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협재리에 있는 조용한 마을에는 '신앙 공동체'가 살고 있다. 사진 제공 좌성훈

"아버지 저 공동체 만들고 싶어요. 제주 시내에 있는 아파트 팔고 협재리 땅에 집 짓고 살면 안 될까요?"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남자는 머릿속에서 맴돌던 단어들을 입 밖으로 망설임 없이 꺼냈다. 뜬금없는 제안에 아버지는 공동체가 뭐하는 데냐고 물었다. 남자는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한 마을에서 같이 사는 게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아버지가 말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보다 도시가 더 편하고 좋지 않을까? 누가 그런 데서 살겠다고 찾아오겠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허락을 받아 낸 남자는 2012년 제주시 협재리에 부모님이 살 집(13평)과 가족이 지낼 집(19평)을 마련했다. 제주도에서 '깡촌'으로 불리는 동네로 이사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만류했다. 대중교통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는 제주 안의 오지였다. 해안가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고 집 주변에는 온통 소나무와 감귤나무뿐이었다. 이사한 첫날 남자는 감사 기도를 올렸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좌성훈 씨(35) 이야기다.

좌성훈 씨는 신앙인이다. 대학에 입학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를 통해 신앙을 접했다. 선교 단체 활동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공동체 비전을 키웠다. 좌 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가는 문화와 교회 안에서의 피상적인 관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깊은 교제로 인격적인 만남을 이어 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공동체가 필요했다.

9년간 제주 IVF 간사를 맡으며, 틈틈이 공동체를 탐방했다. 좌 씨에게 공동체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 줄 하나의 대안이기도 했다. 기독교 규모도 작고, 폐쇄적인 제주도에 공동체를 세우고 싶었다. 그 무렵 경주 몸된교회 정동철 전도사의 조언은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동 한옥마을을 방문했을 때였다.

"한옥마을이 어떻게 형성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한 가정이 그곳에 들어가 살면 마을은 자연스럽게 형성돼. 공동체도 마찬가지야. 먼저 들어가 살면 사람들이 찾아올 거야."

공동체를 일구겠다는 강한 신념과 의지는 삶의 자리를 바꾸었다. 부인 고경선 씨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 씨는 자녀들을 아파트가 밀집한 시내보다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었다.

공동체는 제주 IVF 간사 출신 좌성훈 씨로부터 시작됐다. 뉴스앤조이 현선
공동체 식구가 생기다

누가 와서 살겠냐던 말이 무색할 만큼 반가운 소식은 일찍 찾아왔다. 좌 씨가 터를 잡은 지 3개월 만에 함께 살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 온 황정기 씨 가정이었다. 도시 생활에 질려 제주로 내려온 황 씨네는 문명 혜택이 닿지 않는 협재리에 정착하기 원했다. 몇 차례 만남과 논의 끝에 함께 살기로 했다. 황 씨는 직접 집을 지었다. 집 짓는 데 흥미를 느낀 황 씨는 포토그래퍼에서 목수로 전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가정이 둥지를 틀었다. 강정마을 개신교 모임에서 알게 된 김유승 목사 가정이었다. 김 목사는 평소 공동체를 꿈꾸며 기도해 왔다. 김 목사 가정은 좌 씨 부모가 살던 조립식 주택으로 이사했다. 이듬해에는 서서울 IVF 간사 출신 차지석 씨(36) 가정이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IVF 동기 간사인 좌 씨가 적극 권유했다. 마지막으로 감신대를 졸업한 하현용 목사(39) 가정이 공동체에 합류했다.

공동체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다섯 가정이 모였다. 좌 씨는 "이렇게 빠른 기간 안에 다섯 가정이 모일 줄 몰랐다"고 말했다. 무모하다고 평가받았던 도전은 제주 오지 안에 신앙 공동체인 '떨기나무공동체'를 낳았다.

공동체가 거주하는 집. 좌성훈 씨 부모님, 좌 씨 가정, 황정기 씨 가정, 차지석 씨 가정이 지내고 있다. '바깥 동네'에 사는 하현용 목사 가정은 이주를 준비 중이다. 뉴스앤조이 현선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역경

그렇게 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불행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차지석 씨 가정이 사기를 당하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집을 지어 주기로 한 건축업자가 수천만 원을 떼먹고 잠적한 것이다. 당장 오갈 데가 없어진 차 씨네는 좌성훈 씨 가정에 신세를 졌다. 방 2개, 거실·주방뿐인 곳에 두 가정이 8개월간 함께 지냈다. 가정마다 아이 둘이 있었고, 좌 씨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차 씨는 떼인 돈을 받기 위해 잠적한 건축업자를 찾아 나섰다. 돈을 받지 못하면 공동체를 꾸리기는커녕 길거리로 나앉을 판이었다. 힘들게 제주도 땅을 밟았는데 사기를 당하자 회의감이 밀려왔다. 선교 단체 활동만 해 온 차 씨는 "세상을 잘 몰랐다"며 자책했다.

아내 임은선 씨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내성적인 탓에 관계를 쌓는 데 8개월이나 걸렸다. 얹혀사는 것도 고되었고, 불만이 있어도 쉽게 말하지 못했다. 아이들 문제로 사소한 갈등을 빚을 때에는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차 씨에게 제주도행을 권한 좌성훈 씨도 괴로워했다. 자신 때문에 차 씨 가정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어려움을 겪는 차 씨 가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은행 대출을 비롯해 돈을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급기야 큰돈을 벌어 볼 요량으로 로또까지 샀다. 허황된 꿈을 꾼 자신의 모습을 보고 씁쓸함을 느꼈다.

각자 생각하는 공동체 '이상'이 다른 것도 걸림돌이었다. 김유승 목사 가정은 생활 공동체가 아닌 공부하는 연구 공동체를 꿈꿨다. 자식을 둔 엄마들은 자녀 먹거리부터 시작해 육아·교육 문제 등에 공동체가 도움이 될 줄 알았다. 갈수록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자, 한동안 단절을 경험했다.

"시대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를 그렸는데, 막상 와서 보니 서로 생각하는 그림이 다 달랐어요. 처음에는 왜 여기 왔을까 싶었어요. 추구하는 신앙과 가치가 조금씩 달라서 많이 외로웠어요." - 임은선 씨

"다른 공동체에 비해 적은 인원이 모였는데도, 관계를 형성하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했어요. 룰도 없고, 이상도 달랐으니까요. 때로는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 안에서도 상처를 입었죠." - 좌성훈 씨

한 가정으로 시작한 공동체는 2년 만에 다섯 가정으로 늘었다. 어린아이는 9명이나 된다. 뉴스앤조이 현선
이상 내려놓으니 사람이 보였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이상이었다. 매일 기도 모임을 하기로 뜻을 모았지만, 생계와 아이들 교육 문제로 모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결국 모임은 일주일 한 번으로 정례화됐다. 마당 텃밭을 함께 일구며 자급자족하는 삶도 시도했다. 하지만 관리가 안 됐다. 오히려 밖에서 사 먹는 게 품도 덜 들고 편리했다. 결국 텃밭은 잠정 휴업에 들어갔다. 몇몇 공동체에서 하는 홈스쿨링, 공동육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마을 바깥에 사는 하현용 목사가 공동체에 직언을 날렸다. "우리 공동체는 길을 잃었다." 흔히 공동체를 연인 관계에 비유하곤 하는데, 떨기나무공동체는 연애 없이 결혼한 상황이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로 공동체를 하다 보니, 갈등과 상처가 크다고 진단했다. 하 목사는 지금이라도 각자가 생각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대와 꿈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자고 권했다.

"이전까지는 누군가에게 결과물을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공동체니까 공동육아부터 사업까지 다양한 걸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현용이 형이 '우리는 재미있고 유쾌한 혁명적 시도를 해 보자. 시도만 하다 끝날 수 있다. 해 보고 잘 안 되면 자양분으로 삼자'고 하더라고요. 형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 좌성훈 씨

이상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옆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주고, 신앙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좌충우돌, 갈팡질팡했던 공동체는 어느 순간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상'만 가지고 출발한 떨기나무공동체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지금은 서로의 생각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사진 제공 좌성훈
어른들이 일군 공동체, 아이들이 누리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12월 23일, 제주 협재리 떨기나무공동체를 찾았다. 공동체 중 세 가정이 거주하는 안동네는 해안가에서 차로 7분 정도 걸렸다. 비좁은 도로를 타고 오르자, 들판에 목재로 된 집들이 나타났다. 좌성훈 씨 부모님 집을 시작으로 좌 씨 가족이 머무는 집, 황정기 씨 집, 차지석 씨 집 순이었다. 경계를 구분하는 담벼락과 울타리는 보이지 않았다.

건축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차지석 씨는 돈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건축업자를 따라다녔다. 다행히 조금씩 돈을 돌려받는 중이다. 황정기 씨와 공동체원의 도움으로 집을 지었다. 차 씨 집을 방문하자, 자녀 셋이 반갑게 맞았다. 곧이어 좌성훈 씨네 가족이 방문했다. 아이 여섯이 모이자 집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아이들은 "삼촌, 이모"를 외치며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김유승 목사가 도착하자 이번에는 어른들이 "누나", "언니"를 부르며 어서오라고 인사했다. 떨기나무공동체에는 직함이 없다. 누나, 형, 언니, 오빠, 삼촌, 이모 등이 전부다.

공동체는 다섯 가정으로 아이·어른 합쳐 20명이 넘는다. 차지석 씨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아이들은 공동체의 수혜자이자 미래"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만든 공동체는 아이들이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항상 같이 놀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까 외롭지 않고요. 평소에도 자주 보면서 일요일을 그렇게 손꼽아 기다려요. 아이들에게 일요일은 예배하는 날이 아닌 모임이 있는 날이에요." - 차지석 씨

떨기나무공동체는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에게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사진 제공 좌성훈

일요일 예배 시간에는 청년들을 포함 30명이 참여한다. 예배 형식은 기성 교회와 조금 다르다. 떼제 찬양과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예배를 시작한다. 사회문제와 공동체를 위한 중보 기도를 올린다. 말씀 나눔(설교)은 목사 혼자 하지 않고, 5명이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한다. 예배는 공동 축도문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함께 식사를 나눈다.

떨기나무공동체 특징 중 하나는 리더의 부재다. 목사가 2명 있지만, 함께 지내는 공동체원일 뿐 대표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한동안 표류한 것도 어쩌면 리더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럼에도 구성원은 지금과 같은 방식을 선호한다. 각자 생각을 공유, 존중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고자 한다.

좌성훈 씨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고 아직 완성된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해결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고. 특히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한데 제주에는 일자리가 변변하지 않다. 좌 씨는 현재 특산품 판매를 하고 있고, 차 씨는 양돈농장에서 돼지 발골 작업을 한다. 하현용 목사는 음식점을 한다.

이상만 가지고 출발한 떨기나무공동체는 처음에는 좌충우돌했다. 갈등을 겪었지만, 단 한 가정도 낙오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유승 누나(목사)의 기도 때문"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갈 데가 없어서 못 떠난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에게 떨기나무공동체는 조언한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신뢰 관계 없이 함부로 시작하지 마세요. 생각이 다른 사람도 포용해 주세요."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