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연경은 성경에는 득보다 실이 많은 말씀이 있다(7쪽)고 했다. 예컨대, 가룟 유다가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다는 것처럼 차라리 없었다면 좋았을 구절이 성경에는 득시글거린다. 그 대표 본문이 로마서 13장이다. 루츠 폴에 따르면 로마서 13장을 읽는 네 가지 중요한 해석 유형이 있다고 했는데(<그리스도인과 국가: 로마서 13장 연구>, 한국신학연구소, 28~34쪽), 나는 둘로 압축할 수 있다. 현 정권의 지지 아니면 비판.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이 책은 실보다 득이 훨씬 많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국정 농단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촛불 집회가 들불처럼 번지자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전가의 보도인 양 로마서 13장을 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성경에 대한 헌신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자라는 것이다. 반면, 바울은 국가가 선한 일을 장려할 때의 조건에서 복종일 뿐, 악한 일을 했을 때는 당연히 항거해야 한다는, 소위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을 펼쳤다.

나의 우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장난질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섬기는 종이지, 성경을 부리는 주인이 아니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바에 무릎 꿇고 겸손히 듣고 따라야 할 텐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성경이 대신 말하게 하는 것은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세기의 말씀을 21세기에 읽는다. 그런다고 21세기를 1세기에 밀어 넣고 내가 듣고픈 말을 하라고 윽박질러서야. 오늘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 위해서는 그때 그들을 위한 말씀으로 먼저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시의적절하고, 현재의 시국을 성경으로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퍽 유익하다. 책의 부제가 말하듯, "촛불의 시대, 성경이 말하는 권세와 복종 그리고 저항"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마음잡고 읽으면 한두 시간이면 적절한 분량(147쪽)과 가격(9,000원)이다. 무거운 주제를 학술적으로 접근하기보다 대중의 필요와 요구에 맞게 기술했다. 문장도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 성경을 숙고하고, 시대를 고민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보다는 성경에, 신학보다는 본문에 집중한다. 그건 성서신학자다운 선택이리라. 저자는 "여는 말"에서 이 책의 한계와 초점을 분명히 밝힌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접근을 하지 않는다. 좋은 책을 친절하게 소개한 뒤, 자신은 신약 연구자로서 텍스트가 말하려는 바를 충실하게 전달하고 숙고하도록 돕겠다고 한다(11쪽). 신학적 관점이나 정치적 실천을 모색하는 하나의 자료와 재료로 자신을 제한한다.

<로마서 13장 다시 읽기> / 권연경 지음 / 뉴스앤조이 펴냄 / 147쪽 / 9,000원. 뉴스앤조이 현선

책은 현재의 정치 상황이 아닌, 대형 교회의 목사들의 설교 분석에서 시작한다(1장). 그들의 로마서 13장 설교는 가히 충격적이다. 저자의 말처럼 "성경과 무관하거나 혹은 비성경적 가르침이 적지 않다." 그 실상을 직접 읽어 보기 바란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성경을 펼쳐 놓고 자신이 읽은 신문을 설교한다. 칼 바르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겠다. 양손에 성서를! 차라리 신문을 안 보는 것이 낫다. 그래도 신문과 시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에게 외친다. 한 손에 성서를, 다른 한 손에 다른 관점의 두 개의 신문을!

여기서 권 교수는 아주 중요한 해석의 틀을 제시한다(28쪽). 정치와 정권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성경 본문은 로마서 13장,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 13장은 적어도 로마서의 일부분이고, 성경 66권의 다양한 메시지의 작은 한 부분이다. 또한 그 본문은 당대의 특정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무작정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안 된다. 로마서 13장은 만능열쇠도, 도깨비방망이도 아니다.

2장은 로마서 13장을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시도를 한다. 모든 성경 해석의 최종 원칙은 문맥이기에 일차적인 작업은 본문이 위치한 맥락을 살피는 일이다. 내 생각을 말한다면, 13장 1-7절의 맥락은 로마서 내에서 세 개다. 하나는 13장 1-7절을 앞뒤에서 감싸는 12장 14-21절과 13장 8-10절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 안에 13장이 놓여 있다. 조금 멀게는 몸으로 예배하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12장 1-2절, 멀게는 로마서 전체이다. 이 세 가지를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면 이 본문이 잘 읽힌다.

그렇게 읽으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원수를 갚지 말라는 가르침의 구체적 사례로 바울은 로마제국과 권력을 언급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원수 사랑의 가장 적절한 예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정황(43~47쪽)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악한 원수를 선대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 세대의 통상적 행동 양식에 동화되지 않는 길이었으리라. 너희 원수 로마를 사랑하라! 악한 로마를 그들의 방식, 곧 폭력과 무력으로 대응하지 말고 십자가의 방식으로 저항하라!

사실, 나와 같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저자가 맥락 속에서 읽어 낸 것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위대한 행동이지만, 악이 보편화되고 구조화된 현실을 사는 보편적 방법일 수는 없지 않을까?"(42쪽)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저자가 저 인용문의 바로 위에서 하였다. "12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악한 일을 당할 때 이를 유사한 행위로 되갚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악한 일을 당해도 그 악을 응징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을 벗어난다. 악에 진노하고 이를 응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배타적 주권에 속한다."

다른 곳에서도 대답한 바 있다. 권 교수에 의하면 바울은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무려 일곱 번(66쪽)이나 언명한다. 저자 말마따나 그냥 간단히 복종하면 된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반복한 이유는 뭘까? 내 상상인데, 일차적으로는 바울 자신이 쉽게 납득이 안 되기에 복종해야 할 이유를 오래 곱씹었던 것이 아닐까? 이차적으로는 로마의 성도들이 반론과 반박이 거세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원수 된 로마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인 우리를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말이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3장 차례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참으로 까다롭고 껄끄러운 본문을 차근차근 풀어 준다. 위에 있는 권세를 로마 사람들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통치하는 권력자로 해석한다(51~52쪽). 여기서 바울 사도의 정사와 권세에 관한 논의를 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권세는 정치적 권력만이 아니라 영적인 권세도 동시에 아우르는 단어이다[이에 관해서는 개혁주의자 베르코프의 <그리스도와 권세들>(대장간)과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한국기독교연구소)을 참조하라]. 단지 세금을 거두어 가는 그런 권력에 대해서 반드시(50쪽) 복종하라는 가르침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악하고 위험한 요소가 있기에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고, 바울이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권 교수의 탁월함은 다른 데서 빛난다. "위에 있는 권세"를 국민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53~58쪽).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구절에 입각한 로마서 13장 해석이다. 그렇다면 복종의 주체인 국민이 복종의 대상도 된다는 말이고, 1세기 당시에 국민이 권세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을 리 만무하고, 더 나아가 바울에게서 권력의 궁극적 원천은 하나님이다. 따라서 "아무리 팔을 비틀어도" 그렇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복종과 관련해서의 저자의 논지를 정리한다면 두 가지(58~64쪽)이다. 하나는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능적인 차원에만 국한될까, 라는 의문도 있다.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에도 하나님에게만 돌릴 수 있는 충성을 바쳐서는 안 된다는, 국가는 하나님만 받을 수 있는 충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만약 국가가 그걸 명령하면 우상숭배라는 지극히 자명한 기독교 신앙의 전제를 기억하면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권 교수는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일침을 놓는다(62~64쪽). 종교적인 차원에서 혹은 개인적인 이유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정치권력 집단과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교회와 설교라는 공적 맥락에서, 시민으로서 정치에 관해 말할 때, 사적(私的) 견해를 신적(神的) 주장으로 함부로 치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목사가 장로의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느냐?"는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개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하면, 목사가 천박하다고 하려나? 그럼 그런 설교한 목사는?

그가 장로라서, 너무 불쌍해서와 같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성경이 복종을 말하는 걸까? 저자는 4장에서 우리가 복종해야 할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이고, 현실적으로는 권력의 순기능 때문이다.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force)을 갖고 있다. 달리 말하면, 합법적인 폭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것이 국가이다. 국가가 그 권력과 폭력을 함부로 사용하여 자신을 신적인 존재인 양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고, 개인의 내면과 정신, 양심을 강제하면, 우상이 되고 만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 질서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우리 각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강제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집행하는 것은 국가의 선하고 순한 기능이다. 이는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국가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협력하고 따라야 한다. "통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하며, 그로써 세상의 질서 유지라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한다."(74쪽)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국가권력에 복종해야 할 까닭이다.

바울이 말한 복종은 권력 일반이나 로마제국의 정당성의 승인이 아니라 실용적이라는 판단(86쪽)에 대해 나는 의아하다. 권 교수는 "바울은 질서가 있는 세상을 믿었"고, "이 세상의 정치 질서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의 일부"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속에서 아래에 놓인 자는 위에 있는 자에게 복종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28~30쪽) 그리고 복종의 신학적인 이유를 설명한 다음, 곧이어 그것이 실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악함에도 불구하고 선한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를 향해 이 본문이 놓인 세 개의 맥락은 복종이 신학적임을 명백히 주장한다.

이 본문이 야기하는 논란 중 하나는 악한 권력과 정부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일 것이다. 권 교수는 이는 텍스트가 말한 바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98쪽). 그 지점까지 확장하지 않았고, 불복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으며,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나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불복을 말했을지라도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저자는 로마서 13장을 벗어나서(저자는 "넘어서"라고 했지만, 나는 벗어나서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찾는다. 5장에서는 구약을, 6장에서는 신약을 다룬다. 어떤 독자들은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여기서 찾을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불만이다. 로마서 13장 읽기가 애초의 의도이었고, 이 책의 한계와 범위이었다면, 그 말씀에서 모종의 결론을 내렸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의 독법으로 보자면, 부당하고 불의한 로마 권력에 대해 바울은 비폭력적인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온몸으로 예배하는 삶이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에게 원수요 죄인 된 인간을 용서하고 의롭다 하시는 방식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촛불 집회의 평화적 저항과 연결했다면 글의 일관성도 살고, 로마서 13장을 다시 읽자는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사족을 하나 더 덧붙인다면, 양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에 저자는 납세의무와 함께 병역의무(143, 144쪽)를 끼워 넣는다. 기독교 평화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 이 대목에서 그 말은 생뚱맞다. 로마서 13장에서 말하는 복종에 병역이 포함되는가? 그것은 로마서 13장이 말하는 바인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가르침의 맥락에서 총과 칼로 국가의 원수요 대적인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복종하라는 말은 아무리 로마서 13장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나올 수 없는 말이지 않을까?

"로마서 13장은 정부 권력에 대한 순종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 잘못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35쪽)는 저자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로마서 13장은 세금 납부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한(5장과 6장)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을 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 친구를 원수로 만들어 살상하라는 국가의 명령에도 순종하라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득보다 실이 많은 성경 본문을 다시 읽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득보다 실을 더 많이 끄집어내서 비평한 듯싶다. 로마서 13장에 대한 왜곡이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바울은 그 본문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잘 듣고, 적용하기 위해서 바울의 시대와 우리 시대를 의미 있게 연결하는 "해석학적 다리 놓기"(15쪽)를 잘 수행한 이 책을 집는다면 실보다 득이 클 것이다. 이 본문과 관련된 숱한 책 더미 가운데 가장 먼저 이 책을 읽는다면, 덜 헤맬 것이다. 이것이 득보다 실이 많은 서평의 마지막 말이다.

김기현 / 목사, 로고스서원 대표

권연경 교수의 <로마서 13장 다시 읽기>(뉴스앤조이) 온라인 구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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