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로건(Logan)'(2017) 일부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히어로 울버린(휴 잭맨 분)은 없었다. 인간 로건이 있었다. 영화 '로건(Logan)'(2017)은 엑스맨 시리즈 스핀 오프(오리지널 스토리의 설정에 기초해서 만든 새로운 이야기 – 기자 주)에 해당하는, 휴 잭맨이 연기하는 울버린 시리즈 마지막 영화다. '로건'은 기존 히어로 영화와는 결을 달리한다. 서부극 로드 무비 형식을 차용한 것도 그렇고, 히어로 울버린의 인간적 측면을 중점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영화는 울버린 '로건'이 고급 리무진의 부품을 훔치면서 떠드는 건달들 목소리에 잠이 깨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리무진 안에서 잠들어 있던 로건은 신음하며 일어난 뒤 갱들과 마주하지만 노쇠한 모습으로 다리까지 전다. 피로한 모습으로 적을 상대하는 로건은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 줬던 빠르고 경쾌한 액션을 선보이지 않는다. 샷건 한 방에 거꾸러지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클로를 휘두른다. 당혹스럽게도 건달들에게 짓밟혀 맥도 못 추다가 겨우겨우 적을 해치운다.

노쇠한 상태로 피로감에 쩌들어 있는 울버린. 그의 몸에는 상처가 한가득이다. 그를 불사신으로 만들었던 초능력 힐링 팩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영화는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1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엑스맨은 붕괴됐고, 힐링 팩터가 울버린의 뼈를 이루는 아다만티움의 독성을 해독하지 못해 치유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영화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태에서 고급 리무진 운전기사 일을 해 나가면서 늙고 병든 프로페서X(패트릭 스튜어트 분)를 돌보는, 살아간다기보다 연명한다는 말이 적합한 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 줄 따름이다.

로건과 프로페서X, 그들은 더 이상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영화 '로건' 스틸컷

텔레파시로 다른 이의 생각을 읽고 마음을 조종했던 최상급 정신 계열 능력자인 프로페서X 찰스 자비에는 치매를 앓고 있는 90세 노인으로 등장한다. 극 중 주인공 일행을 쫓는 용병대를 이끄는 우두머리, 추적자 역할을 떠맡은 도널드 피어스(보이드 홀브룩 분)는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뇌에 퇴행성 장애라니"라는 말로 찰스 자비에의 현 상황을 일축한다. 이 말은 무기력한 두 히어로가 마주하고 있는 역설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대변한다.

운명은 치매 노인을 부양하면서 생을 정리하려는 노쇠한 사내의 마지막 의지를 여지없이 꺾어 놓는다. 로건 입장에서는 치매 걸린 노인을 부양하는 일도 버거운데,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소녀 로라(다프네 킨 분)를 노스다코타까지 데려다 줘야 하는 역할을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것이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 추격자들까지 따라 붙으니 설상가상이다. 영화 속 로건은 생의 막바지에 서 있는, 현실의 극한 상황 가운데 몰아붙여진 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강자가 약자를 지키거나 히어로가 세상을 구하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약자들(찰스·로건·로라)의 연대가 드러날 뿐이다. 영화 '로건'은 무자비한 현실 앞에 내몰린 약자와 약자가 연대하면서 살 길을 찾아 도망치는 이야기로 보인다.

도널드 피어스와 대립 중인 로건. 영화 '로건' 스틸컷

기존 히어로 영화와 다른 '로건'의 문법은 다소 당혹스러움을 동반한다. 전형적인 할리우드풍 히어로 영화는 시원시원한 액션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로건'을 보면 "모든 것을 걸었다"는 포스터 문구처럼 이미 죽음에 저당 잡힌 삶의 굴레를 있는 그대로 체감하면서 절뚝거리는 한 인간의 뒷모습만 선연하게 떠오른다. 영화 '로건'을 감상한 후 왠지 모를 쓸쓸함이나 힘겨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고 보면, 현실의 자리로 내려온 SF 슈퍼 히어로 영화 '로건'과 비슷한 골격을 갖춘,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가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구약성경은 홍해를 가르고 해를 멈추는 등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하는 듯하나, 예언서로 넘어오면서 전능성의 '해체'를 보여 준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 의해 무력하게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한다. 이 서사는, 결국 신약성경에 와서 무력한 한 인간으로 내려온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전능성을 무기로 갖고 강제적으로 세상을 바꿔 낸다면 좋으련만, 성경 속 하나님은 현실의 자리를 존중하면서 십자가 죽음이라는 전혀 뜻밖의 메시지로 서사를 이끌어 간다. 십자가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연대'의 표징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루하루 힘겹게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 앞에서 침묵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과 목도하게 될 때가 있다. 히어로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 '연대'라는 삶의 방식을 제시한 채 종국을 맞는 '로건'은 이와 같은 상황에 그리스도인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단서를 제공하는 듯하다.

로라와 로건. 영화 '로건' 스틸컷

전능한 신에 대한 인식이 어그러지고 비루한 현실 속에 있는 '무능한 하나님'을 목도할 때, 행동에 대한 선택의 주체는 인간이 되며, 그 책임 또한 신이 아닌 오롯한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역한다고 할 때 그 동역의 의미는 여기 있을 것이다. 꼭 홀로코스트나 영화 '사일런스'와 같은 상황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은 순간은 어느 그리스도인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때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자명하다. 현실을 끌어안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선행 안에서 노래하며 우리의 성스런 행실 안에서 드러난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실은 그분의 뜻을 연주하는 음악의 대위법(對位法)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노출시키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계신 신을 발견하고,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을 초월해 계신 신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발견한다." - 아브라함 헤셀 <사람을 찾는 하느님>(한국기독교연구소)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