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이 보내온 신익상 교수의 설교문(원제: 하나님의 선물인 자연이 우리의 정의와 자비를 기다립니다 / 본문: 롬 6:23, 잠 11:19, 눅 10:36)입니다. <뉴스앤조이>는 민주 회복, 경제 평등, 평화통일, 생태 환경과 사순절의 의미, 대선에서의 기독인 역할 등을 담은 대선행동의 사순절 공동 설교를 2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 6주간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선물은 값을 매기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롬 6:23)

작년 여름, 한창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반대 운동이 무르익던 무렵, 이 문제를 주제로 신학 문서를 작성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생태환경운동가이신 박성율 목사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는 크게 네 부류의 결탁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재벌-수구 정권-공안 마피아(검찰과 경찰, 국정원과 재판부를 망라하는)-언론입니다. 

재벌의 탐욕은 끝없이 이익에 목말라하고, 이 갈증을 해결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사고파는 것만이 능사라는 생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데, 이런 생각은 돈 놓고 돈 먹기에 전문가인 재벌들의 마음과 딱 맞아떨어져서 이들의 탐욕을 채우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은 재벌들의 세밀한 돈 욕심은 손을 안 뻗은 부분이 없을 정도입니다. 동네 슈퍼도 이젠 거의 대부분 재벌들이 접수했지요. 하지만 재벌들의 탐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돈과 부를 찾아서 사람 세상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산과 들을 뒤엎고 강과 바다를 헤집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거기에 있던 나무에 가격을 매깁니다. 그냥 그렇게 아름다운 산하에 값을 매깁니다. 그러고는 거기에서 또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줄 아는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돈 놓고 돈 먹기로 재미 좀 보겠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들 재벌들은 금융자본과 결탁해서 돈으로 수구 정권의 힘을 사고, 언론의 눈과 귀와 입을 사고,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을 사고, 자신들의 돈놀이에 유리한 법을 만들도록 국회의원들을 사 왔습니다. 그러니 그들 눈에는 모든 게 대가를 주고 사서는 자신들의 탐욕에 맞게 사용하면 그만일 겁니다. 그들은 우리의 산하와 자연도 이런 식으로 바라봅니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그만인 그들에게 우리의 산하와 자연은 생명의 장이 아니라 그저 팔아서 이문을 남기는 상품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산하와 자연은 만물이 태어나는 생명의 장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선물입니다. 상품은 값이 매겨지고 그 값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지만, 선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물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값을 매기는 일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대가를 바라시면서 우리의 산하와 자연을, 이 세상에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관련된 것은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하기에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이 값없이 주어지듯 생명은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값없이 주신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에,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값없이 주시기에 돈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인간이든 아니든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은 평등합니다. 그래서 한 마리의 벌레조차 이 세상의 모든 돈을 합쳐도 닿을 수 없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물인 생명의 가치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생명을 사고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산하와 자연을 사고팔 수 없습니다. 선물엔 가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정의로워야 생명입니다

"정의에 굳게 서는 사람은 생명에 이릅니다" (잠 11:19)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생명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솔로몬은 잠언에서 정의에 굳게 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도대체 정의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난 3월 23일, 1,072일의 시간이 흘러서야 세월호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깊은 상처를 품고 있었던 듯, 모습을 드러낸 선체는 3년을 건너온 온갖 상처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에 있는 생명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세월호 인양에 1,000억 원이라는 돈이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얼마의 돈을 보상으로 받는지 따지고 유가족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자식들의 생명을 담보로 돈장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무엇이든 돈을 중심으로 세상을 따지고 계산하는데, 거기엔 생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최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문제를 '정무적으로' 다루라고 지시했다죠? 말하자면 세월호 참사는 정치적인 문제, 즉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이 손에 쥔 권력에 반기를 드는 문제이니 이를 무마하고 막는 방식으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세월호 참사는 반국가 세력이 정권을 위협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선물인 생명의 소중함을 권력을 향한 욕망의 방해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돈으로 따지는 사람들과 수구 정권의 방해 세력으로 보는 사람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을 돈으로 따지고 자신(들)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생명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닌 게 되고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의 대상이나 수단으로 취급받게 됩니다. 탐욕은, 생명을 생명으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니 정의가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말은 정의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생명을 생명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반대로 정의는 생명을 생명답게 세우는 것입니다. 무엇이 정의입니까? 이 질문에 생명을 뺀 정답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정의 자체가 생명을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에 굳게 설 때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생명이 생명 취급을 받지 못하는 여러 억울한 사연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저 인간다운 대접을 원하는 장애우들의 요구가, 억울하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노동자들의 원통함이, 551명의 억울한 죽음을 머금고 비리로 얼룩진 형제복지원 만행의 피해자들이 내미는 가냘픈 손길이, 부당하고 무책임한 역사에 맞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아픔이, 용산 참사의 끝나지 않은 억울함이, 살인적 가습기 살균제로 끝나지 않을 죽음의 고통에 내몰린 수천도 넘는 이웃들의 목청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아, 그리고 노란 별 세월호의 아이들이, 생명을 생명답게 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생명들의 정의를 향한 열망은 통치권자들의 탐욕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수구 정권은 재벌과 결탁해서 사회 곳곳이 온통 시장이 되도록 조장하고 도왔으며, 재벌들과 공모하여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시민들의 혈세를 도둑질했습니다. 그 결과는 자살률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죽음의 사회입니다. 한국의 수구 정권은 민중과 시민들의 생명을 팔아서 죽음의 사회를 만들고, 재벌들과 함께 돈과 권력을 나누었습니다. 

이들의 탐욕스러운 결탁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 다른 생명체들에게까지 마수를 뻗고 있습니다. 그들의 탐욕이 대한민국의 산하와 자연을 타고 오르고 있습니다. 자연의 생명을 죽여서 돈과 권력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수구 정권에게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탄압받고 있습니다. 자연을 죽이는 권력은 불의한 힘입니다. 재벌들의 뒤를 봐주는 권력이 우리의 생명 탯줄인 자연의 생명을 훼손하는 일에 앞장섬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한반도 산하 곳곳에서 위용을 떨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치적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중과 시민들의 사회정의를 향한 열망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호소하고 있는 자연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사회정의에서 생명 정의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재벌과 결탁한 수구 정권의 불의에 맞서 우리의 산하와 자연을 보전하고 지켜내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를 보전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눅 10:3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예수의 말씀 말미에,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를 물었습니다. 되돌아온 대답은 “자비를 베푼 사람”(눅10:37)이었지요. 그래서 예수의 이 비유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강도당한 이웃'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를 베푼 이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비를 베푼 이웃'은 누구일까요? 대기 중 산소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여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고, 때마다 곡식과 채소를 내며, 온갖 먹을거리, 잠잘 곳과 입을 옷가지의, 우리가 문명과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어 사용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적인 출처로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고 지켜주는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 모든 것들을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에게 내어주는 이웃, 그래서 생명이 생명 되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움터 나오는 출발지는 어디일까요? 

이 질문을 듣고 읽는 동안 우리는 쉽게 '자연'이나 자연과 관련된 것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류가 이 세상에 나온 이래 '강도당한 이웃'이 되어 생존이 경각에 달릴 때마다, 우리 생명에게 마지막까지 보루가 되어준 것은 자연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이웃'입니다. 

하지만 재벌과 수구 정권은 자연이 베푼 자비를 배은망덕으로 갚아왔습니다. 산을 통째로 잘라 내고 나무를 베어 내며, 4대강 물을 가두어 썩게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 이웃 자연의 자비를 폭력과 남용으로 갚음으로써 자연의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웃은, 자신들의 불의에 눈감고 귀를 막으며 그들의 탐욕을 윤기 나게 포장하여 큰소리로 선전하는 언론과, 솜방망이 처벌과 덮어주기 수사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공안 마피아, 그리고 이들이 자연을 마구잡이로 남용하여 쉽게 돈을 벌 수 있도록 입법적 편의를 봐주는 국회의원들일 겁니다. 이들은 우리의 자연이 아파하며 죽음의 위협에 시달릴 때 그 아픔을 외면하고 그 소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을 줍니다.

그러니, 오늘날 누가 '강도당한 이웃'입니까? 아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생명이 경각에 달려 아우성치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재벌과 수구 정권의 폭력 앞에서 위기에 처한 한반도의 산하가 아닙니까? 언론과 공안 마피아, 그리고 타락한 국회의원들의 조직적인 외면 속에서 재벌과 수구 정권의 탐욕에 희생양이 되었지만 신음과 외침마저도 삭제당한 우리의 산하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연의 참된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누가 우리 산하의 훼손과 파괴를 자기 몸의 훼손과 파괴로 여겨 아파할까요? 누가 우리의 자연이 생명을 회복하도록 도울까요? 우리의 자연은 '강도만난 이웃'인 우리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자연이 '강도당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누가 우리 자연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함께 어울리며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주겠습니까? 한반도의 산하는 우리에게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비가 우리의 자비를 기다립니다. 생명을 살리는 자비, 그래서 정의로운 자비를 말입니다.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선물로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자연과 더불어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불의와 탐욕으로 응답하며 
생명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깊이 통회합니다. 
우리의 배반에도 정의와 자비의 마음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개인적인 생활은 물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에서 실천되고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습관과 행동을 고쳐주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의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생명 살림의 문화로 바뀌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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