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의 송아지> / 임택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336쪽 / 1만 6,000원

얼마 전 진화론 분야의 꽤 이름 있는 저자가 책을 냈다. 그는 1990년대 기독교 관점에서 전통적인 창조과학론 문제를 지적하며 유신론적 진화론 등을 반론으로 제시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K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던 것 같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전공을 떠났고, 한국에서 진화론 관련 이론가로 상당히 부각됐다. 과학 지식에 대한 무지와 한계로 그의 책을 부분적으로밖에 접하지 못했고, 최근 나온 그의 책도 읽고는 싶지만 아직까지 흥미 있는 몇 부분만 들쳐 본 정도다.

직접 저자와 만나거나 대화한 적은 없지만, 그의 글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강한 거부와 부정을 느꼈다. 진화론과 종교는 같이 할 수 없다는 단언은, 그가 신앙인으로서 걸었던 길을 부정하는 듯했다.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과거 자신이 가졌던 입장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도 특이했다.

그 학자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글을 쓰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지 과학으로 신앙을 풀어 보려던 그가 어떤 연유로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단지 창조과학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신앙을 포기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데, 공학도였다가 진화론을 같이 공부하게 된 것이 과연 그를 이렇게 선회하게 한 원인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중학교 시절, 교회 수련회 특강에서 유력 공기업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젊은 집사님 강의를 통해 H.M. 모리스의 창조과학을 접했다. 그 시절 학교에서 배우던 진화와 창조의 불일치를 경험했고 개인적으로는 나름의 해결을 보았다. 그것이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말이다.

청소년 시절에는 몇 권의 관련 서적을 읽었고, 청년 시절에 신앙으로 과학을 어떻게 풀어 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수정해 나갔다. 이후 세계관 공부를 통해 과학을 비롯한 일반 학문을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창조론에 나름대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학자들의 글 덕분이다. 그렇기에 서두에 언급한 학자는 내게 무척이나 아쉬움을 준다.

<아론의 송아지>(새물결플러스)를 읽으며 그가 계속 떠올랐다. 창조과학계의 폐쇄성이 신앙 안에서 고민하고 몸부림치던 당시 젊은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을 넘어, 전혀 다른 계기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치 지금 교회 곳곳에서 부패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무조건 교회에 충성하라고 말하는 교회 지도자나 어른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 모습 같다. 직접 들은 적 없지만 당시 젊은 수정적 창조과학자들이 겪었던 고충을 기억한다. 조금만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이단이나 배교자처럼 여겼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추측하건대 당시에 있었던 그런 부딪침이 신앙과 과학의 결별을 낳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과학을 신앙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객관성과 논리를 간과하거나 신앙에 대한 단순히 종속적인 가치로만 여겨진다면 정상적인 토론이나 연구는 불가능하다.

나름 여러 책을 읽으며, 교회 내 목회자나 열심 있는 신앙인 일부와 창조론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창조론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데도 진화론자가 기득권을 이용해 창조론자에게 텃세를 부리고 있다고 여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창조론 강의를 듣다 보면, 그것이 세상 논리에서도 당연하게 먹혀들 정도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강의를 들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접하는 현장은 그렇지 않다. 또 창조론은 학계에서도 당연히 무시당한다. 창조론이 기본적인 팩트나 논리의 문제 자체를 제대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창조론 강의를 하는 이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은 아니다.

기본적인 학문적 접근 자세를 갖추지 않고 변론자로서만 접근한다면, 기초적인 토론에서부터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창조론 학자나 지적설계론자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이 당시에는 없었다.

문제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창조과학 중심부에 있는 분이 과학적으로 학식이 없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전공은 달라도 학문적으로 올바른 시각만 견지한다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데도 폐쇄적인 마음이 편협한 시각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진화론의 파도가 신앙과 교회를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낳은 것일 테다.

학자가 아닌 일반 성도에게 전문적인 과학 지식과 그에 대한 판단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기에 신앙을 가진 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올바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답답한 것은 창조론 강의를 하는 분 중 적지 않은 이가 비전공자라는 사실이다. 단지 교수라는 이름으로 비전공 학문 분야 이야기를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학자도 공학도 입장에서 본 진화론과, 전문학자의 길에 들어선 이후 본 진화론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나온 <아론의 송아지>는 창조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올바른 학문적 태도를 가지라고 말한다. 창조론자가 갖고 있는 학문에 대한 기본 태도 문제와 팩트에 대한 무시, 그들의 잘못된 논리를 비판한다. 토목공학자로서 저자의 시각을 더해 재밌게 창조론자의 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신앙인의 태도를 견지한다. 진화론 입장을 견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다. 진화를 성경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느 정도는 나타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신앙과 과학을 분리하기만 하면 끝인가. 또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이 배제된다면,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미이며 그의 삶에 어떤 존재로서 자리하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이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생각해야 한다. 나는, 그의 책을 부정하거나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최근에 나오고 있는 저자와 같은 입장을 담은 책은 맹목적인 창조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당장 결과물을 내놓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최근 창조론자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면서, 이 같은 비판이 또 다른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경과 과학책은 접근법 자체가 다르고 글을 쓰는 관점도 다르다. 세계관도 다르다. 중점을 두는 부분도 다르기에 성경을 과학으로만 풀 수 없고, 과학을 성경으로만 풀 수 없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학과 신앙의 완전한 분리나 집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포도주를 화학 공식으로 푸는 것과 맛으로 설명하는 것 두 가지 중 어느 하나가 틀리다가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신앙과 과학에도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창조론자들은 그 공통분모를 찾으려 시도했던 것일 수 있다. 단지 그 풀어 가는 방식이 잘못됐던 것이지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고 본다. 그것이 신앙과 과학의 연계성을 보여 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단지 첫걸음이 정답인 양 멈춘 이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처럼 젊은 지구론에 비판이 가해진다는 것이 또 다른 면에서 '진정한 창조론'으로 가는 한 발이 될 것이라 믿는다.

P.S.

1. 안타깝게도 이 책 저자도 '진화론'과 무관한 비전공자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진화와 관련해 상당한 전문 지식을 보여 주기는 한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듯 (글의 성실성과 별개로) 비전공자 문제도 잔존하고 신뢰성도 떨어질 수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 전문학자의 글이 나올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제대로 된 신앙적 관점에서 본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2. 이 책을 읽으며 원래는 서평적 글을 쓰고 싶었지만 이 방면에 지식이 일천하여 그저 이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을 그냥 쏟아내는 글을 쓰게 됐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문양호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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