'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단절이고, 그 다음으로는 이웃과 자연 만물들과의 단절이다. 그리고 이 단절 때문에 '옷'이 만들어졌고, '떼끄니끄' 곧 기술이 생겨났다.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도시와 기술 현상도 하나님과의 단절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그가 <도시의 의미>에서도 추적했던 바와 같이, 엘륄에게 단절은 인간 실존과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된다.

타락을 단절로 보는 엘륄의 타락관은 그의 구속관을 예비한다. 만일 타락이 단절이라면, 구속은 재결합이다. 세상과 분리된 하나님께서 다시 세상과 결합하는 것이 구속이다. 엘륄의 욥기 묵상이나 천국 비유에 대한 해설도 이러한 구속관의 빛 아래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이러한 타락관과 구속관은 통상적인 타락관이나 구속관과 다소 차이가 있다. 전통 신학에 익숙해 있는 독자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엘륄의 관점은 새로운 신학적 상상을 자극한다. 예컨대 그는 타락 이야기를 하면서 '천사들의 반란'이나 '루시퍼' 같은 신화들은 일절 배제한다. 또 그는 창세기 3장의 '뱀'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과 섣불리 연결하지 말라고 말한다(61쪽).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창세기 3장을 다루면서 '원죄'나 '타락'과 같은 개념을 찾아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70쪽).

타락에서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뱀과 유혹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뱀이 한 가지 확실하게 알려 주는 사실은 세상 처음에 유혹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유혹 탓에 타락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뱀은 고대 세계에서 마술과 종교와 연결된다. 엘륄은 창세기 3장을 주석하면서 뱀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는 곧 마술(혹은 신화)과 종교에 대한 거부로 나아간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은 다른 신화 속의 뱀과 사뭇 다른데, 이는 세계의 '비신성화'를 처음부터 지향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65쪽).

또 한 가지, 뱀의 질문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식'이나 '철학'으로 바꾸어 버린다. 나아가 뱀은 하나님의 언약을 '법'이나 '도덕'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뱀의 유혹은 마술과 종교와 도덕의 유혹을 의미한다(66쪽). 역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마술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었다. 그런데 타락과 함께 마술과 종교와 도덕이 탄생했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자율'을 획득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셨으나,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된 자율을 원했다. 하나님 없는 자율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의 거부를 뜻한다. 하나님 은총 아래에 있었기에 인간은 벌거벗고 약했다. 그러나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총을 걷어찬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옷과 떼끄니끄(기술)가 생겨났다. 약함이 힘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도식은 엘륄 사상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타락이 '약함'을 버리고 '힘'을 추구한 방향이었다면, 이제 구원은 '힘'을 버리고 '약함'을 다시 되찾는 방향이 되어야 할 터이다.

타락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다. 인간이 하나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은 타락의 필연적인 결과다. 그가 하나님 부재를 절감했던 욥을 고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타락한 세계의 모든 인간 고통의 중심에는 하나님 부재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8-9)라는 욥의 탄식은 하나님 부재로 고통받는 모든 인간의 고뇌를 대표한다.

엘륄은 욥기의 후반부를 다루면서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특별히 살핀다. 이 두 짐승은 악의 상징들이다. 이 두 짐승의 고찰은 1부, '뱀'에 대한 고찰과 이어지며, 에필로그의 짐승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이들 짐승은 창조 세계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고 작동하는 악의 원리들이다.

베헤못은 하마라고도 번역되지만 엘륄에 의하면 이는 "풀려날 수 있는 물질의 야만적 힘"이다(130쪽). 악어라고도 번역되는 리워야단은 깨어나면 무서운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한 "심연의 야수"다. 그것은 "혼돈의 괴물"이요, "악의 파괴력"이며 "하나님의 원수"다. 베헤못이 물질적 힘이라면 리워야단은 물질적 힘이면서 영적 권세다(130쪽). 이것들은 세계와 인간이 순전히 물질로 축소될 때, 그리하여 물질이 지배할 때 드러나는 악의 모습이다(132쪽). 이것은 떼끄니끄가 초래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다. 악의 상징들은 인간의 삶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사탄적 원리들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간 그 힘들이다(132쪽).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무시무시한 힘과 권세를 지녔으나 그것들이 결코 하나님의 권세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 짐승에 관한 욥기 본문은 하나님의 승리를 예비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적 본문이 된다(131쪽). 짐승들은 결코 하나님의 맞상대가 되지 못한다. 악은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에 의해 정복당한다. 이것은 본문이 바벨로니아 신화들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그런 신화들 속에서 선과 악은 비등한 힘으로 경합하며, 인간은 이 투쟁에서 소외된다. 그러나 욥기에서 짐승들은 하나님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짐승을 정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132쪽). 이런 점에서 욥기는 악의 정복을 약속하는 복음서고, 종말론적 승리를 예견하는 예언서다.

구속

엘륄에게 타락은 분리다. 고로 구속은 재결합이다. 이 점에서 엘륄의 구속관은 톰 라이트 구속관과 닮았다. 톰 라이트는 하늘과 땅의 재결합을 구속의 종말론적 결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엘륄은 하나님과 세상의 재결합을 세계의 구속으로 본다.

이러한 구속관은 엘륄이 2부에서 엘리후와 하나님의 출현을 살피면서 서서히 그 윤곽이 드러난다. 그가 엘리후를 천사로, 그리고 하나님의 예비적 현존으로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가설이다. 하나님 부재로 고통하고 신음하는 욥에게 엘리후가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현존이 그에게 찾아왔음을 의미한다. 곧이어 하나님이 그에게 출현한다. 그 순간 하나님 부재는 사라진다. 욥은 하나님과 재결합하게 된다. 하나님과 재결합하는 사건은 타락의 반전이며, 구속 사건의 요체다. 10장과 11장에서 엘륄은 하나님과 재결합하여 존재의 변화를 겪는 욥을 묘사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구원 사건이다.

욥은 하나님 부재로 신음했다. 그러나 그는 엘리후를 통해 하나님 음성을 듣고, 나중에는 하나님 모습을 눈으로 친히 뵌다. 하나님을 뵌다는 것은 종말론적 구속을 의미한다(137쪽). 하나님을 만나고 친히 눈으로 뵀던 욥은 구속받았다. 자신을 공격했던 친구들과도 화해한다(140쪽). 이 지점에서 욥은 친구들도 용서하고 하나님도 용서한다(143쪽). 이러한 화해는 종말론적 화해의 예시다. 나아가 화해의 중심에 서 있는 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다(144쪽).

하나님과 세상의 결합으로서 구속은 이제 마태복음 비유들을 해석하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엘륄은 마태복음 여러 비유 중에서 특별히 '천국의 비유'에 주목한다. 여기서 엘륄은 대단히 흥미로운 성서신학적 가설을 제시한다. 전통적인 하나님나라 신학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대칭(代稱)으로 쓰였다고 보기에 '하늘나라(천국)'와 '하나님나라'는 동의어로 간주된다. 그러나 엘륄은 '하늘나라'를 '하나님나라'와 구분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말하고, '하나님나라'는 종말론적 특성을 가리킨다. 하늘나라는 지상에 현존하는 나라다(150쪽).

그렇다면 하늘나라가 왜 마태복음에만 등장할까. 통상적으로 마태복음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인지라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대칭을 썼다는 설명이 자주 유통되지만, 엘륄은 약간 당황스러운 설명을 내놓는다. 이는 연기된 종말에 대한 마태 공동체의 해법이었다는 것이다. 마태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으나, 벌써 하늘나라는 지상에 임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썩 내키지는 않지만 어쨌든 하나의 가설로 보도록 하자(153쪽).

하늘나라는 지상에 벌써 현존한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는 가리어져 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그렇다면 지상에 현존하는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하늘나라의 현존은 하늘나라 왕이 현존이다(154쪽).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 현존하시기에 그분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처럼 감추어져 현존하신 하늘나라다.

엘륄에게 하늘나라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늘나라가 하나님과 세계의 결합이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단절은 하늘나라에서 극복된다. 고로 하늘나라의 현존에서 세계의 구속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직 하늘나라의 현존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그 하늘나라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아직은 신비로서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하늘나라의 현존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종말론적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사람들은 눈으로 그 나라를 보고, 그 나라의 왕을 보게 될 것이다. 해서 하늘나라의 현존은 구속의 예표다.

구원은 지상에 현존하는 하늘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관은 전통적인 구원관인 지옥 면피와 내세 천당행 구원관을 크게 교정한다. 엘륄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는 보편구원론자다. 해서 그의 신학에서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륄의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독자가 많을 줄로 알지만, 그의 구원관이 지상에 현존하는 천국을 발견하고, 그 나라에 속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무엇보다도 하늘나라 현존은 인간의 믿음을 요구하고, 또한 참여와 행동을 촉구한다(157쪽). 해서 기독교 신앙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된다.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자들의 삶이다(206쪽). 그 삶은 무엇보다 옷과 떼끄니끄를 포기하는 삶이 될 것이다. 옷과 떼끄니끄가 단절과 분리의 결과물이었기에, 구속은 하나님과의 결합을 위해 그런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해서 하늘나라는 기술 사회에 신인류를 탄생시킨다. 그들은 바로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이다(206쪽). 그들은 힘과 영향력에 대한 갈망을 포기한 자들이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무력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이 책을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으로 읽는다면 마치는 글에 덧붙여진 반더버그의 에필로그, '역사와 화해'는 본서의 구성을 완성시켜 준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읽기 원하는 이들에게는 자끄 엘륄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하지만 훌륭하게 요약된 반더버그의 에필로그를 읽는 것만으로 본서의 독서를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에 대한 수수께끼를 숨겨 놓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은 타락은 바로잡힐 것이며, 인류는 구원에 이를 것이고, 악은 제거될 것이며, 창조 세계는 회복되리라는 약속의 책이다. 천당의 모습을 상상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요한계시록 21-22장은 천당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가 재결합하게 되리라는 선포다. 이 재결합이 바로 세계의 구속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시'의 이미지라는 사실은 중대한 함의가 있다. 그것은 반역의 수단이었던 옷과 떼끄니끄조차 하나님께서 구속하시리라는 종말론적 희망의 메시지다. 결국 하나님은 이기실 것이고, 세계는 회복될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굴복하지 말고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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