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정의평화대선행동(대선행동·상임공동대표 박득훈·김경호·성명옥·남재영)은 19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민주적 정권 교체 운동을 펴는 기독교계 시민단체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담은 의제를 발굴하고, 성서적 민주 시민 교육에 앞장서며 공정 선거 감시 운동을 병행할 예정입니다. 대선행동은 2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 매주 <뉴스앤조이>에 칼럼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선물은 값을 매기지 않는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롬 6:23)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은 재벌들의 세밀한 돈 욕심은 손을 안 뻗은 부분이 없을 정도이다. 동네 슈퍼도 이젠 거의 대부분 재벌들이 접수했다. 하지만 재벌들의 탐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돈과 부를 찾기 위해 사람 세상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산과 들을 뒤엎고 강과 바다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아름다운 산하에 값을 매긴다. 거기에서 또 자신들이 가장 잘할 줄 아는 일을 하겠다고 한다. 돈 놓고 돈 먹기로 재미 좀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선물이 값없이 주어지듯 생명은 값없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에,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또한 값없이 주시기에 돈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인간이나 아니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생명은 평등하다. 그래서 한 마리의 벌레조차 이 세상의 모든 돈을 합쳐도 닿을 수 없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물인 생명의 가치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생명을 사고팔 수 없다. 우리의 산하와 자연을 사고팔 수 없다. 선물엔 가격표가 없기 때문이다.

정의로워야 생명이다.

"정의에 굳게 서는 사람은 생명에 이릅니다" (잠 11:19)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생명에 도달할 수 있을까? 솔로몬은 잠언에서 정의에 굳게 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대답은 간단해 보이지만,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최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문제를 '정무적으로' 다루라고 지시했었다. 세월호 참사는 정치적인 문제, 즉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이 손에 쥔 권력에 반기를 드는 문제이니 이를 무마하고 막는 방식으로 대처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세월호 참사는 반국가 세력이 정권을 위협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의 소중함을 권력을 향한 욕망의 방해물로 본 것이다.

재벌과 수구 정권은 생명을 돈으로 따지고 자신(들)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때 생명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닌 게 되고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의 대상이나 수단으로 취급받게 된다. 탐욕은, 생명을 생명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즉 정의가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말은 정의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생명을 생명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반대로 정의는 생명을 생명답게 세우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 이 질문에 생명을 뺀 정답은 애초에 없다. 정의 자체가 생명을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에 굳게 설 때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눅 10:3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 말미에,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를 물으셨다. 되돌아온 대답은 "자비를 베푼 사람" (눅 10:37)이었다. 예수의 이 비유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강도당한 이웃'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를 베푼 이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비를 베푼 이웃'은 누구인가? 대기 중 산소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여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고, 때마다 곡식과 채소를 내며, 온갖 먹을거리, 잠잘 곳과 입을 옷가지의 출처로, 우리가 문명과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내어 사용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적인 출처로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고 지켜 주는 이웃은 누구인가? 이 모든 것들을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에게 내어 주는 이웃, 그래서 생명이 생명 되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움터 나오는 출발지는 어디인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류가 이 세상에 나온 이래 '강도당한 이웃'이 되어 생존이 경각에 달릴 때마다, 우리 생명에게 마지막까지 보루가 되어준 것은 자연이었다. 자연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이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것이 변했다. 아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웃이 누구인가? 생명이 경각에 달려 아우성치는 이웃은 누구인가? 재벌과 정권의 폭력 앞에서 위기에 처한 한반도 산하이다. 언론과 공안 마피아, 그리고 타락한 국회의원들의 조직적인 외면 속에서 재벌과 정권의 탐욕에 희생양이 되었지만 신음과 외침마저도 삭제당한 우리의 산하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연의 참된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우리 산하의 훼손과 파괴를 자기 몸의 훼손과 파괴로 여겨 아파하는가? 누가 우리의 자연이 생명을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의 자연은 '강도 만난 이웃'인 우리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자연이 '강도당한 이웃'이 되었다. 누가 우리 자연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함께 어울리며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한반도의 산하는 우리에게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 이제 그들의 자비가 우리의 자비를 기다린다. 생명을 살리는 자비, 정의로운 자비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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