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통한 신학> / 제레미 벡비 지음 / 최정숙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펴냄 / 264쪽 / 1만 4,000원

하나님을 아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의 중심이 성경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성경을 강조한다는 것이 성경 외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방식으로 나타났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 같은 오류는 끊임없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성경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밝힌다. 만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증거하기도 하고, 시편 기자들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표현한다. 신약성경 저자 사도 바울도 분명 '특별 은총'의 예수 그리스도(말씀)와 '일반 은총'의 자연 계시 모두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몇몇 신학 논제 중 하나인 '자유의지'와 관련한 논의는 그동안 잠잠했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의 잘못된 칭의 개념으로 파생된 모럴 해저드 현상 때문에 다시 불가피하게 '칭의', '성화',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고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높아지고 있다. 이외에 여러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한국교회와 신학이 '삼위일체' 교리를 다시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로 나타난다. 이 같은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이유는 현장에서의 무분별한 '믿음' 강조가 '맹목적 믿음'으로 변질되면서 하나님을 믿기보다 그분의 능력을 더 신뢰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욕망 충족과 기도 응답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영혼'인가, '몸'인가

솔직히 그동안 개신교회 강단에서는 '영혼'을 강조하고 '몸'을 등한시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목사들은 강단에서 내려오면 '몸' 중심 삶을 살아간다. 영성을 위해 몸을 혹사시켜야 한다는 사고를 가진 목사도 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영혼만 사랑하시고 몸을 죄의 근원으로 여길까. 아쉽게도 정반대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교에서는 몸의 절제를 강조하는 바리새파와 에세네파가 존재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더러운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 즉 '마음의 부패'를 지적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라는 말이다(몸을 다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더욱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논쟁을 거치면서, 구원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몸(인성)을 부정하면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취하신다는 사실은 구원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몸을 취하셨는데도 '죄 없으시다'라는 교리는 몸(물질)에 죄가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몸(물질)에 대한 혐오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유대교'와 '이슬람'의 특징이다. 물론 교부들이 그리스철학(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으로 교리를 정립해 이원론적 신학이 형성되기는 했으나, 13세기 아퀴나스에 와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해 신학의 이원론적 균형이 잡혔다. 아퀴나스 이전 고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동방교회는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고 결과를 도출했다. 즉 그리스도교 전통은 몸(물질)을 악의 근원이나 악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은 영혼과 몸이 구별될 수는 있으나 나누어질 수 없다. 이는 구원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갈등'인가, '모순'인가

개신교 전통에서 '오직 말씀'이라는 구호는, 말씀 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증거하거나 알아가거나 신앙하는 데 필요하지 않거나 방해되는 요소로 여기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 장르가 있다. 문학적 장치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신앙을 더욱 고취시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말씀과 예술은 아직도 기독교 안에서 갈등 관계에 있다. 예술 작품이나 행위가 하나님을 왜곡할 수도 있고 잘못된 오해(우상)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말씀과 예술의 갈등은 기독교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예술이, 믿는 자에게 '말씀'의 의미를 더 깊고 크고 넓고 높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할 때 비유와 은유를 사용했다. 제한된 인간과 세상의 모양·방법을 통해 영원한 진리와 천국을 설명했다. 그렇듯 우리도 여러 활동과 방법(예술)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을 막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다. 거부해서도 안 된다.

본서는 문학, 시, 춤, 이콘, 조각, 대중음악, 음악이라는 7개 예술 장르를 다루면서 예술과 신학, 예술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다. 본서는 예술과 신학이 배타적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예술과 신학은 관계적이며 겹치는 지점과 상호 침투적인 방식으로 더욱 풍성한 신앙을 누릴 수 있도록 기대하게 한다. 예술과 신학이 갈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예술과 신학의 관계가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해 준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강도헌 /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목사,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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