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소설 <침묵>, 영화 '사일런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순교를 선택한다고 해서 그 신앙만 참된 신앙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두려움 때문에 배교와 실패의 길을 걸어간 신앙인도 있다. 엔도 슈사쿠 <침묵>에 나오는, 배교의 표시로 목재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성화상 '후미에'(밟는 그림)에 발자국을 남긴 배교자들이다.

배교자들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멸' 이후 250여 년이 지나, 메이지유신을 즈음해 일본으로 들어온 프랑스 신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250여 년을 기다린 그들은 "우리의 신앙은 당신과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패'와 '배교'로 점철된 신앙고백을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1868년 프랑스 신부 프티장의 보고에 따르면, 나가사키 부근에 2만 명 달하는 '기리시단'(기독교인을 가리키는 일본어)이 있었다. 이들은 잠복의 시절을 거쳐 가톨릭교회에 복귀했다.

사와 마사히코가 쓴 <일본 기독교사>에 따르면, 이들은 겉으로 불교나 신도 신자로 가장해 내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해 왔다. 후미에를 밟으라 하면 밟고, 불교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위장'으로 삶을 연장했다. 불교 행사를 가장한 기독교 집회도 열었다. 따로 달력을 가지고 일요일을 지키기도 했으며, 라틴어, 포르투갈어가 섞인 일본어로 의식을 이어왔다.

이들의 신앙을 '실패'라고, 이들의 선택을 '배교'라 단정할 수 있을까. 인생사 모든 일이 '정복 차림'으로 서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규격화돼 있지 않다. 그렇기에 <침묵> 속에서, 신도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 후미에를 밟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예수의 음성이 들려온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뉴스앤조이>는 2월 20일,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28일 개봉 예정인 '사일런스' 상영회를 열었다. 배교와 순교, 하나님의 침묵을 소재로 다룬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하는 '사일런스' 상영회 이후 작품의 이해를 더 심화하기 위해 대담을 마련했다.

이정배 교수(감신대 은퇴), 주원규 목사(동서말씀교회), 영화 '사일런스'에 출연한 유일한 한국인 배우 남정우 씨가 모였다. 이들은 대담 내내 서로의 목소리에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대담은 22일 홍대입구역 근처 카페에서 진행했다.

<침묵>, '사일런스' 대담을 위해 세 사람이 모였다(우측부터 이정배 교수, 남정우 배우, 주원규 목사). 이정배 교수와 남정우 배우는 사제 지간이다. 남정우 배우는 이정배 교수를 통해 <침묵>을 접했다. 신학교 재학 시절, 이 교수가 이끄는 창조극회에서 상연한 연극 '침묵'에서 기치지로 역을 맡아서 연기했다. 뉴스앤조이 현선

고통받는 신도 위해
배교 택한 신부의
치열한 신앙적 싸움

- <침묵>, '사일런스'를 보고 느꼈던 소감을 나눠 달라.

이정배 / <침묵>은 엔도 슈사쿠 초중기 작품쯤 된다. 엔도 슈사쿠는 죽기 직전 <하나님과 나>라는 자서전적 글을 남겼다. 기독교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도움을 받은 책을 밝혔다. 신학서를 많이 읽었다. 신 중심적인 종교다원주의의 한 흐름을 만든 기독교 사상과 존 힉과 불트만 밑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야기 세히치다. 야기 세히치는 일본 선불교적 전통에 기반해 성서신학을 공부했다. 그만큼 엔도 슈사쿠가 가톨릭 신학을 치열하게 공부했다. <침묵>에는 칼 라너의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가톨릭 포괄주의 신학의 틀도 깔려 있다.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던 시대다. 일본은 포르투갈 선교사를 맞아 한동안 그들 문명을 흡수하려 했고 공존기를 보냈다. 그랬더니 가톨릭 신자들이 생겼다. 그런데 관료들이 보니까 이 사람들의 제국주의적이고 침략적 양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더 관계하면 안 되겠다 판단하고 박해하기 시작한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에 파송받은 신부가 본국과 연락이 두절됐다.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려고 일본으로 신부들을 보낸다. 이들이 일본에 들어와 벌어지는 일이 <침묵>, '사일런스'의 배경이다.

일본에 온 신부들은 신도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봤다. 의도적으로 가톨릭교도를 색출하려고 신부들 앞에서 신도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게 했을 것이다. 개신교의 목사와 신도 관계보다 가톨릭의 신부와 신도 관계는 조금 더 남다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신부들의 갈등과 고뇌, 아픔, 하나님의 침묵… 이 주제들을 엔도 슈사쿠가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성상이 중요한 종교다. 그래서 가톨릭교도 색출 방식에 성상, 아이콘을 사용했다. '예수의 아이콘'(후미에)을 더럽히고 밟는 사람은 가톨릭교도가 아니고 못 밟는 사람은 가톨릭교도인 것이라는 판단 기준으로 의심스런 사람을 불러 세운다. 신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밟게 하는데, 많은 신도가 밟지 못한다. 자기 신념도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있으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는 과정을 신부들이 지켜본다. 저렇게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침묵이 원망스럽고, 이러면서 신부들 마음속에 갈등이 생긴다. 거기서 신부들의 배교 문제가 나타난다. 신도들의 고통을 경감하고 덜어 주려면 밟아야 하니까. 결국 밟는다. 신도들 고통을 면하게 하는 대가로 신부들 스스로가 배교하는 것이다.

그렇게 배교한 신부들이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 옷을 입고 일본 사고방식으로 일본인과 똑같이 살아간다. 여전히 배교하면서 일상을 사는, 배교 이후의 삶이 전개된다. 그들이 하나님 얘기를 한마디도 안 하지만 그들 삶이 정말 하나님과 무관했을까. 그것이 또 하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완전 일본식으로 체화되어 살게 된 사람들, 하루하루가 배교적인 삶인데 그 속에 하나님은 없는 것인가.

이정배 교수는 <침묵>에 일본적이고 가톨릭적 시각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개신교인 입장에서 다소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도 있지만, 작품을 통해 기독교라는 게 획일화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현선

남정우 / 연극에서 기치지로를 해 봐서 그런지, 회개를 반복하면서 일상을 사는 나 자신의 모습이 기치지로와 닮아서인지, 이 작품에서 기치지로가 정말 중요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신부를 관리에게 밀고하고, 약한 자신을 탓하기도 하면서 '나는 왜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태어나서 힘든 일을 겪어야만 하느냐. 원망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으면 나도 좋은 기독교인이 됐을 텐데…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가톨릭교인은 고해성사가 중요하니까 감옥까지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받으려 한다. 이런 기치지로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부끄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주원규 /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이 작품에 녹아 있다.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에서 오히려 대비(contrast)가 잘된 것 같다. 신부들이 끝까지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 일본 관리가 신부들에게 '우리말 한마디라도 알고 있나'라고 추궁하는 모습이 나온다. 신부는 '감사합니다'라는 말 정도밖에 모른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뿌리 깊은 제국주의가 묻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파송하는 쪽이나 파송당하는 쪽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들은 고통에서 면제되지만, 천민이라고 얘기되는 이들의 고통은 면제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런 측면에서, 고통받는 민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싶다.

- 소설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는 어떻게 다른가.

주원규 / 장점이라면 원작의 결과 흐름을 존중해 담아내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니멀리즘'이라 표현하는데, 스콜세지 감독이 과하게 카메라 쇼트를 쓰지 않고 감정이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관객에게서 객관적 거리를 두게 하는 모습이 이 영화의 장점이라 생각했다. 단점으로는 여전히 서구 중심주의 시각을 나타내는 모습이 없지 않았다. 감독이 원한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 일본 사회를 서구인 입장에서 묘사하려다 보니 다소 하층적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

남정우 / 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고요한 침묵 가운데 매미 소리와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배경 설명이 있다. 긴장감을 주기 위해. 그런 것이 영화에 충분히 녹아 있다. BGM 없이 그런 것을 구현해 낸 것을 보면 원작을 존중해 잘 옮겼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것을 구현해 놓으니까, 이런 것이 영상미로 영화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로드리고 역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나 페레이라 역을 맡은 리암 니슨이 디테일하게 잘 연기했다.

- 작 중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 이후 삶은 어땠을까.

남정우 / 괴로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배교 이후의 삶이 또다시 주어졌다면 그것도 주님 주신 삶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지 어쩌겠나. 그런데 거기서도 괴로움이 클 것 같다.

주원규 / 생존 방식의 문제지만, 이들은 앞으로 살아갈 때 후미에를 계속 밟아야 한다. 그렇게 안 하면, 또 숨은 기리시단을 찾아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신부들을 협박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교가) 이들에게 주어진 신앙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치열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기리시단과 신부들. 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배교와 순교,
획일화 않고
입체적으로 봐야

- 배교의 삶을 인정한다면 '그러면 순교는 개죽음이라는 말인가'와 같은 질문도 던질 수 있을 듯하다. 한국에는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순교한 이들도 있다.

주원규 / 순교를 경험하는 일본인 신자들의 순수성에 대한 존중이 묻어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들은 '신앙', '교리'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얕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샤머니즘 안에서 죽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을 심하게 말해서 제대로 된 깨우침 없이 죽었으니까 잘못된 죽음이라고 접근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다르다고 본다. 그 안에도 존중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남정우 / 영화에 나오지만, 신부 둘이 충돌하는 장면이 있다. 아기에게 세례를 주자, 아기 엄마가 이제 아기가 천국(파라이소)에 가게 되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신부가 잡히고 나서도, 같이 잡혀 있는 일본인들이 순교하면 돈도 없고 세금도 없고 노역도 없는 천국에 가게 되는 거냐고 묻는다. 고뇌하다가 "그렇다"고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준다. 그들과 신학적 개념이 다를지언정. 하나님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순수성을 바라보신다고 생각한다. 나같이 조금 헛 아는 사람이 기치지로처럼 까불고 그러는 거지.(웃음)

이정배 / 먼저 재미 한국인 김은국의 <순교자>(출판사)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북한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 목사를 다 잡아 죽이는데 한 목사는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게 된다. 다른 목사들은 다 배교했고 죽었다. 그런데 사실대로 다른 목사들이 배교했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신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스스로를 배교자라고 말하고 다른 이들을 순교자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사실 죽었던 사람이 아니라 살았던 사람이 순교자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사육신이 있고 생육신이 있잖나. 순교자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어서 저항하는 사람이 있고, 살아서 저항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순교한 사람이나 영화에서 순교하는 사람이나 기본 정서가 순수하지 않고서는 순교하지 못한다. 그 순수성은 절대성이나 절박감과 관계되는 것이고, 그 속에 또 두려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다. 두려움과 고통 속 순수성의 표현이다. 어떻든 순교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순교자>에서처럼 자기 믿음을 철저히 지키지 않아서 맞이한 죽음도 있다.

지금 말한 대로, 순교의 양태가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순교 자체가 신앙이고 순교하지 않는 것은 배교라고 말하는 것은 '사일런스'의 의도와 맞지 않다.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순교자의 절대적이고 순수한 신앙에 대한 존중도 있어야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고통, 배신, 갈등도 예수를 알았기에 걸머져야 하는 무거운 십자가다.

주원규 / 신사참배 문제도 획일적으로 신사참배를 했냐 안 했냐로 접근하면 문제가 있다. 어떤 점에서는 안타깝게도 우리 교단, 우리 목사, 우리 파벌은 신사참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금과옥조 신앙의 순리로 여긴다. 그런 부분에는 세력을 선동하려고 하는 입장도 있다고 본다. 정치적 기득권이나 그 상황에서 일본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신사참배를 한 것이 불순하겠지만, <침묵>에서처럼 같은 공동체를 위해 신사참배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해 입체적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다.

주원규 목사는 <침묵>이라는 작품이 프랑스 실존주의를 동양적으로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신과 인간, 신의 침묵과 인간의 욕망·좌절을 극렬하게 대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현선

일본 선교, 숫자로
판단하면 안 돼
제국주의 방식 버려야

- 소설과 영화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상상하는 '예수의 얼굴'이 바뀐다. 계속 신성시 여기다가 마지막에는 그 예수의 얼굴이 후미에에 있는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로 바뀐다.

남정우 / 전체 플롯을 보면, 예수를 배반하는 제자들 이야기와 같다. 로드리고는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순교를 준비한다. 이때 페레이라가 와서, '너 지금 예수와 너를 동일시하고 있지 않느냐, 나도 그랬었다'라고 하면서 로드리고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로드리고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순교를 선택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내적으로 갈등한다. 신도들은 자신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고.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닌가. 공격적 선교로 벌어지는 문제와 아픔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이정배 / 한국의 현실로만 보면, 기독교는 고통의 현장 가운데 있지 않다. 우리는 너무 편하게 예수를 믿는다. 언제든지 배교할 수 있고, 교회를 갔다가 언제든 스스로 안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힘이 있으니까, 오히려 교회가 전체주의적인 느낌을 보여 주면서 이웃들을 압박한다. 이 영화가 한국 상황에서 어떤 호소력을 줄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신앙에 대해서 새로운 성찰을 줄 수 있을까.

주원규 / 가슴이 아픈 게, 영화를 미리 본 일부 개신교인은 배교한 것에 대해 '거 봐라'라는 식의 태도로 일본 기독교인 통계를 내면서 비판하더라. 개신교인 비율이 1%도 안 된다며 잔인하게 핍박해 복음의 씨가 말랐다고 지적한다. 신부를 배교시킬 정도로 극악한 마귀의 유혹이 있다면서 이원론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침묵을 복음이 끊어졌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정배 / 그런 마인드로 일본에서 선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일본 사람이나 일본 기독교인은 질색한다. 일본 기독교인 수는 많지 않지만, 오히려 기독교 대학 숫자가 한국보다 몇 갑절이 많다. 일본 신학자, 교회는 안 나가지만 기독교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사람 비율을 따지면 한국과 비슷하다. 더구나 일본은 서양을 동경하는 태도가 있다. 서양을 동경해서인지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

배교를 통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며 로드리고(앤드류 가필드)를 설득하는 페레이라(리암 니슨). 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 선교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영화 첫 장면에서,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을 들은 신부들은 기독교가 패배했다는 인식을 갖는다.

남정우 / <침묵>에 보면, 교회의 패배일 뿐 아니라 전 유럽의 패배라는 식의 말도 나온다. 그래도 로드리고는 나중에 순수한 선교의 마음,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정배 / 한국에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로 대변되는 감리회와 장로교가 선교하러 들어왔다.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예수는 우리 구세주다"는 말부터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도 하나님 아들"이라 말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본다. 감리회는 학교와 병원을 짓고, 장로교는 교회를 먼저 지었다.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감리회는 신학적 포용성을 보여 준 것이다. 감리회나 장로교 방식 다 가능하다고 본다.

서구는 일본에서 제국주의적 선교 방식이 실패했다고 자각했다. 이후 중국에 갔을 때는 방식이 달랐다. 선교사 마태오 리치는 생판 낯선 중국에서 한문을 공부해 사서오경까지 다 읽었다. 이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중국어를 사용할 때와 이탈리아어로 바티칸에 보고하는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바티칸에서 원하는 대답이 있었고 마태오 리치는 거기에 맞는 답을 줬지만, 한문을 쓰면서 활동했던 흔적을 보면 바티칸 보고 내용과 다르다.

주원규 / 외부적 시선에서 현지의 모순을 치료하고 가꾸려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어느 땅이나 모순이나 갈등이 있는데, 그 사람들 생각과 문화 안에서 갈등을 치유할 생각을 해야 한다. 바깥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선교 패러다임이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예수의 상을 마주하는 로드리고.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면서 그가 생각하는 예수의 상은 점차 달라진다. 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 오늘날을 '하나님이 침묵하는 시대'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월호'로 호명되는 시대적·신앙적 현실 앞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식으로 신앙해야 할까.

이정배 / 우리가 교회 중심 신앙생활만 하다 보면, 말로 하나님을 다 설명하려 하고 틀에 맞추려 한다. 틀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협소한 기독교인이 되고, 하나님의 넓은 품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면서도 숨어 계신 분이다. 숨어 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 없이 세월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오늘의 교회는 영적 치매 상태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다 잊어버렸다. 영적 자폐다. 자기들 속에만 갇혀 버렸다. 그리고 영적 방종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있다. 한마디로라면 영적 파산이다. 과장일지 모르지만 기독교가 백해무익한 시대가 됐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고통, 고민을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든 가리키고 이끌고 지시하고 개발해 나가야 한다.

주원규 / 교회 중심주의가 양적 성장주의와 혼재하는 것 같다. 그 지점에서 전능하다는 표현을 쓴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 힘과 권력과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 트럼프가 기독교계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근거가 '전능한 하나님', '강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식이 한국 사회에서는 세월호라는 비극을 낳았다.

독재를 추종하는 세력의 안일함, 기독교가 거의 뇌가 비어 버린 사람에게 권력을 맡겨 준 이유는 힘을 향한 향수에 있다. 교회가 홍위병 역할을 했다. 나는 파산 정도가 아니라 해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일런스'라는 영화를 대하면서, "모순과 부조리다", "케리그마가 없다"고 하는 불편한 시선을 내려놓아야 한다. 숨어 계신 하나님, 침묵하신 하나님,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남정우 / 두 분은 지금 교회 모습에 대해 영적 파산, 해체해야 한다는 말씀을 했다. 나는 이런 말씀드리는 게 죄송하다. 나도 못하고 있는 기독교인이기에. 하나님이 많은 괴로움에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페레이라가 로드리고에게 했던 대사로 해결될 것 같다. "예수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예수였다면 망설임 없이 이것을 밟았을 거야." 예수님이었으면 세월호로 뛰어드셨을 것이다. 사회운동에 참여하셨을 것이다.

빛이 사물을 비췄을 때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다. 그런데 지금 다 빛의 부분에서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그것만 찬양한다. 어두운 부분도 분명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한다. 예수는 더러운 것, 아름답지 못한 것을 위해 죽으셨다. 그게 예수를 따르는 자들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배우 남정우 씨는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인 만큼, 작품을 감상한 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영화나 소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뉴스앤조이 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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