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고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루터 연재 2: 빼빼로데이의 진실 - 루터 출생과 이름의 비밀

11월 11일은 '빼빼로데이'로 통한다. 젊은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빼빼로를 주고받는 날이다. 상술과 결합한 특이한 날이다. 그런데 루터에게도 이날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1483년 11월 10일에 태어나, 그 다음 날인 '빼빼로데이'에 세례받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네 이름은 성이 앞에 있고 이름이 뒤에 따라온다. 서양은 반대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의 이름을 구분하자면, 이름은 Martin이고 성은 Luther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태어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곧바로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있던 St.Petri-Pauli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날이 "St.Martin의 축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름은 '마르틴'이 되었다.

루터 부모가 교인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분에 넘치고 열정적인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던 광산업자였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자마자 세례를 주기 위해 추운 겨울 난방시설도 없는 교회로 나왔다는 것은 당시 종교적 상황을 방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요즘 같으면 이런 유아세례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루터가 세례받고 멀쩡한 게 이상할 정도다. 아기가 태어난 다음날, 한 겨울 찬물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푹 담근다는 의미가 세례이기 때문이다. 우리 같으면 "그 겨울에 제정신이냐?"며 "애 낳고 백 일은 지나야 교회 갈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텐데, 당시로선 태어나는 즉시 최대한 빨리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중세 시대 유아 사망률이 현저히 높았던 것은 이 같은 유아세례 풍조와 관련이 깊었다는 연구 보고서도 있다. 굳이 연구 보고서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애 엄마라면 그 추운 날 밖에 나가 얼음장 같이 찬물에 애를 담그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엔 종교적 관례가 그러했으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괜스레 했다가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 이단으로 치부될 수도 있고, 마녀재판에 던져질 수도 있었다.

재미난 것은 종교개혁 시기에 개신교 지역에선 유아세례의 시기가 좀 더 자유로워져서 뒤로 늦춰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유아 생존율도 당연히 가톨릭 지역보다 높아졌고, 이것은 개신교인들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루터는 그렇게 빼빼로데이에 세례받았고, 그날이 교회 축일 St.Martin의 날이기에 자연스레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이다. 우리가 맨날 강아지 이름 부르듯 하는 '루터'는 성이다. 아들은 어버지의 성을 따라간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을 보자. Hans Luder다. 아버지의 이름은 '한스', 성은 '루더'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버지의 성이 'Luder'면 아들의 성도 당연히 Luder여야 할 텐데 우리가 알고 있는 개혁자의 이름은 Luder가 아니라 Luther다.

성이 바뀌었다. 무슨 일일까?

우선 뜻부터 풀이해 보자. 루터나 루더가 비스무리하게 들리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Luder는 '사냥꾼'(Jäger)의 뜻을 가진 고대 독일어다. 후에 루터는 자신의 성을 Luther로 바꾼다. '자유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ελευτεροs에서 앞뒤 철자를 빼고 가운데 것만 취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512년설과 1517년설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 1512년 변경설이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Bernd Moeller, K. Stackmann, "Luder – Luther – Eleutherius. Erwägungen zu Luthers Namen", in: Nachrichten der Akademie der Wissenschaften in Göttingen. Phil.-Hist. Klasse 1981, Nr. 7.)

후자부터 설명하면, 1517년은 보통 종교개혁 원년으로 삼는 시기이다. 면죄부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 게시로 유명한 해다. 그러다 보니 종교개혁의 극적 연출을 위해 루터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기념'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실제 역사와는 별로 상관없는 드라마틱한 효과로만 보인다.

루터의 원래 성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사냥꾼'의 뜻을 가진 Luder다. 루터 당시만 해도 아직 독일어 철자법이 자리 잡힌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발음과 필기는 여러 용법이 가능했다. Lüder, Luder, Loder, Ludher, Lotter, Lutter, Lauther로도 통용되었다. (이 이름은 1302년 Möhra지역에서 기사 작위를 가지고 살던 Wigand von Lüder에까지 소급된다.)

루터 역시 여러 종류의 철자법을 사용했는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 이후로 'Luther'라는 고정된 형태의 철자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루터는 평생 자기가 신학 박사가 된 것을 자랑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이유는 학위받은 것을 뽐내려는 게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해 '복음의 자유'를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사냥꾼'의 인생에서 '자유자'로 거듭나게 한 성서의 복음. 이것이 루터의 이름을 바꾸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름이란, 부르고 불려지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며 공고히 만들어 간다. 그것이 이름이다. 요즘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법원에 점점 늘어 간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을 희구하며 이름을 바꾼다. 지난 세월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 이름을 바꾸는 일이다. 루터 역시 이름을 바꾸기까지 자기 인생을 깊이 고민했던 사람이다. 루더(Luder)에서 루터(Luther)로? 입에 풀칠할 것을 쫓아 사는 피곤한 사냥꾼의 삶(Luder)을 거부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Luther)로 살길 희망했던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다 한 가지 떠오른 것은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노예', 에픽테토스가 갑작스레 떠오른다. 서기 50~60년경 히에라폴리스에서 태어나 130년경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은 신약성경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에서 초대 교인들이 늘 손에 지니고 다니며 애독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히 중세 때는 수도원에서 이 책을 애독했다고 알려진 만큼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은 책이다.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수식하는 용어가 '자유자'(ελευτεροs)이다. 그렇다면 내 추측이지만, 혹시 수도사 생활을 했던 루터가 에픽테토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결정적인 시기가 도달했을 때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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