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 교회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나는 이 위기의 본질이 교회가 맞고 있는 중대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앞서 나는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 질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간단히 훑어보았다.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답을 할 것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금이 중대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상황임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또 다른 패러다임 전환 상황이 우리 교회를 강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론이 종말적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대 교회는 전통적인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유지하기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것은 특별히 개신교회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이는 개신교회가 칭의론에 기초해서 구원론을 구성하고, 그 신학적 기초 위에 교회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2. 칭의론의 위기

칭의론은 개신교 신학의 정수다. 지난 500년 전, 루터(Martin Luther)가 칭의론의 기초를 놓은 후, 그 위에 개신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칭의론은 교회 안팎에서 거센 도전을 맞고 있다. 이러한 도전으로 개신교회는 전통적인 칭의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국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두 가지 원인이 이 위기를 불러왔는데, 한 원인은 교회 내부의 신학적 논쟁에서 유래했고, 다른 한 원인은 세속적인 방식의 칭의론이 구성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1) 칭의론 논쟁

오늘날 현대 교회(특히 개신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구원론의 중대한 변화는 개신교 칭의론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칭의론 논쟁'이 그것을 반영해 준다. 신학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나름 일가견이 있을 줄로 안다. 최근 영국성공회 신학자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를 필두로 새 관점(new perspective) 학파가 신약성서를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도록 성서 독자를 자극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관점이란 바울을 새롭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바울은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공격하고 은총을 강조한 신학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이 생각보다 유대주의적이고, 율법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본래 성서신학, 그중에서도 신약신학적 주제였다. 그러나 어느덧 그러한 관점은 조직신학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구원론, 그중에서도 칭의론에 중대한 도전을 가하고 있다. 톰 라이트와 같은 이들에 의하면, 개신교 구원론은 율법주의를 공격하고 은총 구원만 주장해 왔다. 이들은 이러한 이해가 잘못된 바울 신학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이에 발끈하며, 개신교 신학의 기초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을 수호하고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John Piper)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와 Piper, <칭의 논쟁> 등을 참고하라).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다. 나는 여기서 이 논쟁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도전은 지난 500년간 개신교회를 떠받들어 온 기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이 중대한 위협에 처해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칭의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칭의는 두 번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회심의 때'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 '종말의 때'이다. 물론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 둘을 각각 제1칭의, 제2칭의라고 불러 보자. 단순화시켜 설명하면 제 1칭의는 '은총/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에 끝에 있을 제2칭의는 '율법/순종'으로 가능하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7장 참조). 이 때문에 보수적 신학자들은 그를 율법주의자라고 공격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이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만 그는 단서를 붙여서 '언약적 율법주의'로 불러 달라고 주문한다. 나아가 제1칭의는 개신교회 칭의론을 다소 포함하는 개념이고, 제2칭의는 가톨릭교회 칭의론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톰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론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칭의론을 에큐메니컬하게 통섭할 수 있다고 말한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9장 참조). 그러나 일부 개신교 신학자는 그의 칭의론이 개신교 칭의론을 뿌리째 뒤흔드는 도발이라고 간주한다.

톰 라이트의 도전은 전통적인 개신교 칭의론이 행위를 좀 더 강조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00년 개신교 신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개신교회 칭의론이 값싼 은총으로 전락하지 않고, '이신칭의'를 고수하면서도 행위를 강조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어 왔다. 루터(Luther)의 변증법, 칼뱅(Calvin)의 실천적 삼단논법, 웨슬리(Wesley)의 완전 성화론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시도는 당대에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일부 개신교회 칭의론을 '값싼 은총'이라고 거세게 공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그러한 식의 대안 말고 아예 율법주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전통적인 개신교 칭의론 내에서는 믿음과 행위의 균형 있는 강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모양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의 칭의론 논쟁은 개신교 칭의론의 시효 만료에 대한 논쟁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지금의 칭의론 논쟁은 개신교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의 한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2) 세속 칭의

구원론의 곤경은 신학적인 요인 외에도 비신학적 요인에 의해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 칭의론의 기본 얼개는 죄에 대한 깊은 고뇌와 하나님의 칭의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무서운 죄책감이 루터를 짓누르지 않았다면 '탑의 체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교도 설교자들의 복음 설교의 절반 이상은 죄에 대한 무서운 고발과 불지옥에 대한 공포스러운 묘사에 할애되었다. 그런데 죄의식과 칭의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던 개신교 칭의론은 세속적 정신에 의해 점차 낯설고 이상한 것이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지성인은 개신교회 칭의론을 시대착오적이며, 부조리하고, 낯선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인은 더 이상 개신교회가 제공하는 칭의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신교회의 칭의 신학이 없이도 자신들만의 세속적 칭의론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 칭의는 기존의 개신교 칭의론을 곤경에 처하게 하며, 구원론을 종말적 상황으로 내모는 세속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세속 칭의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한자어인 칭의(稱義)란 '(누군가에 의해)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는 수동적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영어로 칭의는 justification, 곧 정당화이다. 필자가 '세속 칭의'라고 했을 때, 이는 '세속적 방식의 자기 정당화 논리(secular justification)'를 말한다. 즉 현대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성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기 정당화 논리를 가지고서 자신의 양심에 위안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세속 칭의는 최소한 세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계몽주의적 톨레랑스(관용) 정신이고, 둘째는 정신분석적 원리이며, 셋째는 사회과학적 원리이다.

가. 톨레랑스 정신

계몽주의자들은 톨레랑스 정신을 지닌 자들이다. 톨레랑스는 쉽게 말해서 논쟁은 하되 폭력은 쓰지 말자는 것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의 사상을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어찌 보면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사상(신앙)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고 투쟁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외칠 때,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의자유'에 대한 투쟁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종교개혁자들은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의자유를 위해서는 기꺼이 투쟁하고자 했으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이들의 자유를 보장해 줄 생각은 별로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편협한 자유관을 비판했다. 특히 이들은 온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30년간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존 로크, 존 밀턴, 존 스튜어트 밀, 볼테르 등은 자신들의 자유는 물론이고 자신과 논쟁하는 논적들의 자유도 지켜져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투쟁했다.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나는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싸우겠소)."

이 말은 계몽주의자들의 톨레랑스 정신을 잘 보여 준다. 설령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생각할 자유와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이러한 톨레랑스의 정신은 제퍼슨주의(Jeffersonian)로 이어져 자유의 나라 미국을 건설하게 만들었다. 제퍼슨과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미국이 계몽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이기를 기대했다.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상 사회는 한마디로 '자유의 왕국'(the kingdom of freedom)이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왕국에 살고자 한다면 그는 톨레랑스(관용의 정신)를 가져야 하며, 타인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매너부터 익혀야 한다. 자유의 왕국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일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기만의 사적 공간, 곧 프라이버시(privacy)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몽주의적 톨레랑스 정신은 기독교적 죄에 대한 관념과 충돌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이 전도하기 위해 가장 먼저 꺼냈던 말은 "당신은 죄인입니다"였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에서는 이것만큼 무례하며, 불관용적인 말이 또 없다. 자기 혼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향해 "당신은 죄인이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대단히 교양인답지 못한 말을 내뱉는 것이 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복음 전도가 무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꾸로 현대인은 다른 누구로부터도 죄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즉 톨레랑스의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은 오직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자기를 정당화(justification; 칭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세속 칭의의 첫 번째 원리이다.

나. 정신분석적 원리

두 번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19세기 말에 개척한 학문인 정신분석이 또 다른 세속 칭의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의 임상 치료를 진행하면서 성인 환자의 심리적인 문제가 어린 시절 부모나 가족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프로이트 이후, 현대인은 성인이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100%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어떤 성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그의 부모나 가족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분석의 원리가 세속 칭의론을 구성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 더 중요한 정신분석학적 원리를 추가하고 싶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과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예컨대, 프로이트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빠는 것은 영양분만 공급받는 것이 아니고, 성적 욕구을 충족하는 행위다. 만일 그 아기가 아들일 경우, 아기의 욕망은 근친상간 욕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이디푸스적 살부혼모(殺父婚母) 콤플렉스로 이어진다(Freud,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유아기의 성욕' 참고).

이러한 근친욕뿐만 아니다. 통상적으로 모든 인간 안에 동성애,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의 성향이 '어느 정도는' 다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어느 정도 근친상간, 불륜, 동성애, 페티시 같은 변태적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앞의 책, '성적 이상' 참고).

어찌 보면 이러한 그의 분석은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분석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선언이나 "모든 인간은 죄인"(롬 3:23)이라는 바울의 주장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 이론으로는 첫째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욕망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것인지 악하다는 것인지 평가하기 어렵다. 마치 길바닥에 돌이 존재하듯이 인간 안에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건 그냥 '본능'이고, 그 기원은 생물학적이다. 본능은 죄가 아니다.

두 번째로, 프로이트는 억압한다고 욕망은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변형될 뿐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자칫 이렇게 변형된 욕망은 신경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하여 욕망의 억압은 정신 건강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욕망에 대한 억압을 주로 일삼는 도덕과 종교는 신경증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욕망은 억압하기보다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프로이트는 아무하고 끌리는 사람과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식의 범성욕주의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욕망의 적절한 해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의 세 가지 특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점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프로이트의 파격적인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정신분석학적 원리 속에서 '욕망을 긍정하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욕망은 죄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 원리를 다른 욕망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욕망을 뻔뻔스럽게 내세우는 이들을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광고 카피나 이미지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뻔뻔스럽게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풍조라는 것이다. 욕망은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며,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욕망의 긍정이 정신분석학이 현대인에게 선사한 세속적 칭의론의 또 다른 주요 원리라고 생각한다.

다. 사회과학적 원리

에밀 뒤르켐(Emil Durkheim)의 <자살론>은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목숨을 끊는 선택은 누가 한 것인가. 당연히 본인이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뒤르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학적 요인을 분석해 냈다.

예컨대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 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여성보다 남성이, 가난한 자보다 부자들이,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목숨을 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Durkheim, <자살론>, 제2부 참조). 뒤르켐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개인의 선택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원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뒤르켐의 통찰은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인간은 진공상태에 존재하는 원자적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인간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범죄율은 상대적으로 높다. 높은 범죄율의 원인을 전적으로 흑인들 개인의 도덕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할 뿐더러 현실적이지 않다.

높은 범죄율에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구조적 차원이 존재한다. 사회구조적 차원을 무시하는 개인주의적 도덕관은 확실히 현대사회에는 설득적이지 않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인간관은 이러한 사회구조적 차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적 차원과 함께 사회구조적 차원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뒤르켐의 교훈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회과학적 원리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논리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독일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가히 살인 기계라고 할 정도로 많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서 유린과 학살을 당하게 했는데, 스스로 자기 손으로 500만이 넘는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 전범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당시 독일 사회의 구조 속으로 자신의 책임을 던져 버렸다. 자신은 그저 거대한 국가 시스템 일부로서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아이히만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처벌을 받았지만, 아이히만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책임과 사회구조적 문제와의 관계에 대해서 중요한 문제 제기를 했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얼마만큼 책임적 존재일까? 현대사회 속에서 사회구조에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는 현대인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서, 세속적 칭의론의 또 한 원리를 구성한다.

이러한 세속적 칭의론의 원리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욕망은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책임은 적극적으로 회피하면서, 누구로부터도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뻔뻔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물론 현대사회는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다소 낯선 새로운 윤리적 관점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예컨대 인권이라든지, 자유나 평등 같은 개념들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도덕적 탁월성에 대한 강조는 확실히 시들해졌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도덕'은 굉장히 낯설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현대사회는 덕이 상실된 사회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MacIntyre, <덕의 상실> 참조). 도덕의 상실은 기독교적 칭의론의 상실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자신의 죄 문제 때문에 높은 탑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며 씨름하는 인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인간'은 천연기념물보다 더 찾기 어렵다. 온통 뻔뻔스러운 인간들뿐이다. 이들에게 기독교 칭의론은 설득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을 초래하는 또 다른 원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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