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지금 상황을 기독교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으로 본다는 말은, 지난 5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개신교 신학의 시효가 만료됐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계몽주의 이후 진행되어 온 세속화 현상과 맞물려 기독교 신학 및 신앙의 내용이 설득적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세속화(secularization)란 이 세계 속에 충만해 있다고 믿었던 초월적이고 영적인 차원이 해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화는 종종 탈마법화(disenchantment), 혹은 탈신성화(desacralization)와 연관된 개념이다. 세속화 과정은 세계관을 변화시켰고, 이것은 언어와 개념을 변화시켰다. 그러는 사이 기독교 언어와 개념은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가 말하는 기독교 언어의 위기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Borg,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1장). 앞서 나는 세속화 과정이 칭의론의 설득적 구조를 허물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천국'과 '지옥' 개념도 해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독교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는 '천국과 지옥'일 것이다. '상징'이라는 말을 썼다고 발끈할 독자들이 있을 줄로 짐작하는데, 이 말 뜻은 천국과 지옥이 상징적인 장소라는 게 아니다. 이 두 개념이 오랫동안 사람들 마음에 강한 상징력(symbolic power)을 행사해 왔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세속화가 진행된 결과 오늘날 천국과 지옥의 상징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개념들은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오래전부터 서구 교회는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고 있으며, 천국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많은 설교를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여전히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선포하고,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이들의 간증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인에게 천국과 지옥은 공허한 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라고 믿는다.

2. 지옥의 실종

벌써 꽤 지난 일이 되어 버렸는데, 저명한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지옥은 영혼의 멸절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내가 속했던 공동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그때 한 형제가 "지옥이 없다면 뭣하러 힘들게 예수 믿나"라고 했던 말이 나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나는 멸절설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지옥이 없다고 천국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옥이 없다고 예수 믿을 이유가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 그 형제는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형제에게 구원은 '지옥 면피책'이라는 말이 된다.

복음을 지옥 면피책으로 보는 것은 그 형제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C.S. 루이스 전문가인 웨인 마틴데일(Wayne Martindale)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천국에 가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종종 죽은 뒤에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것은 단지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Martindale, <C.S.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20쪽)

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구원을 '지옥 면피책'으로 보게 만든 것은 지난 수백, 아니 수천 년간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회가 복음을 전해 왔던 방식이다. 예컨대 18~19세기 대부흥 운동가들의 복음 설교 내용을 보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무시무시한 고발과 함께 지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청중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등이 전한 복음 설교 역시 비슷했다. 그들의 실감 나는 지옥에 대한 묘사 때문에 청중들 중 더러는 실신하고, 더러는 땅바닥을 뒹굴면서 회심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지옥관은 몇몇 성경 구절에 기초해 만들어졌다. 예컨대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사람들이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막 9:48-49)이라거나, 유황 불못(계19:20; 20:10)의 이미지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음부의 이미지(눅 16:23-24)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 완성된 형태의 지옥관은 성경구절뿐만 아니라 여러 신화와 설화, 상징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Turner, <지옥의 역사> 참조). 사실 단테를 모르는 문화권에서도 유사한 지옥 관념이 있었다. 어쩌면 천국이나 지옥은 집단 무의식 속에 새겨져 있는 원형적 이미지일 것이다. 단테의 <신곡>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회화적 묘사가 보여 주듯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는 한결같이 지옥을 굉장히 뜨거운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지질학은 땅속 세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가장 깊은 내핵 지대는 땅속 5,100km부터 자리하고 있는데 온도가 무려 5,400도나 된다고 한다. 지질학은 내핵에서 외핵과 맨틀과 지각에 이르는 상세한 지질학적 묘사를 제공해 준다. 이를 통해서 인류는 마치 엑스레이 사진과 같이 땅속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세 지식은 도리어 지옥의 실존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를 날려 버린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발전에 발맞춰 19세기부터 진보적 신학자들은 일찍부터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톰 라이트(N. T. Wright)는 1차 세계대전이 지옥을 추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Wright,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29쪽).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지상이 지옥인데, 무슨 지옥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아우슈비츠와 굴락, 원자폭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인종 청소…. 20세기 현대인은 무저갱이 열리고 거기로부터 악과 고통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목도했다. 내세의 지옥을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는 실존적 상황에 내몰렸다.

이 땅이 지옥이라면 내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지옥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이 땅이 지옥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하며 천국을 소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사회 개혁에 참여하는 편이 낫다. 그러다 보니 내세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신앙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무책임한 방기로 간주되고, 적극적 참여, 곧 앙가주망(engagement)이야말로 책임적 자세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점차 지옥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게 되었다.

20세기 말이 되면서 진보적 신학자뿐 아니라 보수적 학자 중에서도 지옥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C.S. 루이스는 상당히 참신한 방식으로 지옥을 해석했다. 그는 사실적 묘사보다는 문학적 묘사를 통해서 지옥을 그려 내고자 했다. 또한 그는 지옥을 영원한 고통의 장소라기보다는 "인간성의 쓰레기통이며, 폐허"로 보았다(Martindale, <C.S.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24쪽) 그렇다고 루이스가 지옥을 알레고리로만 본 것은 아니다. 지옥의 실존을 인정하면서도 현대인의 정서에 맞도록 지옥을 재해석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는 존 스토트와 같은 이들은 아예 지옥을 '영혼 멸절'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지옥은 영벌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불살라 멸절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랍 벨(Rob Bell)은 아예 지옥을 없애 버렸다. 지옥이 없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사랑이 이긴다>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Bell, <사랑이 이긴다> 참조). 이 책 덕분에 그는 교회도 사임해야 했다고 전해지는데, 논쟁이 한참일 때 존 파이퍼(John Piper)는 그와 결별했지만, 반대로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과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등은 그를 지지했다. 지옥을 부정하는 랍 벨에게는 논적만큼이나 든든한 지지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현대인의 심성 속에서 지옥이 실종되어 버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지옥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현대의 비기독교인은 랍 벨의 책이 논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조차 생경할 것이다. "아직도 지옥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고?" 하지만 만일 지옥이 없다면 기독교 구원론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전통적으로 기독교 구원론이 공포 마케팅에 기초해서 지옥 면피책을 제공해 준다는 약속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만일 지옥이 없다면 전통적 구원론은 어떻게 존속될 수 있을까.

3. 천국의 실종

1)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지옥의 실종과 함께 살펴봐야 할 것은 천국의 실종이다. 천국의 실종 역시 세계관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과 500년 전만 해도 지구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고, 태양과 하늘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천동설을 정교하게 만든 사람은 2세기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지만 그 사람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과 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통 우주관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하늘과 땅을 상호 대응 관계로 본 것이다. 땅은 하늘에 대한 땅이고, 하늘은 땅에 대한 하늘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였다. 동양에서도 하늘과 땅, 곧 천지(天地)는 만유(萬有)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하늘과 땅, 혹은 천상과 지상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원적 요소였던 것이다.

둘째, 땅은 존재의 위계상 최하층을 의미했고 하늘은 최고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 저 너머에는 신(神)의 거처로서 천상(heaven)이 있었다. 하늘을 신의 거처로 보는 생각은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하늘은 그냥 하늘이 아니었다. 천상은 눈에 보이는 푸른빛의 하늘 그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세계다. 천상은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고, 인간의 상상 너머의 세계다. 그리고 바로 이 천상에 천국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다. 천상이 천국이 위치한 자리였다.

그런데 500여 년 전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이 나타났다. 물론 과거에도 지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영향력 면에서 미미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수많은 지지자를 만들어 냈으며, 머지않아 주류 이론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었다. 지동설은 먼저 지상과 천상의 이분법적 우주관을 뒤흔들었다. 만일 태양이 중심이라면, 지구가 그 태양을 도는 여러 행성 중 하나라면, 더 이상 지상과 천상은 일대일로 맞대응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지상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을 떠다니는 조그만 암석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 천상이 사라졌다. 파란 하늘 너머에는 천상이 아니라 스페이스, 곧 암흑의 허공인 우주 공간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이 찍어서 전송한 푸른빛의 지구 사진은 인류의 마음속에서 아예 천상을 추방해 버렸다. 우주 공간(space)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현대인은 더는 고대인과 같은 방식으로 지상과 천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우주상은 전통적인 기독교 천국관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휴거 때 들림받은 성도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성층권을 떠다니는 구름 위에서 살아야 하나? 아니면 화이트홀을 통과해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야 하나.

펄시 콜레 박사가 쓴 <내가 본 천국>은 현대인의 우주관과 나름대로 조화를 꾀한 천국관을 보여 준다. 천국은 지구에서 수조 마일 떨어져 있으며, 지구에서 천국까지 도달하는 데 6시간 정도 걸리고, 크기는 지구보다 80배나 큰 행성이란다. 만일 그 행성이 우주 어딘가 존재하는 행성이라면 그곳에서도 뉴턴의 만유인력의법칙이 적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몸무게가 굉장히 무거워질 것인데, 무거운 몸으로 천사와 함께 공중을 날아다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식의 천국관은 천국이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초월적인 세계라는 개념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만 가능한 관점이다. 천국의 실존이 위태로워졌다.

실종된 천국의 자리를 다시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천상(heaven)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새로운 방식으로 천상의 자리를 찾으려고 시도했는데, 20세기 초반에 예술가들에 의해서 추구된 쉬르 레알(surreal), 곧 초현실이라는 개념이나 뉴에이지 운동은 잃어버린 천상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과학자나 수학자는 차원(dimension)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예컨대, 애드윈 A 애벗(Edwin A. Abbott)은 <플랫랜드>라는 책에서 3차원보다 높은 다차원 세계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묘사해서 보여 주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천상은 4차원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낀다. 예컨대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초현실에 대한 추구를 '절망선을 넘은' 신이교주의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필자가 볼 때, 이러한 제안은 신이교주의인도 문제지만, 옛날과 같은 보편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천상이 회복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천상은 큰 소리를 내고 떠나가 버렸다.

2) 유토피아의 도래

천국이 사라진 자리를 세속적 천국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유토피아(Utopia)가 도래한 것이다. 현대인은 지옥도 지상에서 발견하고, 낙원도 지상에서 찾는다. 모든 것이 현세에 있다. 유토피아가 도래했다는 말이 독자들에게는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사회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GDP의 성장 그래프를 그려 본다면 지난 수천 년간 수평선을 그리며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19세기 이후 수직으로 상승하는 그래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좌우로 뒤집힌 'L'자 형이다. 물론 전 세계에는 여전히 기아와 빈곤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빈부 격차도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많은 현대인은 더 이상 굶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지난 세대에 비하면 놀라운 진전이다. 흥부 씨네 가족의 소원은 "이팝에 고깃국"이지만, 현대인의 고민은 과체중이다. 현대인이 회식 자리에서 먹는 음식은 그 옛날 임금의 수라상보다 진수성찬이다.

약 700년 전,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 민중들은 얇은 옷으로 겨울을 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한 이들도 오리털 파카 몇 벌은 가지고 있다. 옛날 부산 유생들이 과거 시험 보러 한양까지 가는 시간이 한 달 정도였지만 지금은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조만간 상용화될 하이퍼루프(hyperloop) 음속 열차로는 16분이면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사 없이도 개인용 드론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

영국으로 여행 간 딸과 길을 걸으며 얼굴을 보고 영상 통화를 할 수도 있다. 그것도 공짜로! 평생 글 한 줄 익히지 못하며 죽어 갔던 옛날의 민중들에게 인터넷은 기적의 교육 공간이다. 고조선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모든 학자들이 가졌던 지식보다 더 많은 지식이 인터넷에 있다. 50%를 넘나들던 유아 사망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할 정도로 떨어졌으며, 호환·마마 등의 많은 질병과 재난은 극복되었다. 19세기 평균 수명은 37세지만 지금은 80세를 너끈히 산다. 그런데 구글은 2050년까지 평균 수명을 500살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가동 중에 있다. 가히 불사의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차 대전 이후 대중 여행의 폭발적 증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중동 지역을 헤매지 않는다. 대신에 실존하는 지상 낙원들을 방문한다. 블로그와 카페, SNS 등에는 지상낙원을 방문한 여행객들의 견문록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다.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Lift) 헤드셋을 쓰면 영화 '아바타' 속 행성처럼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도 방문할 수 있단다. 더 나아가 아예 2차원 픽셀(pixel) 대신 3차원 박셀(voxel)로 구현된 3D 영상으로 입체 영상 속을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기업은 지복점(bliss point)을 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극치의 지점이 바로 지복점인데, 지복점을 찾으면 많은 소비자를 불러 모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은 커피, 소스, 음료, 제과 등의 지복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에 현대인은 극치의 감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 과학은 섹스에서의 극치점, 곧 오르가즘(orgasm)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를 돕는 상품이 개발되고 있다. 현대 기술은 현대인에게 최고의 기쁨, 최상의 만족, 천상의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의 도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유토피아와 관련해서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중요한 사람이다. 본래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만든 말인데, 그 말뜻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유토피아가 실제로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를 도래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주장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말한 방식으로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그의 영향으로 복지사회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북유럽과 스위스 같은 복지사회는 옛날 사람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유토피아이다.

그럼 점에서 스페인의 마리날레다(Marinaleda)는 흥미로운 도시다. 스페인 자체는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지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투쟁한 결과, 고도의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자치 구역을 만들 수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1일 6시간 노동, 부족함이 없는 생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사회를 유럽과 같은 곳에서는 이미 실현했다.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 있다.

기독교의 천국은 사라지고 대신에 세속적 유토피아가 도래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회를 살고 있다. 지옥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은 옅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from 지옥 to 천국'이라는 기독교 구원론의 공식은 종말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묵상하고, 전할 수 있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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