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한나 아렌트가 2차 세계대전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취재하며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은, 평범한 인간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 가운데 어떻게 악이 얼마든지 그 힘을 드러낼 수 있는가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원죄 교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는 사실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개념이긴 하지만, 이 개념은 우리가 따분하고 시시한(banal) 삶 가운데서도 죄를 옹호하고 즐기며 기뻐하는, 그런 가련한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었지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아이히만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그렇게 가련한 존재입니다.

원죄 교리를 믿든 그렇지 않든,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알아 가며, 그에 따라 어렸을 때 그토록 좋아하던 '위인전'이 사실은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종차별 철폐에 큰 공로를 세운 마틴 루터 킹은 사실 여자관계가 복잡했고, 링컨은 언론을 탄압하고 (뜻밖에도!) 의회를 탄압한 적이 있으며, 세종대왕조차 자잘한 오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미화와 왜곡을 최대한 배제하고 한 인물을 그려 내는 평전을 통해 인간을 알아 갑니다.

주일학교 때 우리는 성경의 인물을 위인적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들었지만 밧세바와 우리아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지혜를 구하고 지혜로운 재판을 하며 성전을 지은 솔로몬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의 추악한 죄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직접 성경을 읽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이스라엘을 당시 고대 근동 최강국으로 만든 솔로몬이 사실은 이스라엘 몰락의 원흉이며, 추악하고 허무한 죄를 반복해서 짓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게 되지요.

<솔로몬: 어떻게 유혹을 이길 것인가> / 필립 라이큰 지음 / 김명희 옮김 / IVP 펴냄 / 332쪽 / 1만 6,000원

솔로몬과 그리스도

필립 라이큰은 열왕기상을 통해 드러난 솔로몬의 인생을 추적하면서, 그의 선행과 악행을 남김없이 그려 냅니다. 솔로몬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책 내내 일관적입니다. 바로 솔로몬이 돈, 섹스, 권력의 유혹에 서서히 무너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인 동시에 우리처럼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이큰은 솔로몬을 설명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돈, 섹스, 권력의 유혹 앞에 서서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무너지는 가련한 악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왕이었으니 돈, 섹스, 권력의 유혹이 있었던 것 아닌가? 우리와는 다르지!" 하지만 라이큰은 솔로몬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그가 죄의 유혹 앞에 무너졌던 지점들은 모두 그의 평범한(banal) 삶의 결정을 내리던 순간들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결국 솔로몬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평범한 삶 가운데서 악을 행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책이 솔로몬의 장점과 단점, 그의 선행과 악행을 분석하여 선행을 권장하고 악행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부류의 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을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개선이 필요하기보다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변하는 책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개선이 아니라 구원이며, 따라서 성경은 단순한 개선책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왕이 누구인지 선포해 줍니다.

그리고 라이큰이 제시하는 그 구원의 왕은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그래서 라이큰이 쓴 솔로몬에 관한 책은 사실 솔로몬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그는 절망적인 왕을 제시하며 솔로몬보다 더 큰 왕이신(눅 11:31)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솔로몬의 선행보다 더 완전한 방식을 행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솔로몬과 같이 실패한 자들에게 구원자로서 그리스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실수를 보고 배우기

그래서 책의 뒷 표지 카피로 나오는 "나의 실수를 통해 배우라!"는 절대로 솔로몬과 같은 실수를 하지 말고 잘 살라는 자기계발서와 같은 멘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솔로몬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솔로몬의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그의 실수를 피하라는 교훈이 아니라, 그의 실수가 내 안에도 있으며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면, 저는 솔로몬보다 더 작은 영화 앞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혜로 질 낮은 글 한 편을 썼다가 예상 외로 받은 작은 칭찬과 격려 앞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아를 칭찬하는 가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만은 늘 제 일상의 뻔하고 시시한(banal) 삶의 행동, 말, 생각, 결정에서 드러나지요. 저는 책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솔로몬보다 못한 자라고.

그래서 저는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를 찾습니다. 그리고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를 기쁘게 전하길 원합니다. 필립 라이큰이 이 책에서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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