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 ?' 노란색 백팩에는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지역 이름이 적혀 있다. '1979, 1986, 2011, ?' 노란 파우치에는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연도가 적혀 있다. 파우치를 뒤집으면 검은색 방사선 마크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이디어가 좋았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래픽 디자인에 많은 게 담겨 있었다. 탈핵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신념을 드러낼 수 있는 가방이었고, 무관심하더라도 패션용으로 쓰기에 손색이 없었다.

가방을 만든 23.536.5(이삼오삼육오) 박은정 대표와 인터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크라우드 펀딩'을 받은 가방을 제작하고 배송하느라 시간이 부족하다며 인터뷰 약속을 몇 차례 연기했다. 2월 26일, 어렵게 박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박 대표는 가방을 만들게 된 계기, 가방에 담고자 했던 의미와 23.536.5가 추구하는 바를 설명해 주었다.

박은정 대표는 탈핵 메시지 담긴 백팩을 만들었다. 사진 제공 23.536.5

- '탈핵 메시지'가 담긴 가방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핵발전소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직접 탈핵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여겨보았다. 경주에서 진도 5.8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고. 생각해 보면, 2011년에 입학한 대학원에서 공부한 '그린디자인'이 큰 영향을 줬다. 이때 만난 사람들, 교수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몸담은 그린디자인과에는 환경과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온다. 그 틈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환경에 관심이 생겼고, 소논문을 쓰는 수업에서 주제를 '핵발전소'로 잡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핵'과 '원자력'이 어떤 느낌인지 물었다. 핵과 원자력이 같은 말인데, 시민들은 핵보다 원자력이 안전하고 깨끗하다 생각하더라. 위험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탈핵 가방을 고안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들도 한몫했다. 우리 과는 매년 12월 일본 오다이바에서 열리는 에코 프로덕트 전시회에 방문할 참가자를 모집한다. 그린디자인 쪽에서 하는 큰 행사 중 하나다. 오리엔테이션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일본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리 비행기표를 예약했는데,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가 터졌다. 그해 12월 행사에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매년 10명 안팎으로 갔으니까 몇 명은 가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나와 윤호섭 교수님만 참여했다.

공항에 도착했는데, 현지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이 '웰컴 투 레벨7'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더라. 당시 그곳에 지진이 났는데, 진도가 7 정도 됐다. 기분이 싸했다. 오다이바는 도쿄 아래쪽인데 후쿠시마와는 거리가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공기로 방사능이 전달된다는 얘기도 있었다. 찜찜했다. 이후 몇 차례 일본에 시장조사하러 갈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임신 계획이 있는 사람은 가면 안 된다", "아이 낳지 않은 사람은 가면 안 된다"고 말하더라.

그러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브랜드를 만들게 됐다. 의미를 담고 싶었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에 기여하고 싶었다고 할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담은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만난 윤 교수님이 핵발전소 관련 메시지를 적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처음 제안했다. 자문을 받아 가방을 만들게 됐다.

- 근데 왜 하필 메시지를 적은 가방인가.

메시지가 적힌 가방에 관심이 많았다. 탈핵 가방은 프로젝트로 진행했다. 이전에도 메시지가 적힌 가방은 종종 출시했다. 시중에 판매하는 가방 중 내가 만든 브랜드 이름 23.536.5가 적힌 디자인이 있다. 다른 디자이너들 반응도 좋았다. 콜라보레이션을 제의받기도 했다. 패션계에는 글자 그래픽을 활용한 제품이 많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만 보더라도 글자가 많이 적혀 있다. 근데 잘 살펴보면, 대부분은 의미 없는 말이다. 욕설이 쓰여 있기도 하다.

내 브랜드로 만들 거면, 의미 없는 말 대신 세월호 참사 날짜나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숫자를 새겨 보려고 했다. 모든 사람이 인지하지는 못하겠지만, 간혹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탄핵 정국이 됐고, 백팩에 '박근혜 빠잉'을 적어서 광화문에 나갔다. 사람들이 가방을 보고 수군수군하더라. 반응이 있었다. 그때 메시지가 적힌 가방에 주목성과 전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가방에 새긴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하나.

이번 프로젝트로 가방과 파우치를 만들었다. 가방에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를 영어로 적었다.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던 지역들이다. 맨 밑에는 물음표를 넣었다. 파우치에는 사고가 발생한 연도를 적었다. 1979, 1986, 2011과 물음표가 있다. 네 번째 사고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니 물음표를 썼다.

가방 내부에는 각각의 핵발전소 사고를 설명하는 짧은 글을 실었다.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고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탈핵의 의미를 알고 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냥 디자인이 예뻐서 사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씩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제품을 보면서 이런 의미가 있구나' 생각할 수 있었으면 했다.

박은정 대표는 제품에 의미를 담고 싶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가방 재질이 특이하다.

PVC(폴리염화비닐) 종류인 타포린을 쓰고 있다. 가방, 파우치 외부뿐 아니라 지퍼도 PVC를 쓰고 있다. 하나의 소재로만 가방을 만든 셈이다. 이유가 있다. 나는 재활용이나 업사이클링(재활용품에 디자인을 더해 가치를 높인 제품)에 관심이 많다.

2000년대 초반부터, 집에서 안 입는 옷으로 가방을 만드는 과정을 블로그에 올렸다. 당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업사이클링에 회의가 들었다. 만약 내가 입지 않는 옷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굳이 가방을 만들지 않아도 되지 않나 싶었다. 셔츠로 가방을 만들면 팔 부분이 남으니까 쓰레기를 양산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업사이클링은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재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찾아보니 옷은 재활용하기가 힘들더라. 특히 혼합 소재면 힘들다. 지퍼 같은 경우, 금속·폴리에스테르·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손질하고 다듬어서 배출하더라도 가장 하질(下秩)로 재활용된다. 이 때문에 혼합 소재를 사용해 가방을 만들면, 재활용이 안 되고 지구에도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지퍼와 가방, 파우치 전체를 PVC로 쓰기 시작했다. 따로 봉제선도 만들지 않았다. 23.536.5가 만든 가방은 분리 배출하면 장판 소재로 재활용할 수 있다. 대신 소각할 때 독성이 나와 완전 친환경 소재는 아니라는 단점이 있다.

- PVC 말고 친환경적인 소재는 없나.

PLA(Poly Lactic Acid) 소재가 있긴 하다. PLA는 옥수수 전분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소재다. 뜨거운 음식을 담아도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 PLA는 재활용은 안 되는 대신, 땅에 묻으면 생 분해된다. 그런데 PLA를 땅에 매립하면, 땅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지 확인되지 않아서 쓰기가 주저된다. 단일 소재로 재활용 가능한 게 무엇이 있나 연구 중이다.

- 탈핵뿐 아니라 환경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맞다. 그런 의미에서 브랜드 이름도 23.536.5라고 지었다. 23.5는 지구 자전축 기울기를, 36.5는 사람의 신체 온도를 뜻한다. 지구와 사람이 서로 연결돼 있고, 지구에는 이롭고 인간에게는 편리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다. 브랜드 런칭 전까지는 대형 등산 브랜드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여러 생각을 했다. 아웃도어 브랜드는 주로 구스 다운 패딩을 판매한다. 구스 다운 패딩은 주원료로 거위 털을 많이 사용한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동물권을 고려해 모자에 달린 라쿤 털은 무조건 인조로만 사용했다.

윤리를 고민하는 회사였지만, 옷을 많이 만들고 남으면 폐기해 버리는 방식은 아쉬웠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옷은 재활용이 불가하다. 만들어 둔 옷이 남으면, 싼값에 팔거나 재고로 묵혀 둔다. 재고품이 팔리지 않으면 결국 소각한다. 불량 제품은 싼값에 팔 수도 없으니 바로 소각하고. 회사에서 불태우는 옷이 많다. 트렌드에 민감한 여성복이나 남성복은 소각 양이 더 많고.

대학원 다닐 때, 한 선배가 수업 시간에 했던 이야기가 있다. 지구와 인간이 연결돼 있고, 공존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간혹 지구를 살려 보자며, 인간을 조물주로 생각하고 지구를 피조물 취급한다. 그런데 선배는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지구가 먼저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이 있기 전부터 지구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 삼아 23.536.5를 통해 그간의 고민을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23.536.5는 백팩과 함께 파우치도 만들었다. 파우치에는 방사선 마크가 있다. 사진 제공 23.536.5

- 탈핵 가방으로 크라우드 펀딩도 했다.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나.

크라우드 펀딩 목표 금액이 233%를 달성했다. 예상 금액을 훨씬 넘었다.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동의한다는 메시지도 많이 봤다. 힘이 됐다. 특히 녹색당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20여 분이 가방을 사셨다. 감사한 마음에 녹색당원을 위해 파우치도 따로 만들었다. 또 강원도에서 작은 책방과 게스트하우스를 하시는 사장님도 기억난다. 본인 매장에서 가방을 판매하고 싶다면서 20개 정도를 사 가셨다. 처음 크라우드 펀딩을 할 때는 일단 판매할 생각으로만 시작한 건데, 중간중간 탈핵 가방을 지지해 주시는 인연들을 만났다.

- 다음 프로젝트로 생각한 게 있나.

일본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과 탈핵 가방 프로젝트를 하면 어떨까 싶다. 지금 한국에서 출시한 제품은 영어 버전만 있는데, 한국어 버전으로 된 가방을 만들어서 일본 곳곳을 돌아다닐 생각이다. 한국과는 또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23.536.5 탈핵 메시지 백팩은 인스타그램 d4235365 또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메시지로 구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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