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터뷰는 <뉴스앤조이> 소식지 18호에 실린 것으로, 소식지에 다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해 두 차례 게재합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뉴스앤조이 김은석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양대 인물은 루터와 칼뱅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루터교회를 칼뱅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모여 장로교회를 이루었다. 전 세계에 루터교인은 약 7,600만 명, 장로교인은 5,000만 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교회 용어 사전>, 가스펠서브, 생명의말씀사). 그런데 한국으로 오면 그림이 많이 달라진다. 장로교회는 수백 개 교단에 수만 개 교회, 교인은 600만 명에 달하지만 루터교회는 교회도 교인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지난해 가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청어람ARMC는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기획 강좌를 5회에 걸쳐 열었다. 강사로 나선 최주훈 목사는 한국 루터교회의 대표 격인 중앙루터교회를 2010년부터 목회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이자 신학자다. 독일에서 루터 신학을 공부한 그는 이 연속 강좌에서 루터와 그의 시대가 써 내려간 종교개혁 이야기를 능숙하고 막힘없이 풀어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루터에 대한 수박 겉핥기식 이해를 넘어서고, 종교개혁 정신을 환기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그를 소개하고 싶어졌다. 마침 장로교 내에 칭의론과 관련한 논의의 물꼬가 튼 터라 그와 관련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지난 12월 서면과 대면을 오가며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해 간추렸다.

- 한국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뉴스앤조이> 독자들에게도 루터교회는 친숙하지 않을 텐데, 루터교회와 목사님이 루터교 소속 목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간단히 소개해 주시지요.

한국에 교회는 49개, 현직 목사는 60여 명 남짓하니 천연기념물보다 더 희귀한 멸종 위기종인 셈이지요. 하지만 개신교의 시작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한국 루터교회는 1958년 미국 루터교회의 한 교단인 미주리시노드(synod)의 선교 사업으로 시작됐지요. '선교'라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일 텐데,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국에 온 미국 루터교회 선교사들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교회가 즐비한 것을 보고 새로운 선교 정책을 세우게 됩니다. 그때 세운 정책이 "교회를 섬기는 교회"였고, 그 정책에 따라 방송 선교('루터란아워', '이것이 인생이다'), 문서 선교(기독교통신강좌, 컨콜디아사), 성경 공부 프로그램(베델성서) 같은 것으로 한국교회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지금도 이 정신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교 초기부터 소위 '공격적 마케팅'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전력투구했다면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겠지요.

저는 루터대학교, 한신대 대학원을 거쳐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제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 목회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기장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독일에 있을 때 제 은사께서 한국에 가면 꼭 루터교회 목회자가 되라고 말씀하셔서 아무것도 재지 않고 한국 루터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돌아보면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분이 아니었다면 루터교회 목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좋은 교사의 모습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었고, 그런 분께 배운 루터의 신학을 저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라는 표어가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겠지만, 한국교회 안에서는 '오직'이란 부사에 방점이 찍혀 극단적으로 율법 무용론, 행위 없는 구원, 성서근본주의 등을 부추기는 이들의 논거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 표어들에 담긴 본질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본다면 '오직'이라는 구호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종교개혁을 논할 때마다 '16세기는 부패가 극에 달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는 권위주의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말씀을 심하게 왜곡시켰고, 본질이 흔들리다 보니 윤리적 병폐도 심각해졌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은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니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중세 사회가 이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른 각도에서도 설명하곤 합니다. 두 가지인데, 첫째는 14세기부터 불어닥쳤던 유럽의 흑사병, 둘째는 라틴어로 획일화되었던 유럽의 소통 구조를 꼽을 수 있지요.

중세 유럽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가 책임지는 완벽한 '종교사회'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14세기부터 10여 차례 몰아친 흑사병은 유럽을 초토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1347년부터 약 3년간 창궐한 흑사병은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흑사병은 신의 저주로 불렸고, 전염병이었기에 일반인은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신의 대리자로 알려진 사제들만 수습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흑사병 시신을 수습하던 사제들이 일반인들보다 사망률이 높아졌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겨납니다. 일반인들은 사제들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지게 되었고,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교회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죽어 나간 사제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전과 달리 교육받지 못한 무자격자들이 대거 사제 신분을 얻게 된 것이죠. 지금이야 정상적인 목회자가 되기 위해선 수년간의 신학 공부를 마친 다음 안수를 받고 목사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하지만, 루터 당시엔 일단 사제로 안수받은 다음 신학을 공부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루터가 사제가 된 다음 신학을 공부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입니다. 이렇듯 교육받지 못한 성직자의 대량 양산은 교회가 부패할 수밖에 없고, 개혁의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잠재적인 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교회의 소통 구조가 라틴어로 획일화되었다는 점은 개혁의 불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가 1,100여 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수용되었고, 미사 역시 라틴어로 집례되었지요. 문제는 당시 사회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문맹률이 높았다는 데 있습니다. 16세기 독일 뉘른베르크 같은 대도시의 경우에 라틴어를 모르는 문맹인이 95%나 될 정도였으니 시골은 더 심각했을 게 뻔합니다. 이런 상황에 라틴어를 모르는 사제들이 대거 발탁되었으니 교회의 꼴이 어떻게 돌아갔을지 짐작할 만하지요. 실제적인 예를 들어 볼까요? 교회 미사는 라틴어로 집례됩니다. 그런데 집례하는 사제가 라틴어를 모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억에 의존해서 앵무새처럼 주절거리며 미사를 집례하게 됩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라틴어를 모르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라틴어를 아는 평신도가 있었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요?

1,100여 년간 불변의 진리로 여겨진 라틴어 성경 불가타.

이런 우스운 상황 때문에 15~16세기 독일에서 등장한 독특한 문학 장르가 하나 있는데, '불평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장르는 사제들의 무식함을 평신도들이 비꼬고 풍자한다는 특징이 있지요. 어쩌면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이런 불평 문학이 온라인에 넘쳐나니까요.

흑사병 때문에 대거 출현한 자격 미달 사제들은 교회의 구조적 타락을 불러왔지요. 중요한 건, 성서를 읽지 못하는 평신도 때문에 타락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서를 스스로 읽지 못하고 해석하지도 못하고 소통할 수도 없던 획일화된 폐쇄 사회가 결국 종교개혁의 단초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더 큰 불을 지핀 건 인문주의자들의 공헌, 신대륙의 발견, 금속활자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 루터입니다. 제가 보기에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은 일어났을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개신교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아갑니다. 21세기 대한민국 개신교 상황은 흑사병도 없고, 신학교도 넘쳐나고, 교회도 목사도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여기저기서 '다닐 만한 교회도 없고, 존경할 만한 목사도 없다'는 푸념이 들려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단지 '영성' 없는 목사들이 많아서일까요? 제가 보기엔 신학 교육, 역사에 대한 이해, 소통에 대한 이해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으로 시작되는 개혁자들의 구호는 본디 '생각하고 실천하는 신앙'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에 붙인 95개조 논제의 내용 역시 자세히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 없을 것 같습니다. 핵심 내용이 무엇인가요?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으로 알려진 95개조 논제의 핵심은 1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회개하라' 명하실 때, 그 회개는 우리의 전 삶이 돌아서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틀에 박힌 명제 같지만, 실은 성서 본문을 해석한 것입니다. 루터가 언급한 회개는 '돌아선다'는 뜻의 헬라어 '메타노이아'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를 원어 그대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 일은 충격적이었습니다. 1,000년 이상 불변의 진리로 여겨지던 라틴어 성경 불가타는 이 구절을 "죗값을 치러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번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려면 죗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죠. 이 구절을 근거로 중세 교회는 '보속'(補贖)이란 개념을 만들었고, 연옥 교리와 함께 죗값을 치를 수 있는 정교한 교리 시스템을 만들게 됩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 교회는 '공로의 보화를 담고 있는 창고'이며, 이 창고의 문을 열 수 있는 천국 열쇠의 주인이 교황이라고 가르칩니다. 보속의 수단은 다양했는데, 중세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물 숭배와 성지순례, 면죄부 같은 것들이었지요. 문제는 당시 교회가 보속 교리를 악용해서 교회 재산을 불리고 기득권을 수성했다는 데 있습니다. 루터는 95개 논제로 바로 이 점을 공격한 것입니다.

최주훈 목사는 95개조 논제의 핵심이 1조의 "회개하라"는 내용에 있다고 말한다.

- 종교개혁 원리로 만인사제론 역시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이 역시 표피적 이해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용어는 '모든 신자의 만인 사제직'입니다. 줄여서 만인사제론이라고 부르지요. 이 이론은 성서적 근거 위에서 나온 선언으로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주교든 교황이든 모든 성직자는 회중의 대표로 선택된 사람이므로 종교적 기득권을 독점으로 행사하며 특권계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소명을 뜻하는 독일어 '베루풍'(Berufung)은 성직자에게만 썼습니다. 성직자는 하늘이 선택했으므로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그 직이 끝까지 간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이처럼 성직자에게만 사용되던 소명이란 용어를 세속 직업에까지 확장해서 씁니다. 베루풍이란 '천직', 즉 모든 세속 직업은 하늘의 소명(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도 만인사제론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루터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세속 통치자, 관리,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도 역시 모두 성별받은 사제·주교와 같다." 여기서 핵심은 '서로에게 사제가 되고,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기꾼과 같은 것도 천직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루터가 내거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직업'이라면 거룩한 성직이요, 천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독일에선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이 칭의론인가 아니면 만인사제론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성서에서 발견한 교리적 이해는 '칭의론'일지 몰라도, 종교개혁 역사의 추동력은 만인사제론에서 일어났다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만인사제론은 세속 직업의 가치를 높인 '직업소명론'이라는 열매를 맺었고, 사회적으로는 수평적 소통 체계를 강조한 결과 서구 민주주의의 기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장로교 신학자 중에는 성화를 강조한 칼뱅과 비교하며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의인 칭의를 강조했으나 능동적 의인 성화를 구원의 필수 요소에서 배제시켰으며 복음과 율법,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위, 신학과 윤리를 분리시켰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루터의 칭의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고 보시는지요.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근본정신은 잘 알려진 대로 '이신칭의', 즉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로 요약됩니다. 루터는 슈말칼드 조항(Schmalkaldische Artikel)에서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이를 교회 교리의 핵심으로 꼽습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대부분 이 점에 동의하면서 '칭의론의 중심성'을 근거로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런데 루터교회 밖에선 칭의론을 강조하는 루터교회를 협소한 교리 중심 교회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성화가 약하다, 인간 책임성의 자리가 없다"고 단정하기도 하고, '구원파적 신앙의 시조'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칭의론을 구시대 발상의 산물이라며 루터교회를 골동품 취급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루터의 칭의론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 채 나오는 것 같습니다. 루터교회의 '칭의론 중심성'에 대한 신학적 논박을 하는 것은 이 짧은 인터뷰에서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루터의 신학을 단편적으로 보거나 자기 교파 신학의 틀로 루터를 재단하고, 근본주의 신학을 배타적으로 전개하는 경우에 이런 일들이 생깁니다.

루터교회 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칭의라는 단어나 개념, 혹은 칭의론이라는 교리가 아니라 '칭의론의 기능'에 있습니다. 칭의는 단순한 구원의 선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또 늘 새롭게 만나야 하는 구원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 말입니다. 칭의라는 말을 사용하든 안 하든 상관없습니다. 이 구원의 현실을 늘 새롭게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루터교회 신학의 주된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론의 기능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인간적 왜곡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끝없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킵니다. 칭의론의 기능은 이 왜곡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루터의 칭의론, 만인사제론 등을 표피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 루터가 생각한 구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흔히 천국에 대해 죽어서 가는 저승이나 피안의 세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루터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교리문답>에서 루터는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 대해 "죄와 죽음과 악마의 권세에서 풀려나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죄와 죽음, 악마의 권세가 무엇인지 아는 게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나라가 구원이라는 겁니다. 구원은 죽은 다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선취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루터의 구원관은 칭의론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거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이웃의 관계, 나와 나 즉 자기 양심과의 관계(루터는 양심을 성령과 말씀이 내주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세 가지 관계가 깨어진 것을 루터는 죄라고 얘기합니다. 도둑질이나 살인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문제로 본 게 아니지요. 그렇게 보면 이 땅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이 깨어진 관계를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잇대고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구원의 역사를 "낯선 의"라고 표현합니다. 칭의론 논쟁에서 자주 나오는 용어이지요. 밖에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총인 "낯선 의"가 나를 치료하고, 죄의 상태 즉, 깨어진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 루터 칭의론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아주 간단해요. 수직적으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으로는 '나와 이웃'의 관계,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직선이 만나는 점에 '나와 내 양심'의 관계가 있는 거지요. 루터의 칭의론을 얘기할 때 반드시 이 세 가지 관계를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칭의론이 전개되고 관계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절대 수직적 관계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책임을 언제나 함께 얘기해야 합니다. 칭의론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책임을 항상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루터의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요.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인 동시에 만물의 종이다." 이 한 구절이 칭의론의 기능을 잘 대변합니다. "만물의 주인"이란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 악마와 죽음에서 자유롭고, 절망을 뛰어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칭의받은 인간은 자유인이되 책임적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세상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 장로교 개혁 진영의 논의를 들여다보면 최종 심판과 그 판결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가령 인간의 순종, 선행이 최종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하신 것으로 끝인가를 이신칭의 문제의 핵심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최종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루터의 신학에서 그 부분에 대한 답은 다소 모호합니다. 반면 루터에게 중요한 맥락은 십자가 신학이었습니다. 십자가 신학은 우리 이성을 뛰어넘습니다. 질문에서 얘기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교리적으로 판단하려는 것 아닌가요? 루터는 하나님이 우리의 경험과 이성, 판단을 뛰어넘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것이지요. 너무 배타적으로 주장해서도 안 되고요. 흥미롭게도 루터파 안에서는 스스로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는 자를 '의인'으로, 자기 부족함을 더 깊이 아는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루터의 이해 안에 서 본다면, 교회 공동체는 '의인 공동체인 동시에 죄인 공동체'인 셈이지요.

루터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또 있습니다. "용감히 죄를 지어라. 그러나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오해하기 쉬운 말이지만 이 말은 훗날 본회퍼 목사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칩니다. 본회퍼 목사가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려야 한다"며 히틀러 암살단에 들어가기로 결단한 것은 루터의 이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최종 심판의 근거를 율법 조항이나 교리적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비, 공의라고 본 것입니다. 범죄자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암살단에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확고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본회퍼는 살인죄와 악에 눈감지 않는 공의 사이에서 갈등했을 겁니다. 그렇게 갈등하던 본회퍼가 암살단에 들어갈 수 있었던 신학적 단초는 1521년 루터가 친구 멜란히톤에게 보낸 편지에 있습니다. 거기 보면 "용감히 죄를 지어라. 그러나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과 갈등의 순간을 만나지요. 그때 이 편지의 내용은 큰 도움을 줍니다. 이 글에 선택의 기준이 몇 가지 제시됩니다. 그중에 "선한 미래를 위해 선택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개인의 유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길을 선택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선택한 이상 그 책임을 달게 지되, 그리스도의 용서와 부활을 신뢰하며 책임 있는 행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본회퍼는 확고한 신앙에 따라 결단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것을 각오했으며 그 선택이 선한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암살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역시 교회와 사회, 국가의 문제로 인해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율법이나 교리적으로는 철저히 무장해서 개인 구원에만 목숨 걸고, 사회와 국가 공동체의 아픔에 대해서는 눈을 닫게 만드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하지만 루터의 신학으로 보자면, 그런 율법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자세는 또 다른 기준 즉 선한 미래를 위해 책임지는 행동에는 게으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계속. 다음 기사에서는 농민전쟁, 두 왕국설과 관련한 오해들,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는 독일 교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인터뷰 기사 내용의 상당 부분은 앞서 언급한 청어람ARMC 강좌에 빚을 졌다. 강좌 영상은 추후 청어람ARMC 홈페이지에서 조건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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