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91년생 모태신앙입니다. '보통의 교회'에서 '보통 청년'으로 있으면서 고민했던 문제를 나누고 싶어 글을 연재하려 합니다. 함께 신앙생활한 분들, '평범한 성도'와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점도 있습니다. 기도 제목 나누기, 간증, 청년의 비전, 선교, 셀 모임, 교회 봉사, 신학의 부재 등이 그 내용입니다. - 필자 주
당신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가면 "기도 제목을 나누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기도 제목은 '기도하는 내용'들입니다. 셀 모임이나 구역 모임 등에서는 이 기도 제목을 중심으로 삶 나눔을 하기도 합니다. 기도 제목을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삶도 함께 얘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된 배경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 보면 고민도 나눠지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 과거 기도 제목이나 다른 사람 기도 제목을 훑어보면 편치 않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복주의와 풍요 신학이 절묘하게 결합이 되어 있는 '한국교회식 기도 문화'가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제게 기도 제목을 물으면 "없다"고 말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좋으니, 기도하는 내용들을 말해 달라"고 교회 리더나 교역자들이 묻고는 합니다. 그래도 특별한 것이 없다면 "고민하는 내용이라도 말해 달라고" 합니다. 마지못해 고민하는 몇 가지 얘기하면, 이것을 놓고서 기도해 보자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교회에서 나누는 기도 제목들은 대부분 자신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기도 제목들이 중심이 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나 걱정할 일?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필요한 것을 다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너희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 이러한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다"(마 6:31-32)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나라 의를 구하면, 너희 필요한 것을 덤으로 주실 것이다"(마 6:33)고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은 한국교회 기도 문화와 비춰 봤을 때,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취업 시즌, 입시철, 신년회 등이 되면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 봤을 때, 정말 이상한 문화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의'를 구하게 되면 우리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덤으로 그것들을 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구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걱정들을 기도 제목이라 치고 일일이 늘어놓고 있습니다. 청년들 기준으로 우리 기도 제목들을 살피면 이렇습니다. "비전을 보여 달라", "내일 시험 잘 보게 해 달라", "원하는 곳에 취업을 시켜 달라" 등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토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제목들은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던 염려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앞선 문제가 가장 잘 나타나는 기도가 입시 관련 기도회(수능 기도회 등)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이고, 제 문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대학 입시철이면 교회가 붐빕니다. 대학 입시는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가정의 문제기 때문입니다. 오랜 신앙생활해 온 분도 자녀들 걱정 앞에서는 이성을 잃습니다. 앞선 얘기를 요약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잡고자 함이 대부분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수능 조금 못 봐서 원하는 대학 못 가서 삶에 지장이 있으리라 하는 생각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나라 '의'를 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마 6:33). 지금 당장 교회에 가서 기도 제목을 말해 달라고 해보십시오. 하나님나라 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도 제목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기도 제목이 매일 같이 무거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과는 다른 기도 제목이 한국교회에 많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No!'도 응답

저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기도 문화 자리 잡게 된 것은 '부정의 길'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국교회는 '긍정의 길'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긍정적인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이를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루어 달라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옥성호 선생이 쓴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부흥과개혁사)에서는 이러한 "긍정에만 익숙한 성공의 법칙들"이 반성경적임을 설명합니다. '긍정'적으로만 보는 생각은 자기 사랑과 성경의 어긋난 이해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기도 응답은 항상 'yes'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항상 이루어지는 기도에만 집중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정의 길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yes'라는 응답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닙니다. 'no'도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no'라 응답하신 기도에 나타난 섭리를 이해하는 이가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에서 고백하는 대로 우리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주인 되신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순종치 않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고자 하는 것입니까.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그러나 시험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사업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루어지는 기도와 그 응답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닙니다.

우리 기도 제목은 부정의 길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현재 부정적일지라도, 가장 나에게 맞는 상황을 허락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부정의 길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너무 두렵고, 무서운 순간이지만, 하나님은 계속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려워 말라

한홍 목사가 쓴 <리더여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두란노)에 따르면,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장 많이 하신 명령은 "두려워 말라"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살아가고자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러워 믿기 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실패하기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는 한국교회 기도 모임에서 꼭 필요한 명령입니다. 미래에 대한 온갖 두려움으로 하는 기도들은 사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같잖은 것일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상황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나의 염려와 두려움으로 기복주의적 기도 제목들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역할, 공동체의 역할은 이 때문에 필요합니다. 너무 두려운 상황 가운데,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곳이 필요합니다. 실질적으로 자신에게 손 내밀며 도와줄 사람들 역시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런 공간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염려와 걱정을 기도 제목으로 늘어놓도록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방인 같은 성도를 키우는 기도회, 기도 제목을 지양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이런 시스템을 만드신 분들 반성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을 기도하게 하는 동력을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염려와 걱정, 더 나아가서는 기복주의로 만들어 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우리 기도 제목들이 성경에 부합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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