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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열심히 믿어도 '안되는 인생' 있더라"

[인터뷰] 김관성 목사 독서 여정 <하나님의 열심>부터 <리영희 평전>까지

강동석 기자   기사승인 2017.03.31  18: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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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살아도 안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교회에서 하나님 열심히 믿으면 삶이 뒤바뀐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는데, 내가 만났던 삶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인터뷰 도중 김관성 목사(행신침례교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는 본인을 흙수저라고 평했다. 그의 첫 책 <본질이 이긴다>(더드림)에는 "울산에서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고래 고기를 파는 어머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상처 많은 성장기를 보내던 중 무서운 형의 협박으로 교회에 처음 발을 들였다"는 자기소개가 적혀 있다.

평소 페이스북을 통해 접한 그의 글에는 인간미가 있었다. 개혁주의 보수 신학을 따르는 목사이면서도, 언제나 교리보다 현실을 먼저 이야기했다. 인터뷰에서도 교리 체계만 강화하다 보면 현실 감각이 아둔해진다고 지적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한민국의 우파적 사고가 공존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어떤 독서 이력이 있기에 이 같은 생각을 갖게 됐을까.

3월 20일, 행신역 근처 자택에서 김관성 목사를 만났다. 저서로 <본질이 이긴다>(더드림), <살아 봐야 알게 되는 것>(넥서스CROSS), <직설>(두란노)이 있다. 뉴스앤조이 현선

그의 집에 들어서자 책이 제법 많았다. 거실은 물론 눈에 띄는 곳마다 책 더미가 있었다. 교회에도 책이 꽤 있다고 말했다. '과연 독서가'라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허세끼가 있어요"라고 답한다. '가오' 잡고, 한번씩 교인들 겁주기 위한 용도로 쓰려고 책이 이렇게 많단다. 평소 쓰는 글 스타일대로 솔직 담백한 말이었다. '뽀대', '가오', '뽀록', '뽐뿌' 등의 단어를 내뱉으며 구사하는 경상도 사투리는 구수했다.

김 목사는 신앙 서적, 신학 서적보다 문학책이 더 재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박영선 목사의 <하나님의 열심>(새순출판사),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CLC)부터 <칼에 지다>(북하우스), <빌러비드>(문학동네), <문익환 평전>(실천문학사), <리영희 평전>(책보세) 등 다양한 책을 언급했다. 무엇보다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목사에게서, <문익환 평전>을 읽고 "문 목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다"는 말을 들으며 '고단수'라고 생각했다.

따로 추천할 만한 책이 있냐고 묻자 <하나님을 기뻐하라>(생명의말씀사), <하나님 앞에서 울다>(좋은씨앗), <성화의 신비>(세움) 등을 권했다. 모두 '고된 인생'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 다루는 책이었다. 목회 계획을 물었더니 따로 없다며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교인이 없는 교회 문화를 만들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3월 20일, 그의 자택에서 2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서가와 책들은 집안 곳곳에 있었다. 뉴스앤조이 현선

- 쓴 글이나 책을 보면, 인용하는 서적이 제법 많다.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책 읽으라는 사람도 없었고 책 읽을 여건도 아니었다. 늘 단칸방에서 살았고 살림도 몇 가지 없었다. 그것마저도 아버지가 술 드시고 오면 매일 때려 부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책을 한 권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렇게 꾸역꾸역 신학교를 갔는데, 신학교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었다. "목사 될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교수님이나 선배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가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시기이기도 했다. 돌아보니 내 모습이 영 꽝이더라. 그때까지 책 한 권 안 읽어서 그런지 부담이 확 되더라. 이렇게 계속 살아서 목사가 되면 교인들에게 설교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두려움이 생겼다. 그때부터 책은 한번 열심히 읽어 봐야겠다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고, 그 습관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신학교 다닐 때부터 꾸준히 읽다 보니 교회에서 "책 좀 그만 보라"는 말도 듣고, 군대 갔다 와서 한 대학교 3학년 되니까 "요새는 무슨 책 읽노" 하면서 나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위기도 그렇게 흘러가니까, 또 내 실력이 뽀록나면 안 되니까 더 채찍질하면서 책을 읽게 되더라. 사역 현장에서도 계속 읽으려 애썼다.

무엇보다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 개척했을 때 많이 읽었다. 그때가 2006년쯤 됐다. 다른 목회자가 "기도 많이 해야 한다", "심방 많이 해야 한다" 그러는데 심방 가야 할 사람이 있어야 심방을 가지 않겠나. 개척교회 목사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남아도는 시간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할 짓이 없는 거다. 아내는 돈 벌러 가고,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했는데 집 앞에 도서관이 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인데, 아침에 문을 열면 가장 먼저 가서 책만 읽었다. 당시 1년에 한 400~500권쯤 읽었던 것 같다. 돈은 없고 도서관에 있는 책은 공짜니까. 도서관에 있는 책 다 읽겠다는 객기로 어떤 구획에 있는 책을 다 읽기도 하고, 관심 있는 것들을 뽑아 읽었다.

- 평소 독서 습관은 어떻게 되나.

보통 10권 정도 같이 읽는다. 책 한 권을 읽다 보면 계속 재밌는 게 아니잖나. 잡생각도 들고. 한 챕터 읽다가 재미없으면. 때리 치아라, 딴것 한번 보자. 그러고 읽으면 "이거 제법 괜찮네(웃음)" 하면서 쭉 읽는다. 그러다 또 재미없는 순간이 오면 "이 책 마저 읽어야겠다" 하면서 읽던 책 집어들고, 그런 식으로 책을 읽는 편이다. 아내는 한 권 다 읽고 읽으라고 잔소리하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웃음) 그래서 보통 내가 사 놓은 책에 비해 읽는 속도가 못 따라가는 편이다.

내가 독서가라서 책이 많다기보다 솔직히 '가오' 잡는 용도다. 책꽂이에 원서 딱 꽂아 놓고, 교인들 오면 겁 한번씩 줘야 되잖나.(웃음) "목사님 이거 다 읽어요?" 물으면 "그렇지, 읽지(씨익)" 이런 거다. 사실 책을 다 읽을 수 있나. 못 읽지. 그래서 내가 내 삶을 보니까 '독서에 허세가 있네' 싶은 거다. 가급적 안 그러려고 애쓰지만 나도 모르게 목사로서의 허세가 있더라. 다 읽지도 못하면서 책을 산다든지. 내가 보니까 한 5년 동안은 책을 안 사도 된다. 있는 거 읽으면 되는데, 계속 사는 것을 보면 허세끼가 상당하다고 본다.

- 신학교 시절 이후부터 읽었던 책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내가 신학교 다닐 때 삶의 주된 관심은 신앙적 이슈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신학교에 온 사람으로서 비장했고 진지했다. 나도 당시 한국교회 주류적인 흐름이었던 율법주의 신앙생활이나 신학 체계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성경을 배운 다음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읽어도 주로 그런 생각을 강화하는 책을 읽었다.

그런데 신학교 가서 같이 방을 쓰던 방장 형의 추천으로 박영선 목사의 <하나님의 열심>을 읽었는데, 전기가 오더라. 그동안 배워 왔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 책이 말하는 것이 맞다고 인정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누구지' 하면서 박영선 목사의 책을 찾아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책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한 저자의 책을 읽으면 그 저자와 사상적·신학적 맥을 같이하는 사람이 찾아지지 않나. 합신 출신이라 해서 보니까, 박 목사의 백그라운드가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이더라.

나는 그때부터 개혁주의에 빠졌다. 박 목사의 저서를 축으로 개혁주의 서적을 읽어 갔다. B.B. 워필드, 리처드 개핀,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사람들 책을 읽었다. 존 오웬이나 칼빈주의 무명 저자들 책도 거의 다 읽었다. 읽으면서 체계가 잡히는 느낌은 없었지만, 내 신학의 축이 칼빈주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명 저자나 관련 논문, 아티클 등 손에 잡히는 것은 거의 다 읽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내가 다니는 침례신학대학 학풍과는 달랐다. 주변에서 "김관성, 저거 칼빈주의다"고 놀리기도 하고.(웃음) 오기가 생기니까 친구들과 대화할 때 (논리적으로) 깨부수어야 할 것 아닌가. 이쪽 논리를 강화하려고 더 열심히 읽었다.

까놓고 말하면 신학 서적을 읽을 때 한 권당 50%나 소화할 수 있을까. 신학 서적들 안에 어떤 사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읽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읽다가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내 생각을 자극하는 문장도 많았다. 각 저자의 사상적·신학적 프레임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런 점에서 유익이 됐다. 외국 저자들 책을 읽고 "이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더라"는 말은 거의 못 했던 것 같고, 이런 책을 읽고 소화한 국내 교수와 목사가 쓴 책을 읽고 이들의 주장을 내 주장처럼 보태서 말하고 했던 것 같다.

김남준, 박영선 그 외 합신대나 총신대 교수 책도 많이 봤다. 박철수 목사의 <축복의 혁명>같이 개혁주의 신학을 토대로 좌파적으로 나오는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든지, 여러 책을 읽는데 지치더라. 이런 책을 많이 읽다 보니까, 신학 공부를 좀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 어느 순간 보니까 노상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더라. 답 없는 이야기를 천 날 만 날 하는 것 같았다. 삼위일체론이나 교회론이나 늘 그 소리가 그 소리다. 나 같은 경우 그랬다.

김관성 목사는 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며 5권을 가져왔다. 책에 꽂힌 책갈피들이 그의 독서 습관을 보여 준다. 뉴스앤조이 현선

그럴 때 주변에서 한마디씩 던지는 조언이 귀에 들어왔다. "신학 서적만 읽지 말고 문학 서적도 읽어야 한다." 그런 데서 눈을 좀 뜨기 시작해 문학책을 집어서 읽기 시작했다. 소설이나 문학책은 재밌더라. 스토리가 있으니까. 독서에 대한 어떤 철학이나 계획을 갖고 읽지는 않았지만, 그런 책이 재밌었다. 평전도 한 사람 생애가 담기니까. 소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처음에는 내가 정해서 읽었다기보다 누가 유명하다고 말하면 읽었다. "야, 이 책 한번 읽어 봐" 그러면 가져와서 읽었는데. 보통 이야기하는 유명한 책 있잖나. 앙드레 지드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쓴 책,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같은 것. 나는 아무리 정신 차리고 읽어도 이런 책이 팍팍 다가오지 않더라. 사람들이 제법 가오 잡으려고 어려운 책이나 유명한 책을 읽으면서 자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나는 태생적으로 그런 부분을 거부하게 되더라.

그래서 나는 "너는 그 책 읽어라. 나는 내 수준에 맞는 것 읽겠다" 해서 조정래, 황석영, 박경리가 쓴 소설들, 내가 읽어서 팍팍 잘 들어오는 것 위주로 읽었다. 거기서 통찰이나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이 책들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이런 책이 신학 서적보다 훨씬 재밌더라. 종종 내 글을 읽고 평가해 주는 분이 "목사님 글 속에는 개혁주의 신학의 축이 있으면서도 삶이 담겨 있다"고 그러는 이유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나는 철저하게 나하고 비슷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공감이 되더라.

조정래의 <아리랑>·<한강>·<태백산맥>(해냄출판사) 같은 책을 죽 읽었다. 이런 책이 재밌더라. 이 책이 내가 지금 현재 사회를 보는 시각, 정치적인 입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조정래 책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잖나. 팩트에 기반해서 한국 현대사를 거의 다 훑고 있다. '조정래가 소설을 극화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것이 아니고 거의 다 사실이구나' 하면서 내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한민국의 우파적 사고가 공존될 수 없다는 생각이 어느 시점에 생기더라. 그러니까 '아, 한국교회가 우파적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핵심 근거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면 안 되겠다' 확신이 왔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 목사들이 설교 안에 사회현상을 담아 한마디씩 언급한다든지, 사석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한참 낮은 수준의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부분이 많더라. 더욱이 팩트를 기반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사실이나 책에서 읽은 내용으로는 명백하게 팩트가 아닌데. 신앙적으로는 기복신앙이나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메시지, 세상을 바라보는 측면에서는 반공에 기반하는 천박한 인식. 그러다 보니 반발심이 생겼고, 읽어 왔던 책 속에서 '이거 아니구나', '교회가 잘못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 '인생의 책'이라 꼽을 만한 책은 뭐가 있나.

나는 침례교회 목사라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내가 인생에서 만났던, 복음이 무엇인지 통찰을 준 가장 명징한 책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 1, 2, 3권이다. 흑백텔레비전으로 복음을 듣다가 컬러텔레비전으로 복음을 듣는 느낌이랄까. 세상에 이런 설교가 다 있나 싶더라. 그 안에 담긴 복음의 풍성함, 깊이에 있어서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나에게 복음적인 틀, 복음에 대한 기본 인식을 장착해 주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신학적 전개는 두 가지 축을 갖는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 그것에 대한 해결책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통 목회자도 이 틀을 가지고 설교하지만 로이드 존스 설교는 지금 읽어 봐도 풀어내는 구절 하나하나가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 내려가는 방식이 기가 막히다. 영국식의 어떤 사고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한국 설교자는 정서적인 어프로치가 강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피!" 이러면서 한 4시간을 들었다 놓았다 하지 않나. 그런데 가만히 안에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옛날에 정용섭 교수가 대한민국 목회자들 설교를 분석한 책을 보면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지적한다. 결론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보통 한국에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많이 웃었거나, 많이 울었거나.

로이드 존스는 아니다. 완전 다르다. 선동하는 것이 아니고, 구절 하나가 있으면 왜 이것이 사실인지, 이 구절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증명해 내려가는데 숨이 막힐 정도다. 보통 이런 식으로 이성적인 논증이 강력한 사람이 차갑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흔히 하는 말로 보면, 믿음이 좋아.(웃음) 가슴이 뜨겁다. 로이드 존스 책을 읽었을 때 압도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문학책 중에서는, 나는 일본 문학 서적이 정서적으로 맞더라. 한국문학은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맞고. 중국이나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 나온 책은 조금 다른 세계 같다. 유럽, 북미 등의 문학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정서적으로 팍팍 꽂힌다는 느낌이 없다. 내가 말하는 정서는 거창한 게 아니다. 영화라든지 책이라든지 나를 애틋하게 하고 눈물 나게 하는 것이다. 개인적·정서적으로 터치가 있는 책을 좋아한다. 특별히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좋아한다. 애틋하고 눈물이 나게 하고 정서적으로 마음에 다가오더라.

<칼에 지다>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무명 사무라이다. 아내는 아프고, 도저히 아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면서 살 수는 없어서, 우리로 치면 서울로 올라온다. 가서 칼싸움을 하면 한 판당 수당이 주어진다. 그러면 사무라이는 본래 멋지게 싸우고, 대의가 있으면 대의를 위해 할복하고 죽어야 한다. 대의 앞에서 배를 가르고 죽어야 되는데 안 죽는다. 또 사무라이는 멋있게 머리를 묶고 그러는데, 머리도 봉두난발에 개판이다. 어떨 때 보면 얍삽하고 지질한 거지. 끝까지 사무라이답지 않게 산다.

그런데 마지막에 주인공이 진짜 할복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를 보며 진짜 많이 울었다. "아빠에게 주군은 나라의 나리님도 아니고 조장도 아니고 너희들이었다. 너희들이 죽으라 하면 아빠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때까지 사무라이답지 않게 비루하고 쪽팔린 삶을 견뎠던 것은 가족들 때문이었던 거다. 그것을 보면서 진짜 강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큰소리 한번 치고, 대의명분 막 외치면서 나가서 한 방 맞고 죽는 것이 아니라, 비굴하더라도 이 긴 삶을, 전 인생을 누군가를 위해 채울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쪽팔림을 감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찰을 많이 얻었다.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라는 책도 통찰을 줬다. 흑인 여성 작가다. 이 책에서 인생의 어떤 비참한 모습을 봤다. 아무리 살아도 안되는 사람이 있지 않나. 교회에서는 하나님 열심히 믿으면 그 결과로 삶이 뒤바뀐다는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한다. 내가 살고 내가 만났던 삶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빌러비드>를 죽 읽으면서 '이렇게 살다 가 버린 인생이 얼마나 많겠는가' 생각했다. 생생해서 좋았다.

<빌러비드>에는 흑인 여자 노예가 나온다. 당시 흑인은 짐승 취급을 받았다. 백인의 재산이었다. 두들겨 패고 일을 시키고 성폭행하고. <본질이 이긴다>에도 쓴 것 같은데, 인상 깊었던 것이 흑인 여자 가슴에서 젖을 짜서 백인 집안 아이 간식으로 가져다줬다는 이야기다. 읽으면서 확 돌아 버리겠더라. 그런데 이게 내가 살아왔던 교회 안, 세상 안에서도 똑같이 있는 모습이더라. 팍팍팍팍 와서 꽂히더라.

이 흑인 여자 노예는 도망가게 된다. 자기가 낳은 애를 업고 도망치는데 포위망이 점점 좁혀진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여자는 준비했던 톱을 꺼낸다. 톱을 꺼내서 자신이 업고 있는 애의 목을 베어 버린다. 왜 그런가 하니까, 이렇게 붙잡혀서 돌아가면 이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이 겪었던 삶을 똑같이 겪을 수밖에 없으니까. 엄마가 아이한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면서 목을 베어 버린다.

<빌러비드> 이야기가 나한테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생생한 현실이었다. 내가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 현실을 보면 아무리 살아도 살아도 안되는 인생이 있더라. 하나님 열심히 믿어도 안 되고, 기도 열심히 해도 안되고, 열심히 살아도 안되는 인생. 그렇게 허무하게 인생이 사라져 버린다. 내 설교나 글에는 이러한 것에 대한 의문들이 담겨 있다.

김 목사는 열린 자세로 인터뷰에 임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담도 던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뉴스앤조이 현선

필립 얀시라든지 C.S. 루이스라든지 세계적인 작가들도 이 문제로 고민을 했더라. 이 작가들이 이 문제를 안고 고민했구나 하면서 대단히 반가웠다. 나는 이런 현실들을 보지만, 현실에 대해 체계적인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더라. 설교를 하면서도 명확하게 답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겠더라. 한편으로 로이드 존스라든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입니다"라는 말도 공허한 것 같고. 이런 이야기를 해도 여전히 이 땅에서 고통스럽고 괴로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내가 보니까, 신앙이 좋은 사람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완전 내몰리니까 거의 무너지더라. 이 자본주의 땅에서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자기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 소위 신실하다, 예수 제대로 믿는다 평가받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여기서 오는 혼란들. 도대체 복음이라는 것이 뭔가. 예수만이 소망이고 대안이라는데, 대안 아닌데 뭐. 결국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버티다가 죽어서 우리 주님 만나면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필립 얀시, C.S. 루이스, 오스 기니스 같은 유명한 미국 기독교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도움이 안 됐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다지 가슴속으로 다가오지는 않더라. 이들의 이야기도 결국은 버티라는 것이다. "까놓고 말하면 답 없어"가 결론이다. 어떤 멋진 이야기, 사례를 늘어놓다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끝내 버리고. 이론적인 이야기하고. 나한테는 그다지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지금도 이것이 내 가슴속에서 해결되고 답을 찾은 순간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그런 것을 통과하면서 교회가 현실성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 가족으로 등록된 사람이 돈이 없어 지금 울고 있는데, 돈 없다는 사람에게 돈을 줘야지 "기도하자" 이러면 안 되는 거잖나. 이렇게 하는 것은 신앙의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되더라. 이제 내가 개척하고 몸담고 있는 교회 안에서는 '돈 때문에 자기 존엄이 무너지는 사람을 만들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이 지역 교회를 맡고 있는 내 목회적 비전의 가장 큰 핵심이다.

그래서 나한테 맞고 이해되는 수준의 책을 열심히 읽는 건지 모른다. 나와 같이 호흡하면서 발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실존에 기독교 복음이 어떻게 적용되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은혜 받았다", "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났다" 해도 돈을 같이 못 나누면 말짱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내 설교와 생각의 큰 축이다. 문학책이라든지 내가 만난 신학책들 속에서 모아진 결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전도 좋아한다. 한 사람이 살아왔던 인생의 과정이 있지 않나. 여러 평전을 통해 사람들의 사상과 삶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소위 기독교만의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주제들이 안 믿는 사람들 세계에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도의 성화', 우리가 점점 거룩해져 간다는 것, 안 믿는 사람 세계에도 있는 개념이다. "고난이 여러분을 성숙하게 한다"라 말하는데 안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있는 삶의 사이클이다. 이런 데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

내가 하나님 말씀이랍시고 이야기하는 것이, 보니까 하나님 말씀이 아니야. 내가 보수적인 신학 틀이나 보수적인 신앙적 사고방식에서 조금 알을 깨고 나온 계기였다. 내가 고민하고 관심을 가지던 주제들이 안 믿는 사람 세계에도 있는 거다.

이를테면 '소그룹', 이거 경영학 이론에 없는 건가. 다 있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기초해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구원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양보할 수는 없지만 타 종교나 문학책에서나 사상가들이 말하는 내용을 마치 우리들만의 발견인 것처럼, 우리만 깨닫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내용이 눈에 들어오더라. 그러면서 내 독서가 신앙 서적이나 신학 서적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평전 중에서는 <문익환 평전>과 <리영희 평전>을 제일 재밌게 읽었다. 문익환 목사는 보수 진영 입장에서 '이단'이라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 같이 침례교회 토양에서 자란 사람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신학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도 평전을 보면, 문 목사를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더라. 저 사람은 내가 그렇게 비판하고 욕하는 신학 체계를 가진 사람인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인생을 그냥 저렇게 던져 버리는구나. 나는 견고한 성경적·신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생겨나는 헌신이 왜 나타나지 않을까 고민이 많았다.

만주 용정에서 같이 살았던 윤동주나 장준하 등에 대한 부채의식이 훗날 문 목사가 역사 속에서 꽃이 피는 밑거름이 된다. 그래서 호(號)도 늦봄이지 않나. 그렇게 늦게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사람 인생은 끝까지 가 봐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문 목사 평전을 읽을 당시 내 인생이 너무 초라했다. 개척교회를 해도 안 되고, 당시 내 동기 중에서는 교회 세습해서 잘나가는 녀석, 전략 개척을 해서 잘나가는 녀석이 있었다. 그들과 비교하면 내 인생이 너무 초라한 거다. 문 목사 평전을 읽으면서 끝까지 가야 끝이 나는구나 하는 도전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문 목사가 독재정권에 의해 짓밟히면서 끊임없이 고통당하지 않나. 단지 한 사람에게 있는 인간의 의지력이 그것을 버티게 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붙잡아 주시는 손길이 문 목사 삶에서 많이 느껴지더라. 나에게도 깡다구로만 넘길 수 없는 인생의 고비와 짐이 있었다. 그래서 내 생애 위에도 문 목사에게 쏟아졌던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렇게 읽히기도 해서 좋았다.

리영희는 어떤가. 평전을 보니까 공부하는 데 있어서 무지하게 독하고 치열한 사람이었더라.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인데도 리영희 삶에 있는 치열성에 도전받았다. 진짜 죽기까지 공부해야 하는구나. 또 리영희가 사실 하나를 파헤치기 위해 쏟아붓는 정성.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준비할 때 말씀을 다듬으면서 쏟는 정성과 연관해서 도전을 받았다. 가도 가도 끝없이 다가오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꺾이지 않는 한 인생의 의지력도 느꼈다. 마음을 팔아먹으면 얼마든지 편안하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리영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보도하기 위해 쏟아붓는 열정도 지독하다.

리영희는 끝까지 종교나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안 믿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지력만큼도 안되는구나. 그런 반성이 많았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정교한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을 팔아먹고 부귀영화를 위해 인생을 몰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신학과 신앙의 진짜 실체는 뭘까, 많이 고민하게 만들더라.

김 목사의 표정은 진한 말씨만큼이나 생동감이 있었다. 뉴스앤조이 현선

많은 사람이 어거스틴의 <고백록>(대한기독교서회) 같은 책을 추천한다. 죽이는 책이라고. 내가 그 깊이를 다 몰라서 그런지, <고백록>에 있는 "주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어거스틴이 하니까 멋있어 보이는데, 사실 교회에서 찬송 인도할 때 악보 가사만 봐도 그런 이야기 많지 않나. 그래서 한편으로 유명한 책이라는 것이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쪽으로 기류가 형성되는 감이 있지 않은가 싶다. 오히려 나는 무명의 저자들 중에서 시중에서 주목받는 책보다 훨씬 깊은 경지의 책을 내는 경우를 많이 본 것 같다.

특별히 조호진 목사라고 있는데. 그 사람 책이 그렇게 좋더라. 그런데 이 사람 보니까 서울대더라고. 서울대라서 이렇나.(웃음) 성경신학적인 깊이라든지, 그것을 풀어내는 설교 내용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책을 많이 내는 바쁜 목사들이, 깊은 사고를 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지 거의 다 헛방이더라. 안 알려지고 묻혀 버리는 독방 거사가 생각보다 많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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