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기독교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2017년 1월 출범한 '프락시스'(PRAXIS)는 2017년 12월 1일 해산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입장문(바로 가기)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지금까지의 걸음을 멈추고 다른 길을 가려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가 노년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그저 돈 잘 벌어 가족들 배 불리고 노후나 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평범하게 살아온 대한민국의 소시민.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어느 날 가치의 전환을 경험한다.

교계 신생 단체 기독교사회실천연구소 김민수 대표는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름 뒤에 붙은 '대표'라는 직함이 여전히 어색하다. 김 대표는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60대다. 다른 점이라면 최근 막 기독연구원느헤미야에서 신학 공부를 마쳤다는 것 정도다.

김민수 대표는 올해, 교계에서 꾸준하게 아카데미 운동을 하던 청어람ARMC, 연구 집단 카이로스와 함께 한국 사회와 기독교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플랫폼 '프락시스'(PRAXIS)를 시작한다. 프락시스는 '행함', '실천'이라는 뜻이다. 아직 이름조차 생소한 '프락시스'를 시작하는 김민수 대표를 만났다.

노동운동 활동가에서
입시 학원 원장까지

김민수 대표는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로 교회에 가게 되면서 예수를 접했다. 반유신·반독재 운동이 한창인 1977년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관적인 신앙 표현에 익숙했던 김 대표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신앙 없이도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친구들을 보며 신앙인으로서 모습을 다시 고민했다.

기독교사회실천연구소를 시작하는 김민수 대표와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을 알게 됐다. KSCF는 당시 민주화 운동 최전선에 있던 학생 선교 단체였다. KSCF가 주최한 9박 10일 합숙 세미나에서 당시 반민주 운동에 앞장선 서남동·문동환 목사에게 강의를 들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선배들의 경험담을 직접 들으며 민중신학·해방신학에 눈떴다.

이후 구로공단으로 갔다. 노동운동에 마음을 둔 사람이라면 공단에 가던 시기였다. 구로공단을 주 무대로 한 산돌교회, 산돌노동문화원에서 공단 노동자와 함께 뒹굴었다. 그렇게 활동가로 살아가던 김 대표는 결혼과 함께 생업을 고민하게 됐다. 현실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오래전부터 꿈꿨던 혁명가 대신 한 명의 소시민으로 돌아갔다.

"결혼하기 전에는 사회가 혁명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생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녀가 둘 태어나니까 생계 문제를 책임져야겠더라. 마침 국제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유럽을 돌 기회가 있었는데, 유럽 국가들은 제도적인 개혁, 의회민주주의 틀 안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도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어 사회주의 체제로 가는 혁명적인 상황은 오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많은 사람이 활동가로서 자기 개인적인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삶을 다 바쳐 사회 변화를 위해 뛰는 시기였다. 하지만 사회는 오히려 자기 생업을 갖고 시민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만 한 사람이 막상 사회에 나왔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김민수 대표는 학원 강사로 나섰다. 민주화 운동에 열심이었던 사람이 사교육 시장에 발을 담근 것이다. 대치동·반포·노원 일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직접 학원도 차렸다. 입시 학원 특성상 1년 내내 일하는 구조였다. 주말도 없이, 저녁도 없이 그저 돈 많이 벌어 가족들 잘 건사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일했다.

김 대표는 "10여년을 운동권으로 지낸 사람이 교육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15년을 공헌했다"며 자조 섞인 미소를 보였다. 그 또한 자신의 삶이 그렇게 빠르게 세속화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가족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학원을 잘 유지해 원생 많이 받고, 가족에게 돈 벌어다 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가족들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신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도 통속적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수강료 빨리 내라는 얘기도 하기 힘들었는데 10년 지나니까 내 입에서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더라. 돈 벌어서 빌딩이나 하나 사면 좋겠다는 꿈을 꿨다. 교회는 학원 사업을 하면서 안 다니게 됐다. 처음엔 몇 사람이 모여서 가정 예배를 몇 년 드렸는데, 내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가정 예배 정도로는 부족했다. 모인 사람들도 비슷했던 것 같고, 그래서 흩어졌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가족들과 관계가 몰라보게 악화하고 인격도 파괴적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내·자녀와의 관계도 건강하지 않았다. 소통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김 대표는 '대한민국 남자가 이 정도면 평균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집을 정리하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가족사진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자녀들이 초등학생 되기 전까지는 4명이 찍은 가족사진이 많았는데, 학원을 시작한 뒤 찍은 가족사진에서 '아빠'는 없었다.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내 고집대로 내 확신대로 인생을 선택해 왔고, 그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전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에 무너졌다."

김민수 대표는 최근 기독연구원느헤미야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최근에는 광화문광장에 나가는 일이 잦았다. 뉴스앤조이 현선
마음속 맺힌 질문

학원을 접었다. 가족 관계 회복을 최우선 가치로 뒀다. '화목한 가정'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족 관계가 얼추 회복됐다고 느꼈을 때 다시 일을 시작했다. 과거 노동운동을 함께한 후배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거쳐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가정과 일이 자리를 찾았지만 아직 한 가지 회복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신앙이었다.

"과거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민중신학·해방신학 관점으로 신앙을 정립했다. 기독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때 예수를 다시 알게 됐고 내 인생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개인 신앙의 영역보다 역사적·사회적 지평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의식과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도 삶의 자리에서 가족을 책임지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시민으로 잘 서지 못했다. 내적인 힘이 약했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과정에서 신앙이 크게 작용을 못했을까', '왜 신앙을 놓아 버리게 됐을까'를 고민하다 내 신학적인 이해에 약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문득 처음 예수 믿었을 때 가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예수는 누구인가'. 마음속에 항상 맺혀 있는 질문이었지만, 기성 교회에는 물을 수도 없었고 물었다 한들 답을 듣기도 힘들 것 같았다. 신앙인으로서 느끼는 궁금증을 정리하기 위해 기독연구원느헤미야에서 신학 수업을 들었다.

김근주 교수에게 듣는 첫 수업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김민수 대표는 과거 구약성경의 필요성을 그리 크게 느끼지 못했다. 헌데 구약에서도 가장 율법적인 레위기 수업을 들으며 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평소 학생운동을 하면서 접했던 민중신학이 갖는 한계를 고민했던 김 대표는 느헤미야에서 강의를 들으며 신학을 균형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신학 공부를 했지만 목사가 될 생각은 없다. 목사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기독교와 사회를 연결하고, 이론을 실천의 장으로 옮길 것인지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기독교사회실천연구소'다. 막상 시작하려니 혼자서는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문의한 결과, 함께 이 고민을 확대해 나갈 사람들을 만났다.

함께 고민할 사람 찾습니다

교계에 이미 많은 신학 연구소가 있다. 그런데 굳이 종교와 사회,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고민하는 연구소를 시작하려는 이유는 뭘까. 김민수 대표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때 누구나 고민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시민이라면 경제활동을 할 것이고 정치적인 선택 즉 투표를 한다. 사람마다 선택을 할 때 작용하는 가치관 혹은 신앙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자기 안에서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해 결정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기독교인이라 해도 이 사회에 속한 시민으로서 정체성도 있다. 건강한 모습을 지닌 시민으로서 필요한 고민이다.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 프락시스가 추구하는 바다."

프락시스는 기독교사회실천연구소, 청어람ARMC, 연구 집단 카이로스가 함께한다. 학기 시작 전 열린 공개강좌에서 대담하는 양희송 대표(맨 왼쪽, 청어람ARMC),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 박치현 박사(카이로스). 뉴스앤조이 이은혜

프락시스는 이제 시작 단계다. 고민을 나눌 사람을 모으고 있다. 한국 사회에 속한 시민인 동시에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함께 연구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2017년 2월부터 시작하는 프락시스는 쉽게 말하면 함께 책을 읽고, 연구하고 생각을 나누는 곳이다. 기초적인 사회과학 이론을 공부하지만 점차 사회학적 관점에서 신앙을 보는 데까지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사회학 이론, 지식사회학, 종교사회학, 역사, 사회과학 방법론, 기초 통계, 논문 작성법 등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이론을 섭렵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회과학 분야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빙했다. <한국 기독교 흑역사>(짓다) 저자 강성호 씨, <말과 활> 정용택 편집위원, 실천신대 종교사회학 정재영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 디비니시스쿨 종교사회인류학 박사과정에 있는 서명삼 씨, 토론토대학 지리학 한주희 교수 등이다.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는 수업이 아니다. 매주 문헌 리뷰 또는 에세이를 제출해야 하고, 분기마다 1회 이상 정해진 텍스트를 읽고 발제해야 한다. 연구 과제(보고서 혹은 소논문) 형식의 서평 과제도 있다. 연구원들과 함께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논문 튜터링도 받을 수 있다.

기독NGO 활동가, 신학생, 사회과학 분야 대학원생, 종교사회학에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1년에 2학기로 진행되며 1월까지 신청을 받는다. 1학기는 2월에서 6월까지, 2학기는 8월에서 12월까지다. 프락시스 정원은 12명 내외며 세미나 장소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학비는 한 학기에 10만 원이지만 도서 구입 지원 등 학습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프락시스에서 제공한다.

지원서는 이메일(christpraxis@gmail.com)로 받고 있다. 지원 동기와 간단한 이력을 합해 A4 용지 1장 분량으로 작성해서 제출하면 된다. 서류 접수 후 필요에 따라 면접을 봐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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