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거부하고 세상을 망가진 상태로 두든지, 아니면 자기가 부서지는 대신 세상을 하나님 가까이 두어 살게 하든지,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그가 죽음을 택하고 아버지의 위로에서 멀리 떨어진 덕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우리를 결국 하나님의 품 안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예수님이 망가지고 부서졌던 그 십자가, 우리 인간의 죄와 고난을 짊어지신 그 십자가, 소외된 우리를 받아들였지만 반대로 우리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120쪽)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고난이요 죽음이다. 이는 기독교 역설 중 극치다. 죽었는데 살았다. 살면 죽는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불일치, 부정의, 소외, 아픔, 모순의 문제들에 접근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그간 인간의 고난 문제에 대한 기존 기독교 논증가들과는 많이 다른 접근이다.

결국 기독교 논증가들은 인간의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집착한다. 라비 재커라이어스는 <아플수록 더 가까이>(에센티아)에서 이런 접근은 근본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닥치는 고난을 향한 마음의 울부짖음과 회한 등 마음 속 움직임에 천착한다.

고통, 하나님과 가까이 있음 반증

<아플수록 더 가까이> / 라비 재커라이어스 지음 / 권기대 옮김 / 에센티아 펴냄 / 384쪽 / 1만 5,000원

세상에서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물으며 회의론자들이 거대한 담론에 빠질 때, 저자는 차라리 회의에 빠진 인간을 위로하며 마음속 깊은 데서 움직이는 다양한 변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살핌으로부터 역사하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는 해결하는 게 아니고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가게 만드는 도구라는 접근 방식이다. 삶이 가장 사악하게 표현되는 경우조차 하나님은 틀림없이 가까이 계신다는 의미를 부지불식중에 믿게 된다고 한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이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엘리 위젤의 경험을 예로 든다.

위젤은 수용소에서 두 명의 유대인 남자와 한 유대인 아이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장면을 어쩔 수 없이 목격했다. 두 남자는 곧장 죽었지만 아이는 30분씩이나 죽지 않고 버둥대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등 뒤에서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라는 탄식을 쏟아 냈다.

위젤 역시 억누를 수 없는 그 질문, "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어디에 계신단 말입니까?"라는 질문이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나직하지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분은 저 교수대 위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데니스 응기엔(Dennis Ngien)이 <고통받으시는 하나님>에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의 말을 인용한다. 몰트만은 "위젤이 내면으로부터 들었던 목소리 이외의 그 어떤 설명도 신성모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위젤이 전해 준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 외의 그 어떤 신앙이 이토록 완전한 의미로 내릴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고통의 문제 앞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시비를 걸다 넘어지는 어떤 부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접근이야말로 라비 재커라이어스를 실존의 문제들 앞에서 인간의 아픔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세운다.

성도의 소망과 고난은 어떻게 충돌하는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정의는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통하여 드러나는가. 회의주의나 쾌락주의로 전락하고 있는 사회현상이 말할 수 없는 폐해를 주고 있는 이 세대에 그의 궁극적이고도 날카로운 기독교 논증은 우리를 후련하게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세상의 온갖 모순, 어둠과 빛의 그칠 줄 모르는 교차, 이제는 교회조차도 손 놓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은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는 모순들도 계속된다. 둘은 그렇게 상존하는 것이란 저자의 말은 획기적이다 못해 혁명적이다.

이해 못 할뿐
하나님 역사하셔

맹독성을 가진 방울뱀에 물려 의사도 손쓸 수 없고 금방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아이가 있다. 흰옷 입은 사람이 옆에 와 그를 일으켜 주며 "잠시 아프겠지만 내가 도와줄 것이고 결국은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일을 경험했다. 그 아이는 부모와 의사의 예상을 깨고 멀쩡하게 살아났다. 소년의 이후 삶에서 이 경험은 우여곡절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될 게 뻔하다.

'전투는 우리 것이 아니고 그분의 것'이다. 모두 이 소년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삶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그 아이나 우리에게나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통의 어둠 속에서 헤매도, 별은 변함없이 빛을 발해 방향을 일러 준다"는 진재혁 목사 말은 저자의 의도와 맞아떨어진다.

고통을 가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뭐, 이런 식으로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논증을 매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고통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고통을 하나님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을 호기회로 본다. 회의에 빠질수록,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심할수록, 죄책감에 사로잡힐수록, 세상이 불의와 부정의 그리고 쾌락에 빠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말한다.

하박국, 다윗, 요나, 예레미야, 욥과 같은 성경의 인물들은 '패역의 목격' '원수의 능욕' '불의한 자의 구원' '악한 자의 형통' '무고한 자의 고통'에 대해 질문한다. 성경이 이런 문제에 침묵하지 않듯, 저자는 진지하면서도 철학적인 명제를 제공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전지하심, 하나님의 불변하심이야말로 '고난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주장한다.

"인생은 결코 한 개의 아픔이라는 동떨어진 사례로부터 바라봐서는 안 된다. 큰 그림 즉 완전한 그림이 있어, 우리 개개인의 아픔은 그 안에 들어맞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이 그림은 더욱 더 선명해진다. 고통과 외로움은 이 그림을 구성하는 한 조각이다." (166쪽)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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