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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소통 혁명이다

루터가 보여 준 언어 혁명의 힘…개신교 정신은 소통을 통해 저항하는 것

최주훈   기사승인 2017.02.03  11: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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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는 종교적 권위가 교황 체제에 집중된 중앙집권 시대였다. 이런 권위 체제의 아성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근간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오로지 그 독점은 라틴어를 통해 유지되었다. 뒤집어 말하면 교회 권력에 있어서 라틴어가 아닌 각 지역 속어의 사용은 그 자체가 잠재적 이단이자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성서번역과 해석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사람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루터

다 알듯이 중세 시대 유일한 공식-합법적인 성경은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였는데, 당시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외의 다른 언어로 된 성경을 소유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재했던 1517년 잉글랜드에선 자녀에게 주기도문을 영어로 가르쳤다는 이유로 7명의 부모가 화형당한 일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통제와 권력'에 관한 문제였는데, 중세 사회는 언로를 획일화하고 통제하는 것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이라고 믿었던 사회였다. 이것은 소통이 가로 막힌 중세 사회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종교개혁은 소통의 혁명'이다. 문화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6세기 서양사를 "문화혁명"이란 말로 집약한다. 그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우면서 16세기 서양 역사 변혁의 본질적 힘은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에서 시작되었고, 이 소통의 혁명은 중세 사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가 지역 언어로 '속어화'되는 것을 핵심으로 보았다.1) 여기서 언어의 '속어화'란 소수 권력층이 독점하던 진리가 다수의 민중 세계로 소통의 영역을 넓혀 간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의 속어화를 통한 문화혁명은 인문주의, 신대륙 발견,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같은 복합적 요인과 함께 힘을 얻게 되었고, 이런 언어 혁명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루터는 독일어와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지식인과 비지식인층 모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양자를 아우를 수 있는 소통능력으로 라틴어의 담으로 막힌 중세 시대를 뚫고 나가는 역사 변혁의 폭발력을 가져왔다.

루터,
지식인 비지식인
아우르다

루터가 라틴어와 자국어인 독일어로 된 글들을 활발히 저술했고,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루터조차도 "나는 배우지 못한 민중에게 독일어로 설교하거나 독일어로 책을 쓰는 것을 결코 부끄럽지 않게 여긴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는데, 이 말은 거꾸로 '신학 박사 학위를 지닌 사람이 속어를 사용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당시 에라스뮈스가 지식인 사회의 최고 지성으로 꼽혔음에도 루터에 비해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차이가 여기 있다. 에라스뮈스는 학자들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던 반면, 루터는 학자들에겐 라틴어와 철학으로 대항했고, 그 내용을 독일어 민중에게 독일어로 풀어 직접 호소했다. 이렇듯 루터는 지식인과 비지식인을 아우르는 소통의 힘을 사용할 줄 알았다.

이런 좋은 예가 하나 더 있다. 잘 알려져 있듯 1517년 가을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파급력은 극도로 미약했다. 아니, 실제로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단계에서 루터는 단지 대학과 성직자 세계 내부에서만 논의할 의향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봄 독일어로 번역되어 인쇄되자 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2주일쯤 지나자 도처에서 대중들이 읽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95개조 논제가 너무 신화화되는 바람에 '게시하자마자 독일에 퍼져 나간 것'으로 착각하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길 바란다. 가을에 게시된 이 글은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에 라틴어 문맹률이 95% 이상 되는 독일 땅에서 그렇게 단시간에 퍼졌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저 라틴어를 아는 몇몇 사람이 관심을 가졌고, 이런 관심은 통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이 조잡하게 번역되어 이곳저곳에서 회자되자 루터의 동료였던 Justus Jonas는 이듬해 1월에 루터의 정식 감수를 받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그런 다음 날개 돋친 듯이 독일 전역에 퍼진 것이다. 라틴어는 관심 없고, 독일어로 된 95개조 논제가 관심 폭발한 것이다.

이는 폐쇄적 종교 사회에 소통의 힘이 가지는 종교개혁의 일면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소통의 가속화

이렇게 자국어를 통한 소통의 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속화되었다. 하나 더 사례를 들어 보자. 1520년 루터의 3대 논문이 나오게 되자 폭발적인 판매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바벨론 포로>,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이 셋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의 경우 출판된 지 며칠 만에 4,000부가 매진되어 연이어 15판을 더 찍었다. 루터가 평생 쓴 글 가운데 독일어 성서를 다음으로 많이 읽힌 글이 바로 이것이다.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의 전체 내용은 공의회 소집에 관해 다루고 있다. 루터는 부패한 로마교황청에 대항해 제후들이 힘을 모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역사적 근거는 니케아 회의이다. 신학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교회의 직분은 기능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본질적으로 모든 직분은 평등하며, 모든 성도는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만인사제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후에 계몽주의와 서구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가 되었다. 중심 논지를 요약하면 '교회가 너무 높은 벽을 쌓아 스스로 갇혔다'는 것이다. 이를 루터는 세 가지 벽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높은 벽. 교회를 성직자가 다스리는 것이 신앙적인 일인가? 둘째는 성서 해석의 벽. 말씀 해석의 권한이 평신도에게는 없는가? 세 번째는 공의회 소집의 벽.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가 문제 삼는다.

이 논문은 권위의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 공동체가 소통을 통한 신앙의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즉 교회는 근본적으로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이기에 성직자의 독점적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교황을 탄핵하자는 도발적인 글 내용이 독일어로 민중 속으로 파고들 때 충격적이었을 것은 훤하게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 출판물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고 소통의 파괴력을 가진 것은 단연코 루터의 성서번역이었다. 이는 교회사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언어사적 관점에서도 그렇다.

1522년 독일어 신약성경이 번역 출판되었을 때는 '9월 성경'으로 불리는 초판이 3,000부 인쇄되었고, 일찌감치 같은 해 12월에 제2판이 나왔으며, 이후로 11년간 고지독일어로 14회, 저지독일어로 7회 중판을 냈다. 루터가 살아 있는 동안 모두 10만 부 이상 인쇄되었다. 1534년 루터의 신구약 완역본이 나온 이래로 1622년까지 85판을 찍어 냈다. 당시 폐쇄적인 종교 세계를 종교개혁자들이 어떻게 돌파해 나갔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판을 거듭했던 데 그치지 않고, 계속 개정을 더했다는 점이다. 이런 개정 작업을 통해 진리는 민중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고, 이를 통해 종교개혁의 소통은 더욱 힘을 얻었다. 또한 번역된 독일어 성서의 언어는 단순히 자국어를 중시하는 분위기나 종교적 수준에 그치지 않고 표준 독일어 형성과 그 고정화 과정에 본질적 역할을 했으며, 더 나아가 주변 유럽 국가들의 자국어 성서번역 열기를 북돋은 결과, 성서의 속어화는 북구와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같은 시기에 일제히 진행되었다.

교회 전통 바꾸다

루터가 머리에 담고 있던 복음의 사상은 교권에 찌든 교회와 지식인 사회라고 하는 대학을 넘어 중세인들이 염원하던 구원의 길을 향한 지도마저 바꾸어 버렸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소통의 혁명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종교개혁은 인쇄술과 더불어 유럽의 교육 전통과 교회 전통을 변혁하는 힘이 되었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책이나 판각화 같은 출판물들이 있었지만 이것들이 중세 신앙의 형태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중에는 신화나 전설을 다룬다든지 경건서적이나 신앙에 관한 단편집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신앙 양태까지 변혁하지 못했고 그 시장도 폭이 좁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사상을 담은 글들은 종교, 문화, 법, 교육, 시장경제 체제이라는 사회 전반에 반향을 일으키며 출판 시장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말을 좀 뒤집어 보면, 인쇄술을 통한 시장의 폭발은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앙이란 신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이며, 이는 신학적 범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삶의 영역까지 포괄한다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말씀이 세상 속에 성육한 것뿐만 아니라 활자로 변하여 종이 위에도 찍혀 세상을 소통케 만든 사건이다. 성화(聖畵)와 신비적 예식이 있던 자리에 성서 활자가 들어서면서 중세 시대는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이는 곧 중세 시대 종교 언론의 독점적 기관이었던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앙 체계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 문맹률을 고려한다면 활자체계와 발을 맞춘 종교개혁의 폭발력은 반감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은 어린 아이들과 문맹자들을 위한 기초 교육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루터의 <소교리문답서>(1529)이다. 이는 당시 높은 문맹의 사회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문맹률을 현저히 낮추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루터의 글들은 대중들이 모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읽히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이를 통해 종교개혁의 사상들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당시 독일에서도 루터를 반대하는 지역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지역도 종교개혁 사상과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게토는 아니었다. 공개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지역들에서는 비밀리에 개혁자들의 글과 성서를 함께 읽고 공부하는 공동체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 공동체들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로 공식적으로 편입되면서 중세 신앙과는 구별된 신앙 공동체로 승화해 나아갔다.

소통하여 바로잡는
저항의 힘

이런 흐름은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예배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민중의 언어가 자리 잡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로마교회의 사제가 소유하던 신앙의 독점적 지위와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중세 권위 체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공동체가 공감하며 참여하는 수평적 공동체를 이루게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소통은 본질적으로 종교개혁 실천 강령의 핵심이 되는 Sola Scriptura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 복음을 담고 있는 성서의 말씀은 구교회가 전유하고 있던 성직자 중심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진리를 향한 종교적 담론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폐쇄적이고 일방적으로 선포되던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만으로'의 원리에 따라 질문과 토론이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신학의 발전과 신앙인의 삶의 자리도 변혁되기 시작했다.

성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인간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비추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성서만으로'의 원리 아래 민중들이 말씀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개개의 신앙인이 어떤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고 거룩한 성찰들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신교 정신은 바로 그런 것이다. 소통을 통해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Protestant)하는 것. 즉 구습에 질문을 던지며, 그 질문지로 소통하고, 그 소통의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힘. 그것이 개신교 정신이다. 우리가 루터를 배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16세기 당시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여러 그룹들이 존재했었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크게는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성공회, 조금 늦게는 웨슬리안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 보면, 당시 이 네 그룹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일종의 경쟁 상대였다. 그럼에도 공통분모는 확실했다. 일종의 '반-가톨릭 진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반-가톨릭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앞선 시대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소통을 통해 재해석하고, 그 해석의 힘으로 자기 삶의 자리를 변혁시켜 나간다는 것이 개신교 진영의 공통점이다.

종교개혁 정신은 간단히 말해, '질문하고 소통하여 바로잡는 저항의 힘'이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힘이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

각주

1) 야마모토 요시타카, <16세기 문화혁명>, 남윤호 역(서울: 동아시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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