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교인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일 수 있겠지만, 레위인은 늘 제사 업무만 한 게 아니라 대부분의 일상을 주로 생업에 종사했다. 우리는 흔히 구약의 레위인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제사 업무만 관장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성경을 보면 레위인에게는 모두 48개의 성읍과 가축을 위한 초장이 주어졌다(민 35:1-8). 거기에는 그들이 받은 성읍의 크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레위 제사장'도 생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24개 반(역대상 23-24장)으로 편성되어 제사 업무를 담당했는데 각 반은 매년 단지 약 2주 동안만 제사를 수행했다. 그러니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생업에 종사한 건 극히 당연한 일이다. 레위 제사장은 파트 타임 사역자였다.

그 48개 성읍의 인근에는 초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거기서 노동해서 먹고 살았다. 그들은 다른 성읍과 마찬가지로 농사를 하고, 유목을 하고, 도기를 굽고, 그리고 옷을 만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레위인 중 상당수는 교사, 의사, 사서, 악사, 가수, 판사, 그리고 행정가로 일하기도 했다(Ernest L Martin, <The Tithing Dilemma>, 1997).

아울러 유대 회당의 율법 교사였던 랍비(rabbi)도 각자 자기 전문 직업을 가지고 말씀 사역을 했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물론 사도들의 초기 교회도 자비량 사역을 했다.

따라서 특정 직분자를 특권화하여 유급 제사장으로 만든 중세 교회의 '사제 제도'는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현재 개신교에 보편화된 '유급 전임 목사 제도' 역시 이런 지적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

그래서 최근 이기영 교수(Owens Community College)가 이에 대해 "유대교-기독교 역사상 가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처럼 이렇게 세속의 일을 안 하고 오직 말씀만 파는 계층은 없었던 것이죠. 초대 교회는 그러지 않았는데요. 뭔가 이상하죠?"라고 언급한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개혁은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현행 목사직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목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소중한 직분이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필요한 직분을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유급 전임 목회가 무조건 부적절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 필요의 특수성도 인정한다. 목회자들이 연봉을 받고 생계에서 벗어나 사역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정작 심각한 부작용은 그런 전임 목회 구조가 일반화하고 고착화할수록 그걸 지능적으로 이용하여 더욱 교권화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반드시 득세하는 게 문제다. 그리고 지나간 개신교 역사는 이 증상엔 어떤 특효약도 무기력했다는 걸 잘 보여 준다. 그 어떤 처방도 통하지 않는다. 백약이 무효다. 중세적 교권주의에 쩔은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그 증거다. 교회는 수세기 동안 그런 반복적인 악순환에 지속적으로 고통받았다.  

비록 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자비량 공동 목회'를 확장해야 옳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일단 현재의 유급 목회 현실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관습화하고 화석화한 전임 목회 구조는 하루 아침에 간단히 해소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특히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의 희생적 수고는 그 어떤 이유로든 함부로 폄훼해선 안 된다. 적은 연봉으로 검소하고 청빈하게 사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자비량 사역을 현재의 목회자들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해선 곤란하다. 단지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다. 혁명은 이상이고 개혁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지난 글에서 앞으로 "자비량 사역을 확장하자"고 제안했더니 혹자는 "그걸 강요해선 안 된다"고 한다. 또는 예수와 사도들이 약간의 접대와 후원을 받은 것조차 마치 생활비 전체라도 받은 것처럼 곡해한다. 게다가 일부 목회자들은 다양한 논리를 동원하여 자비량 사역을 공격한다.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전임 목회의 덫

나는 지금 상당수 목회자들의 사고가 스스로 전임 목회의 덫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왜 공동 목회를 하면 안 될까. 담임목사가 오로지 '내 목회'를 하려니 유급 전임 목사 제도가 필요한 건 아닌가.

대부분의 교회 교사나 찬양 인도자나 주방 봉사자나 안내자들이 자기 생업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처럼 목회나 설교 역시 '은사의 한 부분'으로 보고 교회 공동체를 꾸려 간다는 동역 정신이 있으면 얼마든지 자비량 사역이 가능하다.

도대체 누가 '유급 전임 목사'가 목회해야 한다는 규칙을 세웠나. 목사도 장로나 집사처럼 교회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굳이 온갖 교회 일에 목사가 너무 간여하려니 스스로 분주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장로와 집사가 해야 할 영역까지 목회자가 새치기한 측면도 많다. 이는 교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원칙적으로 직업이 아니고 은사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각자의 은사에 따라 목사는 설교하고, 장로는 총괄하고, 집사는 관리하고, 교사는 가르치고, 안내자는 안내하고, 심방자는 심방하고, 그리고 봉사자는 봉사하면 전임 사역자 별로 필요 없다.

유급 담임목사 없어도 교회 운영을 당회와 제직회가 주도하면 된다. 설교자도 더 필요하면 주변에 재능 기부할 자원자 제법 많다. 이렇게 못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는 공동 목회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찌하든 교회를 마치 영업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처럼 치밀하게 조직화하여 일주일 내내 예배와 프로그램으로 가득 채우고 가시적 성과를 내려 하니 전임 사역자인 담임목사가 필요하고 부목사와 전도사가 필요하고 줄줄이 수직적 관리 구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전임 목회'와 '공동 목회'는 선택의 문제이지 교리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예수의 사역을 따르는 길

유급 목회와 자비량 목회의 차이 또한 단지 돈을 받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그래서 이건 마치 유료 진료와 무료 진료의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병을 고치는 건 어떤 어떤 경우든 귀한 일이다. 따라서 나는 돈을 받고 병을 치료하는 걸 비판할 마음은 전혀 없다. 특히 그게 바가지 진료비가 아니라 매우 적정한 최소한의 실비로 받는다면 더욱 그렇다. 그건 아주 잘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가 무료로 병을 고쳤으니 오늘날 의사들도 무료로 진료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누구든지 설교하고 돈 받아야 마땅하다면 얼마든지 받기 바란다. 유급 목회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비량 목회도 충분히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은 병든 자를 고쳤다. 베드로도 고쳤고 바울도 고쳤다. 제자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했다.

그들은 돈이 없어도 고쳤고, 돈을 주지 않아도 고쳤고, 그리고 돈을 요구하지 않고 고쳤다.

자비량 목회는 예수와 사도의 사역을 따르는 길이다. 그 길은 누구를 탓할 이유가 없다. 또한 아무도 강요 안 한다. 제자들은 강요받고 그 길을 따른 게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기까지 그 길을 따랐다. 그러다 목 잘려 죽고, 맞아 죽고, 그리고 매달려 죽었다.

한국 개신교는 새로운 은혜, 새로운 이해, 그리고 새로운 회복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주신 진리의 복음은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새롭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제 때가 찼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500년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행17:19)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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