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남 집사님의 '예수는 돈 받고 설교하지 않았다'에 이은 '평신도가 꿈꾸는 교회'라는 글 잘 읽었습니다. 또 다른 분이 링크를 올려 주셔서 집사님이 새로 시작하신 가나안 공동체에 관한 글도 읽었습니다.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셨다니 참 귀한 일이고, 다른 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선한 공동체로 세워져 가기를 바라고 응원합니다. 첫 번째 글에서 하신 주장을 두 번째 글에서 조금 보충도 하시고 유급 전임 목회자에 대한 관점도 조금은 누그러뜨리셨기 때문에 뒤늦게 비판적인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몇 가지 제 생각을 나누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집사님이나 저를 비롯한 진보 혹은 기독교 개혁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관 중의 하나는 '만인 제사장'이라는 개신교의 기본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과 속의 구분이 없으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제사장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중계자 없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저는 스스로 성직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여러 직분(저는 '직업'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지만 거부감 갖는 분들을 생각해서 편의상 '직분'이라고 쓰겠습니다) 중 하나이고, 제가 속한 교회의 현실상 남들보다 조금 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와 더불어 개신교의 중요한 기본 정신 중의 하나는 '직업 소명설'입니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거룩한 직업과 일반 직업이 따로 없다는 칼뱅의 주장입니다. 이 두 가지 전제의 토대 위에서 현대의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 목사는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교회의 직분입니다. 성서에서 그 원형을 찾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흔히 목사들이 스스로를 레위인이나 제사장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고, 혹은 모세 같은 지도자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대범함(?)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칭하기도 하고, 유대교의 랍비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현대의 목사라는 직분과 일치하는 것은 없습니다.

현대의 교회는 유대인의 성전이나 회당과 다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의식도 매우 다릅니다. 정치, 종교, 인종, 지역 생활에 있어서 동질성을 기반으로 했던 유대인들 종교와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기독교는 다릅니다. 성전은 희생제의 중심이었고, 회당은 토라의 강독이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공동 소유와 분배의 삶을 추구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와 교회는 경제적인 기반 자체도 다릅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 기독교인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초월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매우 강력한 종말론적 믿음, 종말과 재림이 곧 있으리라는 임박한 기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그때와는 다른 종말론적 신앙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에서 예를 들 수 있는 몇 가지 직분들은 (목사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하더라도) 목사와 다릅니다. 목사는 어느 정도는 레위인이나 제사장 같은 일도 하고, 어느 정도는 랍비 같은 일도 하고, 어느 정도는 사도들 같은 역할도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현대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과 역할을 요구받고 수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성남 집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교회의 여러 일들은 전임목사가 아닌 성도들의 자발적인 분담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이 부분은 교회 개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까지 다루려면 제가 말하려는 논점에서는 많이 벗어날 것 같아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성서의 내용이나 어떤 상황을 현대의 문제에 아무런 해석 없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레위인이나 랍비가 생업에 종사했고, 종교적인 행위의 대가를 받지 않았던 것이 목사의 월급 문제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일까요? 얼마든지 성서적 반례를 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서를 보면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서기관'이라는 직분이 등장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서기관들을 비판하시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서기관은 나쁜 사람들처럼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 서기관은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보존했던 전문 종교인입니다(이 부분은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서기관들의 반란>을 한번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제정일치 사회의 성전 국가에서 종교 문서를 연구하는 공직자이자 종교인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목사의 역할은 성서를 연구하고 가르친다는 면에서 서기관들이랑 유사한 점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이것을 목사 월급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성서의 문자적인 적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 혹은 '문자주의자'라고 합니다. 신성남 집사님이나 저나 그런 입장에서 기독교 개혁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목사의 월급 문제를 성서를 근거로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반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목사는 교회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직업이고 현대사회의 다양한 직업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직업은 거룩하다는 면에서 목사도 거룩한 직업입니다. 동시에 목사는 지극히 세속화된 교회의 여러 직분 중 하나입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 수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직업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직업이든지 그 노동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대해 성서를 근거로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한동안 감리교에서는 목회자들의 이중직을 금지해 왔습니다. 목회자들이 생업에 정신이 팔려 목회에 전념하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목회자들의 이중직을 허용했습니다. 교단이 더 이상 목회자들의 생계 문제를 책임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경우라도 성서적인 근거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른 것이고, 개교회의 요청의 의한 것이었죠.

예수님이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전임 사역자를 필요로 한다면 마땅히 그가 하는 일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안적인 새로운 공동체에서 전임 사역자가 필요하지 않다면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필요에 따라 목회자가 별도의 직업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어느 방식이 우월하다거나 성서적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성서의 공동체들이 각자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듯이, 각자의 공동체에 필요한 최선의 방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뿐입니다. 다만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목사 또한 철저한 직업윤리와 소명 의식을 갖고 월급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변영권 / 예사랑감리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