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을 겪어 본 사람만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 평소 차별받은 적 없는 사람은 한국 사회가 평등 사회라 생각한다. 올해 대선이 있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차별이 그만큼 심하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모든 소수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을 보장해 준다. 지금 만들어야 한다." (이주노조 우다야 라이 위원장)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선포 기자회견이 2월 23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차별금지법 제정을 염원하는 사회·시민단체 관계자 80여 명이 모였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부는 광화문광장에 모인 이들은 함께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이게 나라냐"고 외쳤다.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 등 한국 사회 소수자 집단 4개를 대표하는 이들이 나와 왜 '지금' 한국 사회에 차별금지법이 필요한지 설명했다.

지난해 설립 신고 10년 만에 합법 노조로 인정받은 이주노조 우다야 라이 위원장은 한국에서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전하며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이주 노동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당해도, 경찰이 제대로 법 집행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평소 차별받은 적 없는 사람은 한국이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성소수자 부모 모임' 활동가 호수 씨는 동성애자 자녀를 둔 엄마다. 그는 부모 모임에서 다양한 성 지향성을 지닌 자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눈물이 나고 분노가 차오르고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호수 씨는 "아이들은 왜곡된 기독교 세력이 정치와 합세한 현실에서 일방적인 편견과 혐오에 노출된다. 이 아이들은 이방인이 아니다. 엄마가 낳아 젖 먹여 키우고 인격 형성에 필요한 교육을 마친 평범한 이들이다. 자녀들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연시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참여정부에서 처음 입법화를 추진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에 힘을 쏟고 있다. 강문대 사무총장은 "모든 차별은 금지돼야 한다. 그것이 법의 중심이고 법률가의 임무라 생각한다. 민변은 이 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끝까지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법학과)는 "책임 있는 정치를 하려는 정치인들은 차별을 어떻게 해소하고 철폐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혐오 표현 실태와 규제 방안 연구> 연구책임자 홍성수 교수(숙명여대 법학과)도 참석했다. 그는 인권과 평등의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화가 나고 참을 수 없어 나왔다고 밝혔다. 홍 교수는 "정치 지도자들이 차별주의자·혐오주의자를 고립시키는 게 아닌 소수자를 고립시키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누구의 편에 있는지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책임 있는 정치를 하려면 차별을 어떻게 해소하고 철폐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이게 나라냐"고 구호 외치는 참석자들. 뉴스앤조이 이은혜

참석자들은 "차별금지법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지금 당장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등 구호를 외쳤다. 미리 준비해 온 기자회견문 낭독을 끝으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다음은 기자회견문 전문.

#차별금지법없이민주주의없다 #차별금지법제정을요구합니다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이게 나라냐!

2017년, 사회정의와 변화에 열망과 실천이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지금, 정치권 일각에서 모욕스런 풍경이 반복되고 있다. 차별을 조장하는 이들이 마치 합당한 후보 검증 절차마냥 "'성소수자와 동성혼을 지지하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느냐"고 질문하고, 그들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답변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지난 10년 동안 차별 금지 법안을 발의했다가 자진 철회하고, 보수 기독교 세력, 혐오 세력에게 가서 '나는, 우리당은 차별금지법 안 만든다' 읍소해 왔다. 유력 대선 후보들의 '성소수자 지지하지만 차별금지법은 안 된다'는 발언은 보수적 개신교 교리와 가치관, 사회질서 유지를 이유로 소수자들의 차이와 정체성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국민 편에 서겠다는 정치인들의 약속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순간이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10년의 과정은 한국 사회 인권 증진 요구가 어떤 방식으로 후퇴해 왔는지, 차별금지법 제정의 의미가 어떻게 오염되는지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공약이었던 차별금지법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따라 2007년 10월 법무부가 입법 예고를 하였지만,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에 부딪혀 성적 지향과 병력 등을 삭제하며 누더기 법안으로 변하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다시 2010년 법무부가 입법을 시도하지만 같은 세력에 의해 무산되었다. 17, 18, 19대 국회, 소위 '이명박근혜' 정권에선 연이은 발의에도 제정되지 못하였고, 심지어 국회의원들이 반대 세력의 압박에 못이겨 발의한 법안을 자진 철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다 결국 법무부가 차별 금지 법안 추진을 포기하였던 2012년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후 2011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아동권리위원회, 2012년 8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2012년 UN 국가별 인권 상황 정기 검토(UPR) 등 국제사회의 요청과 권고는 계속되어 왔다.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목소리를 모으고 제정 운동을 지속해온 사람들의 의견은, 또한 국제사회의 권고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 과연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인가?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정치인들과 주요 정당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정작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이 아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엄한 삶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이 말을 반복해야 하는 사실이 매우 참담하다. 한국은 현재 장애인 차별 등 일부 차별 금지와 관련된 개별법이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구제 조치가 미흡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른 조정·권고만으로는 차별받은 피해자의 효과적인 구제가 어렵다. 무엇보다 독립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에 국가적 책임과 역할을 떠맡겨서는 안된다. 정부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평등권 실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수행해야 하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를 감시하는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을 제고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이다. 따라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용모 등 신체 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합리적 이유 없이 이루어지는 차별을 구체적으로 금지·예방하고, 불합리한 차별을 겪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구제를 포함하는 기본법이다. 장애 여성, 성소수자 여성, 이주 장애인 등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회적 위치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의 평등권 실현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나중에, 다음에,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묻자. 혐오와 폭력이 벌어지는 바로 지금, 이 현실에 대해선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지난 2월 19일 국가인권위원회 실시한 '혐오 표현 실태 조사 및 규제 방안 연구' 발표는 우리 사회 혐오 표현의 실태와 소수자들의 삶을 드러내 준다. 온라인 혐오 표현 피해 경험률은 성소수자가 94.6%, 여성 83.7%, 장애인 79.5%, 이주민 42.1%로 나타났다. 오프라인 혐오 표현 피해 경험률도 성소수자가 87.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증오 범죄 피해 우려는 성소수자의 92.6%, 여성의 87.1%, 장애인의 81%가 '그렇다'고 답했다. 피해를 소수자 집단은 낙인과 편견으로 일상생활에서 배제되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고 지속적인 긴장 상태나 무력감 등 심리적 어려움에 시달린다고 발표했다. 혐오와 차별은 실존을 위협하고 일상을 통제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인권을 유예당하라고만 말할 텐가.

차별금지법 제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 힘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 폭력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세력에 정당한 명분과 권력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 세력이 힘을 갖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학교에 갈 때, 일터에 나갈 때, 거리를 나설 때, 사랑할 때, 나의 의견을 말할 때, 생명의 위협이나 모욕감을 느끼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상과 실존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손들어 주는 행위가 더 이상 계속되어선 안된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은 합의의 대상도 표심 잡기를 위한 홍보의 대상도 아니다. 보수기독교라는 이름 뒤에 숨은 것은 한국 사회 정치 경제를 독식하고 있는 가진 자들이다. 차별 금지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더 이상 경제적 착취와 차별을 통해서 만들어진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들 말이다. 제정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차별 반대 운동과 법 제정의 필요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광장에 모여 차별의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함께 내자고 제안한다. 광장의 우리 속에서도 숨겨져 있던, 큰소리 내기 어려웠던, 묻혀졌던 존재와 목소리를 더욱 크게 드러내자. 그것이 바로 반차별 연대의 새로운 물결이다. 지연된 인권과 탄핵이 아닌, 바로 지금의 인권과 지금 탄핵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내자. 반차별 행동의 광장에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는 서로를 자랑스러워 한다. 명분과 이권으로, 사회적 소수자를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고 사회적 적폐를 청산하는 연대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혐오는 더욱 조직화되고 정치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사회적 소수자들은 변화를 위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긍심을 표현하고, 대중을 설득하고, 잘못된 제도와 차별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젠 촛불을 들고 바로 이 광장에 함께 모였다. 우리는 이 광장의 싸움이 모든 차별받는 사람의 연대의 장이 되기를 염원하며 반차별을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낼 것이다. 이 광장에서 나의 존엄과 인권, 새로운 세상을 정치인에게 위탁하지 않고, 우리의 목소리와 투쟁으로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그 힘이 결국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으로 향해 가도록 만들자.

2017년 2월 23일
차별금지법제정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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