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왕따지요. 저는 혼자여도 괜찮아요. 잘못된 것을 바꾸고 있으니까요. (송전탑 건설을 찬성했던) 주민들 만날 때가 가장 고통스럽지만, 주민들 있는 마을회관 안 가면 돼요. 그런데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아니에요. 어르신들이 일을 못하니까 마을회관에서 시간을 보내셔야 하는데, 가면 먹을 때도 왕따, 이야기할 때도 왕따가 돼요. 현장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돈만 아니었으면 마을이 이렇게 박살나지는 않았을 텐데…."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밀양송전탑상동면대책위 총무 김영자 할머니가 발언하자 순간 침묵이 흘렀다. 좀 전까지 깔깔 웃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조용해졌다. 이야기를 듣다 한숨을 내쉬었다. 김 할머니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추자 박수로 격려했다. 지역은 다르지만 각자 비슷한 경험을 공유해서일까.

송전탑 건설로 마을에서 분쟁을 겪은 주민 80여 명이 3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세미나실에 모였다. 송전탑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생긴 '공동체 파괴' 실태를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사회를 본 김준한 신부(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공동대표)는 "이런 일은 밀양 사건 전에도 수없이 있었지만 묻혔다. 밀양 사건 이후에도 송전탑과 관련한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는 가슴 아프지만 현실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게 우리 몫이라고 생각해 이 자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밀양·청도·당진·횡성·군산에서 송전탑 건설로 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밀양 김영자 할머니는 마을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지냈다고 회상했다. 주민들이 몇 만 원씩 십시일반으로 걷어 마을 축제를 하고, 고구마 하나라도 함께 나눠 먹는 정 많던 동네였다. 2005년 송전탑 논의가 나오기 전까지.

그때부터 마을에 분쟁이 시작됐다. 송전탑 건설을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으로 파가 갈렸다. 수십 년 가깝게 지냈던 친구의 아버지, 아버지의 친구가 송전탑 하나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됐다. 농번기가 아닌 시기에는 온종일 마을회관에서 모여 밥해 먹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거리에서 만나도 모른 체하며 지나갔다.

청도에서 온 이은주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평온했던 마을에 한국전력공사(한전)가 들어와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했고, 결국 공동체가 파괴됐다고 성토했다. 이 씨는 울먹이며 반대 운동하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꺼냈다.

"공동체 파괴라는 것은 당해 보지 않으면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한전에서는 피해 지역에 보상금을 줍니다. 청도는 밀양과 달리 345kV 송전탑이라 개별 보상금도 없습니다. 한전에서 받은 지역 보상금으로 마을에 복지회관이 지어졌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한전 돈으로 만든 복지회관은 안 쓰겠다며 이전에 사용하던 경로회관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서 동의 없이 경로회관을 폐쇄해 할머니들이 오갈 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할머니들 경로회관에서 여생을 편하게 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이은주 씨는 한전이 마을에 주는 보상액도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어떤 곳은 많이 받고 어떤 곳은 적게 받는데, 그 기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전이 어떤 내규에 기반해 보상금을 주는지, 직원이 개개인을 회유하면서 쓰는 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철저한 회계감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밀양송전탑상동면대책위 김영자 총무(왼쪽)와 청도에서 송전탑반대대책위원으로 활동 중인 이은주 씨(오른쪽). 이 씨는 발언 도중 눈물을 보였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사업 주체 한전 매뉴얼,
공청회 아닌 일대일 만남
"술 필요하면 술 주고
돈 필요하면 돈 줬다"

2017년 1월, 밀양에서 공동체 해체에 대한 구술 조사를 진행한 김영희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송전탑을 건설하면서 밀양 주민들이 겪은 이야기를 발표했다. 인터뷰는 송전탑 건설을 찬성한 주민, 반대한 주민 모두 진행했다.

김영희 교수는 송전탑 건설이 논의되는 과정부터 설명했다. 구술에 따르면, 송전탑 논의가 시작되자 사업 주체인 한전 직원이 마을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작 마을 주민에게 송전탑이 무엇인지,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정말 안전한지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공식적으로 일대일로 주민을 만났다. 한전 직원은 마을 주민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 점을 공략했다. 청도 이은주 씨 말처럼 주민을 회유하면서 선물을 줬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을 주고, 돈이 필요한 사람은 돈을 주었다. 주민 집에 찾아가 "송전탑은 국책 사업이고 꼭 필요하다. 지금 합의서에 도장 안 찍으면 돈이 떠내려간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합의를 종용했다. 마을 주민이 만나 주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 거주 중인 자녀에게 연락해 부모님을 설득해 달라고도 했다. 공무원이 밤낮없이 선물을 들고 오니 뭔가 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송전탑 건설을 찬성한 경우도 있었다.

한전은 송전탑 논의를 위해 주민 대표 5명을 뽑고 이들하고만 정보를 공유했다. 당연히 5인 주민 대표는 이장의 지인, 친인척 등 한전에 호의적인 사람들로 구성됐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하는 많은 주민이 논의에서 배제됐다. 한전은 대표 5인과 이야기할 때도 송전탑 건설 후 마을 내 생기는 피해와 대안은 설명하지 않고 오직 보상 문제만 언급했다.

"송전탑 건설에 합의한 주민 중에서도 '돈이 원수'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충분히 질문하고 마을 내 논의를 거쳐야 하지만, 돈은 그 정당한 말문을 막았습니다. 한전은 투명하고 일괄적인 방식으로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힐링비, 공사로 인한 소음 피해 보상금, 태양광 전기 공급료 등 보상 항목이 다양하고 마을에 따라 지급되는 방식도 달랐지만, 주민들은 보상 기준을 몰랐습니다. 아직도 어떤 주민은 많이 싸우면 많이 주고, 적게 싸우면 적게 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장과 사이가 안 좋아 돈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

송전탑 반대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반대 주민은 점차 고립됐다. 장소와 상관없이 따돌림과 배제를 경험했다. 읍내로 나가는 버스 안에서 "왜 합의하지 않느냐", "당신만 빼고 모두가 합의했다"는 말들이 오갔다. 마을회관에서 합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았고, 길에서 마주치면 "너네가 마을 발전을 막는다"라는 말도 던졌다. 송전탑이 세워지고 나서는 "송전탑을 막는다면서 왜 막지 못했느냐"고 조롱했다.

현장에는 송전탑 반대 운동하는 지역 주민 70여 명이 왔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건설 중에도 갈등 깊어져
경찰, 반대 주민 짐짝 취급
"돈 더 받으려고 저런다"

송전탑이 건설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할머니들은 건설을 막기 위해 산속 부지에서 자기도 하고, 윗옷을 벗고 투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신체적인 폭력과 폭언이었다. 구술에 따르면, 당시 경찰과 용역은 할머니들을 짐짝처럼 들어 아무 데나 던져 놓았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난무했다. 할머니들이 돈 더 받으려고 저런다는 말부터, 성적인 욕도 들었다. 반대 주민이 약 먹고 쓰러졌는데, 경찰은 "술 먹고 누워 있는 거니까 그냥 가라"고 했다.

할머니들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수치심과 좌절감, 분노를 느꼈다. 수년간 송전탑을 막겠다고 한 건 보상금 때문이 아니라 괴물 같은 송전탑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그 마음이 매도되는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한 할머니는 김 교수에게 구술하며 "이제 내 평생 꿈이 무너졌다. 나중에 자식들 늙으면 밀양 와서 살라고 지금까지 땅 열심히 일궈 놓았다. 이제 누가 여기 들어오려고 하겠나. 밀양은 죽을병 걸린 사람도 들어오면 다 낫고 가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다"라고 푸념했다.

김영희 교수는 한전이 관심 갖지 않는 공동체 파괴는, 외상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어떤 문제보다 피해가 오래 지속된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송전탑 하면 건강권과 재산권 피해를 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송전탑 문제로 정말 친밀했던 관계가 훼손되는 피해도 살펴봐야 합니다. 도시와 달리 시골은 주민끼리 결속도가 높고 일상적으로 굉장히 밀착돼 있습니다. 이런 시골에서 발생하는 공동체 해체는 일상생활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 사회적 관계의 기반이 붕괴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 파탄, 공동체 해체, 심리적 상처, 사회적 결여. 할머니들의 상처는 이런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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