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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의 위기는 어디서 오나

[이제는 바꿔야 할 교회 윤리] ②교회의 공동성과 강단의 자유

박충구   기사승인 2017.01.30  22: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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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종교

내가 본 가톨릭교회 중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성당이라면 개신교의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베를린교회(Berliner Dom)가 아닌가 싶다. 성베드로성당의 중심은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 영광의 제단이라 할 수 있으나, 베를린교회의 중심은 역시 금관처럼 꾸며 놓은 강단이다. 베드로성당으로 들어가는 좌우의 문 옆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서 있다. 반면 베를린교회에는 교회를 받치고 있는 기둥 곁에 루터, 츠빙글리, 칼뱅, 멜란히톤이 서 있다. 이 교회는 특별히 루터와 츠빙글리를 강단 좌우에 배치해 놓았다.

구교가 교회의 모퉁잇돌이 된 베드로와 말씀의 증언자로서 사도가 된 바울을 신앙의 모범으로 보았다면 개신교는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들을 중시했다. 또한, 베를린교회 강단 위쪽에는 성서적 사건의 중심이 된 두 인물이 부조되어 있다. 하나는 돌을 맞고 있는 스데반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다. 당시 베를린교회를 짓던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기둥 삼아 현실에서의 고난을 수납하고 미래의 지평에서는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는 의미에서 개신교 신앙을 고백한 셈이다.

가톨릭교회의 제단에는 사제가 홀로 서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집전할 때 사제를 곁에서 돕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개신교 강단에 서는 이는 설교자 한 사람뿐이다. 가톨릭교회 미사 중에도 강론이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중앙에서 준비된 메시지를 낭독하거나 사제가 무엇인가 그것에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목사의 경우 홀로 설교를 준비하고, 준비된 설교문에 기초하여 말씀을 증거하는 경우가 원칙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눈의 종교라면 개신교는 귀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제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 예배에서 예배자들은 사제의 제의적인 행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성체에 참여하는 성찬을 나누는 데 초점을 둔다. 개신교는 바라봄의 종교, 눈의 종교가 아니라 귀의 종교, 들음의 종교다. 이런 이유에서 베를린교회의 경우, 1,650개 좌석은 설교자가 서 있는 강단을 향해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고, 설교자가 서서 말씀을 증언할 강단은 고귀한 왕관처럼 꾸며져 있다.

귀의 종교

귀의 종교인 개신교는 이렇듯 말씀의 증언자가 예배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말씀 증언자의 영적이며 신학적, 도덕적인 능력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개신교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씀 증언자의 기초 신학적 훈련은 신학대학에서의 훈련 과정에서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씀 증언자로서 성서에 대한 궁구와 영성적 훈련, 그리고 언어적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인 훈련은 평생 이루어져야 할 과제다.

설교자는 이런 점에서 질 높은 연구와 영성적 훈련과 독서를 병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증언자로서 주어진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었기에 개신교는 강단의 자유를 목회자에게 맡긴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데 있어서 강단 증언자의 신앙 양심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그가 그 자유를 행사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의 소명의 전제로서 신학적인 것이다. 이는 교회 전통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7년 현재 한국의 교회 숫자는 약 7만 8,000개다. 편의점 수가 2만 5,000개인데 비하면, 편의점 1개 있는 곳에 교회가 3개 세워져 있는 셈이다. 매주 예배 시간이 되면 최소한 7만 8,000명의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 말씀을 증거할 것이다. 이 모든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볼 수 있다면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말씀의 증언자가 선 강단은 몇 가지 요소에 의해 치명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첫째는 말씀 증언자의 인문학적인 인식 능력, 곧 넓은 의미에서 지성의 위기다. 둘째는 말씀 증언자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생존의 위협에서 오는 소명의 위기다. 셋째는 개교회주의로 인한 연대성을 상실한 경쟁에서 오는 윤리적 위기다.

지성적 위기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지성적 위기를 맞고 있다. 목사가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려면 영성적 능력도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지성적 능력도 요구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지성을 무시한 영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흐름을 조장하는 신학적 성향은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근본주의신학이다. 무수한 목회자들이 근본주의 성향에 동조하는 근본 원인은 그들의 매우 낮은 학문적 능력 때문이다.

정규 신학대학교를 나온 이들에게도 문제가 많지만 400여 개에 이르는 무인가 신학교에서 양산되는 목회자들은 너무나 쉽게 반지성주의라는 흐름을 선택한다. 이런 흐름에 편승하여 정규 신학대학에서도 학력의 수준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신학대학 입학생들을 분석해 보면 중·고등학교나 대학에서의 학력이 전국 백분율 하위 10%에 속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이들은 신학대학이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준비한 커리큘럼을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을 정도다.

최근 강남에 지어진 화려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학력을 세탁한 사실로 인해 교계에 추문이 일었다. 그는 학위논문을 표절하고, 학력을 과대 포장해 자신의 학문적 능력의 취약성을 감추려고 부정직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심지어 심혈을 기울여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이 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박사 학위 명패를 걸어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입으로는 반지성주의를 외치는 영적 지도자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평균 이하의 학력을 감추기 위해 허위 학위를 돈 주고 사는 예도 있다. 이런 모든 양태는 형식과 허례, 명분과 체면 문화가 조장하는 과시 욕구를 이겨 내지 못하는 목사들의 자화상이다.

이렇듯 허위의식에 가득 찬 이들이 지키는 강단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실성 없는 반지성주의와 더불어 도덕성이 없는 강단의 권위는 결국 복음의 근본을 파괴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이들이 세워진 강단에서 어떤 복음이 울려 퍼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이들은 개신교 전통이 목사에게 맡긴 강단의 자유를 지킬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영성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통전적인 성실성의 의무와 정직의 의무에 아랑곳하지 않는 성직은 결국 강단을 타락시킨다. 정직이라는 것이 상식임에도, 정직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 잡은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상식 이하 수준의 설교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위기가 찾아온다. 부도덕한 그들의 의식에서 기독교의 도덕적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지성적 위기가 결국 강단의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의 신뢰도가 수년간 20%에도 못 미치는 원인은 목회자의 수준 이하의 지성적 능력과 도덕적 판단 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로서의 목회자는 신학적 훈련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신학 훈련에 게으른 이들이 바른 신앙의 길로 신자들을 인도할 리가 없다. 또한,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목회자는 지성적 능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성 능력의 미달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저학력 비지성적인 이들이 그 상태를 감추기 위하여 반지성적 영성 운운하며 신자들을 우둔함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미성숙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지성적이며 인문학적인 인식 능력이 평균 이하인 목사일수록 다른 이의 설교를 우왕좌왕 표절하고, 일반의 비판에 피해 영성을 강조하며 반지성주의적 설교를 남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 이들은 복음의 전파자가 아니라 복음의 장애로 기능하게 된다.

생존의 위기

개신교 교회의 강단을 개신교 신학과 영성, 그리고 인문학적 이해 능력이 미숙한 목사들이 이끌고 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상태를 더욱 극심하게 조장하는 요소는 80%에 이르는 목회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생존의 위기다.

199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교인 수는 정체되어 있다가 2010년 이후부터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반면 쏟아지는 인가 비인가 신학교 졸업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감리교회의 수는 6,518개인데 목사는 1만 725명이고, 예장합동의 경우 교회 수는 1만 1,593개인데 목사 수는 2만 2,216명이며, 예장통합의 경우 8,592개 교회에 1만 7,468명의 목사를 두고 있다. 3개 교단만을 종합해 본다면 2만 6,703개 교회에 5만 409명의 목사가 있다. 이에 더하여 매년 약 4,000명이 정규, 약 6,000명이 비정규 신학교를 졸업한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말씀을 궁구하고 독서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 말씀의 증언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무임 목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전국 7만 8,000개 교회 중 약 80%에 이르는 교회 목회자들은 정부 기준 기초 생계비를 받지 못하는 극빈 목회자들이다. 교단마다 교회 연 예산 3,500만 원 혹은 3,000만 원이라는 미자립 교회의 기준이 다르지만, 현실에 있어서 목회자의 기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 교회는 전체 교회의 약 20%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교단마다 교인 수는 줄고 있고 목사 수는 여전히 늘고 있다.

이런 극빈의 상태에 처하는 목회자를 양산하는 구조는 과도한 성직 소명감을 조장하는 목회자들의 그릇된 인식에 비롯된다. 지상에서 목사직을 최상의 소명으로 여기며 이를 영예스럽게 여기는 성직 제일주의가 보편화돼 있는 탓이다. 이런 길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학력자라도 누구나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될 수 있는 신학 교육 구조의 허점 때문이다. 정규학교가 안 되면 무인가 학교라도 가면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될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양산된 목사들의 신학적, 지적 훈련의 극심한 결핍이다. 결국, 이들 중 소수의 성공(?)적 인물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매우 비참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저학력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성직자의 길은 고도의 경쟁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출구로도 간주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들이 강단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자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목회지를 가지지 못한 무임 목사들이 증가하고 있는 한편,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미자립 교회 목사들은 전체 교회 8할에 이르는 형편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 기독교 안에서 무수한 설교자들이 기초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치솟는 전세 임대 보증금으로 인하여 가난한 목회자의 삶의 자리는 더욱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요즈음에는 목회자들이 마지못해 부수적인 직업을 가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내가 아는 이들 중 대리운전 기사를 하는 이, 조그만 커피 가게를 운영하는 이, 노동 현장에서 막노동하는 이도 있다. 물론 이러한 이중 직업도 도시 인근에 거주할 때만 가능하다. 대부분 목회자는 이중 직업의 기회를 가질 여건도 없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아예 목회를 접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현실은 목회자 간에 심각한 경쟁 구조를 유발하기도 하며, 목회지를 선점한 이들의 뿌리박기도 이어진다. 나아가 자연스럽게 더욱 안정된 목사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회를 향한 약진과 이동을 선호하는 적자생존적 성향을 조장하고 있다. 여기서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궁구하고 심혈을 기울여 강단에서 전할 메시지를 준비할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갈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부유한 교회를 향한 약진의 길은 대부분 목회자에게 있어서 고도 경쟁의 길이다. 이 경쟁 가도에서 유리한 이들은 역시 강력한 교권을 가진 큰 교회 목사와 근친성을 가진 이들이다. 대형 교회 부목사들은 담임목사의 영향권 안에서 경쟁 관계가 아닌 특혜를 입을 기회를 더 많이 얻는다. 그러기에 대형교회 부목사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 교회 명성을 부러워하는 장로들이 기다리는 중형 교회로 이동하곤 한다.

이렇게 찾아간 자리는 다음 자리를 위한 징검다리가 되고, 더 나은 교회로 이동할 수 없을 경우 그 교회를 향한 무형의 소유권을 행사하듯 뿌리를 내린다. 여기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이들은 대형 교회 목사의 자제들이다. 그들은 교단 정치의 대가인 아버지의 그늘 아래 남다른 특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특혜 중 하나가 소위 교회 세습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성공한 이들을 포함해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난 목사들은 겨우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목사, 강단을 가지지 못한 목사가 오늘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강단의 자유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이들에게 목사로서의 신학적 독서, 지성적 독서, 그리고 시대정신과 대화할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빈곤한 목회 현실은 강단을 더욱 부실하게 만들어 강단의 위기를 심화하고 있다.

공동성의 위기

가난한 목회자도 깊은 영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고, 사회적 여건과 목회자의 성실성이 있다면 미자립 교회를 부흥시켜 큰 교회를 이루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적자생존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야만적 관계를 승인하는 것이다. 미자립 교회를 부흥시켜 큰 교회를 이룬 성공적인 목사들은 지극히 소수이며, 이들은 대부분 개척자 주권증이라는 질병에 걸린다.

한 교회에 오래 머문 목사일수록 그 주권증의 정도가 극심해진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날 시간이 되면 목사 주권을 돈으로 바꾸거나 자기 자식에게 넘겨주는 가장 비신학적이며 비윤리적인 자의가 유통된다. 한국 기독교는 교단을 막론하고 이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승인하는 우매함에 빠져 있다.

서구나 미주 교회들 역시 이러한 우매함에 빠진 적이 있었다. 서구에서도 대형 교회 목사들은 자신이 세운 교회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영예스럽게 여기는 게 은사적 지도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교단에서는 이런 행태가 불가능하다. 목사가 교회를 향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배교적 행태로서, 신학적 정당성이 없다. 배교적 행태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부자 간에 사사화(privatization)하고, 목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개척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찬탈하던 습성을 융통시킨 엘리 집안의 범죄와 같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공교회라 여기지 않고 목사와 장로 소수가 한 교회와 그 교회에 드려진 헌물과 재화를 독점하여 지배하는 데 있다. 교단의 교리와 교회법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도록 비대해지면 그 교만은 하늘을 찌른다. 강남의 대형 교회 몇을 예로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러한 현실은 하나님 말씀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교회 정치가 소수자의 특권과 지위를 지키고 나누는 데에서 강단의 자유를 제한하고, 특정한 이들이 자의에 따라 강단을 점유 배분하는 것이다. 귀의 종교가 개신교의 본질인데, 정작 교회의 중추가 강단의 말씀이 아니라 친족 간 유대가 지배하는 교회 정치에 모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외양이 제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하다 하여도 하나님의 교회라 불릴 수 없다. 한편에서는 가난으로 인하여 강단의 위기가 오고, 다른 편에서는 교회 정치가 강단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이다. 한편에서는 금수저들의 잔치가 있고, 다른 편에서는 흙수저들의 빈곤이 있는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 간의 연대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서구의 교회들에서 배울 수 있다. 독일이나 미국의 주류 교단 교회에서는 목사의 주권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철저하게 제약하고 있다. 개교회주의가 불러오는 목회자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교단적 중재와 재분배 노력으로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공동성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교회 간의 우애적 공동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목사 임기제를 통해 목사가 한 교회를 점유하여 뿌리내리고 일평생을 주인처럼 지배하는 형태의 목회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다. 목사는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개교회 주인처럼 행세할 수 없다.

합리적 제도를 통해 교단 내 목사들이 강단의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최저생계비를 보장하고, 교단이 목사의 수급을 조절해 잉여 목사들이 양산되는 폐해를 미리 방지하고 있다. 부유한 교회들이 더 많은 부담금을 내 약한 교회 목사들의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교회의 공동성을 지켜 나갈 때 '교회 일치'라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목사들은 일정 기간 소임을 마치면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종"으로서 자기의식을 지킬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한 교회에 걸터앉아 주인 행세하는 목회는 불가능하다.

공동성의 위기는 결국 일치의 정신은커녕 고도의 경쟁 구조를 유발하고, 교회 간 경쟁, 교인 간 경쟁이나 교인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형 교회들의 교인들을 빼앗아 부유하고 거대한 교회를 이루어 내는 데에서 목회의 성패가 갈리는 것이다. 거대한 교회를 이루어 내면 그 교회에 바쳐지는 모든 헌금은 개교회 것이 되고 마는 부조리가 당연시되고 있다. 부유한 교회는 문어발처럼 거대한 프로젝트를 벌리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서 부유한 교회를 경쟁적으로 더욱 비대하게 만들어 간다.

결국, 목사와 그 목사를 조력하는 교인들의 왕국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성공적인 목회라고 여기고 자기들끼리 우선순위 다툼을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 안에 있는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성의 위기는 강단의 일치를 깨고 강단을 사유화하게 만들어 기독교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강단의 위기 넘어서려면

제아무리 목사가 복음적 소명과 굳건한 신앙이 있다고 해도 7만 8,000개 교회에 약 15만 명의 목회자가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비정상이다. 목회자의 저학력, 빈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참모습이다. 여기에서 가나안 신자들이 생산된다. 그런데도 마치 무한한 잠재성이 있는 양 허세를 부리며 오늘도 젊은이들을 무작정 신학대학이나 신학교로 무책임하게 몰아가고 있다.

교회는 목회 후보생을 가려 뽑아 훈련해야 하고, 신학 교육은 사교육이 아니라 교단적 공교육이 되어야 한다. 교단마다 목사 수급 계획을 세우고 그들의 최저생계비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목사 주권증이라는 역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개교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면 결국 이판사판의 교단 정치를 하루속히 청산해야 하고 교단 정치가들의 책임성과 도덕성이 먼저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머뭇거리면 결국 교회들의 몰락 길에서 더는 성직을 소명으로 여기지 않는 세속화에 교회가 점령당할 수도 있다.

올해에는 신학대학마다 지원자 미달 사태다.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영성과 지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목사가 강단에 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 이미 말씀의 종교, 귀의 종교에서 강단의 위기는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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