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이 보내온 설교문입니다. <뉴스앤조이>는 민주 회복, 경제 평등, 평화통일, 생태 환경과 사순절의 의미, 대선에서의 기독인 역할 등을 담은 대선행동의 사순절 공동 설교를 2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 매주 월요일 6주간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삼일절 98주년을 맞고 있다. 그러나 삼일 혁명 기념일에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국기까지 꺼내든 기독교와 박사모의 광신도들이 거리를 덮었다. 두 해가 지나면 삼일 혁명 100주년이 되건만 이 정부는 삼일 혁명을 아예 역사에서 파내려고 한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의 수립을 1948년으로 고치려 한다. 이 속에는 역사를 반전시키려는 어마어마한 꼼수가 숨어 있다. 이에 따르면 국권피탈 이후 1948년까지 한반도 내 유일 합법 정부는 일제가 된다. 따라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박정희 일당은 나라를 지켜 온 애국지사로,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열사, 투사들은 반정부주의, 반국가주의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삼일정신은 조선의 독립을 넘어 민(民)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의 위대한 민주 시대를 선포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고려 때 만적의난, 망이 망소이의 난을 비롯해 조선 시대 수많은 농민들의 민란이 있었다. 그런 저항들이 응축되어 폭발한 것이 동학혁명이었다. 그러나 양반 지배층은 황제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민권 신장을 바탕으로 외세에 맞서야 하는 이 같은 역사 흐름에 역행한 결과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망해 가는 조선을 제국이라 칭하고 황제에 등극했으나 누가 알아주었는가? 그들에게 국민은 항상 천덕꾸러기요, 조선은 언제나 그들만의 제국이었다. 이에 삼일 혁명은 민주공화정을 선포하고 위대한 국민주권의 시대를 연 것이다.

광신도들의 친박 집회와 대조적으로 저녁부터 내린 빗속에서 진행된 촛불 집회에서는 "국민주권"을 소리 높여 외쳤다. 미완의 삼일 혁명이 다시 선포되는 현장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가 놀라고 있는 촛불 혁명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핏속에는 삼일 혁명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3~5월간 4만 6,948명이 체포·투옥되었고, 2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미결수 혹은 기결수로 수감되었으며, 1만 5,900여 명이 부상당했고, 7,500여 명이 살해당했다.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학교, 그리고 715채의 한국인 민가가 소각당했다. 전국 218개 군 중 212개 군이 만세 혁명에 참가했다(이만열, '삼일운동의 종교사적 정치사적 의미' <기독교사상>, 2017, 3월호). 그 어떤 역사에 군인들이 겨눈 총구 앞에 맨손으로 서서 만세를 부르며 7,500명이 목숨을 잃은 혁명이 있는가. 그 피가 우리 안에 흘러 4·19 혁명으로, 광주 항쟁으로, 6월 항쟁으로 이어 오는 것 아닌가? 우리가 한겨울 밤에 촛불을 드는 것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고 반만년 역사의 적폐를 청산하고 국민주권의 위대한 시대의 문을 열기 위한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길거리에서 얼어 죽은들 여한이 없을 것이다.

삼일 혁명이 전국으로 번진 것에는 당시 유일하게 전국 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의 힘이 중요했다. 33인 중에 17인이 기독교 대표였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었지만 기독교가 입은 피해는 전체의 60% 정도 되었다. 그만큼 기독인이 이 역사에 차지하는 몫이 컸다. 기독 신앙은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 신앙이었고 새로운 민주주의국가를 수립하는 나라 사랑의 정신이었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었다. 그런 그가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길지라도 좋으니라"(롬 9:3)고 한다. 바울의 말로 보기에는 낯설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의 중심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나라가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펼쳐야 할 세상이라면 나라를 남에게 바치고 착취와 굴종 속에 동족 전체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공중에 뜬 유령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당당하게 구현되는 정의, 평화, 생명의 중심이시다. 우리가 나라의 주권을 잃고 우리 민중이 당당하게 서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거짓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광장이 모든 정치를 끌고 가고 있다. 광장은 정확하다. 정당이나 언론은 통제가 가능하지만 광장에 모인 민의 입은 통제할 수가 없다. 혹자는 "아무리 많이 모인들 그냥 촛불 들고 왔다 갔다 한다고 무슨 해결이 되겠냐"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 재벌과 지배 권력은 숨어서 떨고 있다. 우리들은 별로 잃을 것이 없지만 그들은 한 번도 잃어 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오금이 저리다. 돈으로 막아지지도, 회유할 수도 없는 괴상한 존재들의 걸러지지 않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들은 최고의 학벌을 가진 먹물들과 세 치 혀를 가진 사람들을 수없이 매수할 수 있었지만 여긴 다르다. 그들은 소수를 매수해서 전체를 떡 주무르듯 착취할 수 있었는데, 그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법과 원칙'이었는데, 이 민(民)의 광장에서는 먹히지 않는다.

내가 시무하던 향린교회는 6월 항쟁의 출발지였다. 당시 집회가 엄격히 통제받던 때인데 어느 날 새벽에 교회로 전국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서 6월 항쟁을 이끈 국민운동본부가 조직되고 6월 항쟁의 투쟁 방법들이 결정되었다. 항쟁이 전국에서 불길처럼 타오르자 노태우가 나와서 직선제 수용 등 6·29 선언을 하였다. 온 국민이 환호하고 국민운동본부까지 승리라고 외치며 집회를 마무리하였다. 당시 홍근수 목사님은 땅을 치면서 슬퍼하셨다. 이제 국민들이 벼랑 끝까지 몰고 왔는데 노태우랑 전두환이 무엇이 다르다고 여기서 멈춘다는 것인가? 한발만 더 밀면 아예 끝장낼 수 있는데, 그리고 나라의 새로운 틀을 짜야 하는데 너무 답답하다고 한탄하셨다. 6월 항쟁은 불완전한 혁명이었다. 얼굴이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바뀌었지만 기득권을 가진 정권의 틀거리는 그대로였다. 노태우 다음에 야당에는 김대중 김영삼 등 막강한 지도자가 있었지만 여권에 이렇다 할 인물이 없자 야권의 김영삼을 3당 합당으로 끌어들여 다시 간판을 김영삼으로 바꾸었지만 지배 구조는 그대로였다.

6월 항쟁이 불완전한 혁명이었기에 청산되어 할 사람들이 계속 권력을 잡고 심지어는 야권으로도 들어와서 혼선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 이후 30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다. 의회정치, 대의 민주주의는 광장의 정치가 사라지면 귀족화된다. 그들 자체가 다시 특권계급이 되어 버리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여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치가 이 모양이 되기까지 반역사, 반민중, 반통일, 반민주, 비인간적인 정책들이 난무할 때 이를 주관하는 세력과 싸우지 않는 야당이라면 무슨 야(野)인가.

무슨 장외 정치니 장내로 들어오라느니 하는 되지도 않는 이분법 논리로 여당이 야당을 길들여 왔다. 국회의원들은 장내에만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장외는 선거 때만 필요한 것인가? 왜 국회의원을 지역별로 직능별로 뽑는가? 각 지역, 각 직능별로 민심을 살피고 그들의 여론을 반영해서 국정을 운영하라는 것 아닌가. 왜 야당(野黨)인가? 들판에 나와서 힘드니 야당이지, 들판에 나오지 않는 야당은 야당이 아니다.

쌍용차, 유성기업, 재능교육 등 수많은 노동자가 7~8년씩 거리에 나와서 외치고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씩 목숨을 끊고 유성기업은 일일 2교대로 노동자의 반수 이상이 병을 앓도록 그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권이 무슨 소용인가? 그동안 엄밀히 말하면 대한민국은 길거리 외에는 정치가 없었다. 민은 버림받고 고아와 같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우리는 광장의 정치를 계속 이어 가야 한다. 지금 촛불 혁명은 전 세계를 향하여 직접민주주의의 아름다움을 이어 가는 새로운 정치를 보여 주고 있다. 광장의 소리만이 돈으로도 힘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진리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우리들의 눈물이다.

우리가 지금 맞이한 기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정치권은 바로 대선 체제로 갈 수밖에 없겠지만 시민사회는 적폐 청산과 사회 개혁 과제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누가 집권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바뀌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물론 정권 교체가 되어야 지속적인 적폐 청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정치권에만 맡겨 놓으면 또다시 온 기회를 놓치게 되고 자기들만의 잔치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개헌 논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 정치권 일각에서 대선전 개헌을 위한 연대를 주장한다. 이것은 반문 연대를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고 각자가 어떤 개헌인지 내용도 내놓지 않은 채 모호한 개헌으로 바람을 잡는다. 이들이 개헌을 말하기 전에 각자가 어떤 개헌을 하자는 것인지 청사진을 내놓고 개헌 일정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개헌의 내용을 각 정당의 공약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 내용도 밝히지 않는 개헌은 선거를 치른 이후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린될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개헌은 반드시 개헌 주체인 국민의 여론 수렴과 합의를 거쳐 추진되어야 한다.

의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의원들에게만 맡겨 놓으면 안 된다. 그들은 선거 때는 국민에게 나와 표를 달라고 하지만 당선만 되면 국회 문을 닫고 들어가 곧바로 특권층이 되고 때로는 민을 개돼지로 여긴다.

민주주의는 원래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아고라 광장에 시민들이 모여서 직접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 그것이 그리스 로마에서 시작된 공화 정치이다. 모든 시민이 함께 모여 결정하는 그 광장의 정치, 거기서 최고의 의결기관이 에클레시아다. 이것을 민회 또는 공의회라고 불렀다. 에크(ek)는 '밖에', '밖으로'라는 뜻이고 클레시아(klesia)의 원형에는 "부른다", "모으다"라는 뜻이 있다. 광장은 인류에 민주주의가 시작된 마당이다. '불레'라는 의회도 있고 원로원도 있지만 이것은 전부 자문기관이다. 국가 중대사, 인선(人選) - 심지어 왕까지도 광장의 정치인 에클레시아에서 결정되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자기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 - 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유대교가 모이는 곳은 '시나고그'라고 했는데 이를 따르지 않았다. 자기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른 것이다. 사도신조의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에 언급되는 '거룩한 공회(sanctam ecclesiam catholicam)'도 바로 이 '에클레시아'의 번역이다.

로마의 시민은 황제의 시민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시민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노예를 잡아들였고 정복한 나라들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여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대비해서 '하나님나라의 시민'을 이야기한다.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은 그들이 배제했던 사람들을 주인으로 초청한다. 실제로 로마는 일정한 재산을 가져야 시민권을 주었다. 그들은 로마인, 자유인, 남자, 성인에게만 시민권을 주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서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가난한 자에게 개방되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누가복음 6:20). 그 나라는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매 맞고 잡혀가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주인으로 초대된다(누가복음 6:21-22). 그리고 이방인, 종, 여자, 어린이도 포함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를 무릎에 앉히시고 "이 어린이 하나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모든 고난받는 인류를 품는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존중되는 새로운 세상의 지체들이며 그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그들이 꿈꾼 교회의 출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 에클레시아의 머리라는 선언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교회나 종교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체제, 제국과 맞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로 세상을 세우겠다는 말이다. 로마의 시민적 특권은 전 세계 주민을 자기들의 노예와 장난감으로 전락시켜 얻는 것을 폭로한다. 로마가 최고의 자랑으로 삼는 민주정치의 허상을 들추어내며 참다운 광장, 참다운 민주를 말한 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이는 범세계적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러기에 교회의 출발은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가장 거룩한 신앙의 발로였다. 교회의 출발은 일체의 차별이 없는,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딸로 하나님나라의 시민의 자격을 갖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참여적인 출발이었다. 국민주권의 위대한 시대를 열 때까지 우리는 계속 촛불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 오늘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차별을 주장하는 타락한 기독교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우리가 첫 신앙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참다운 민주주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나라,
가난으로 고통받지 않는 나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맞아들이는 열린 마음의 나라,
평화의 세상이 우리 앞에 열리게 하옵소서.
우리는 지금 역사에서 중요한 선택의 계기를 맞습니다.
이 땅에 민주 회복, 경제 정의, 평화통일, 생태 복지를
국민과 함께 세워 갈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 같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경호 /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기독교대선행동 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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