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동안 과천에서 나고 자란 이한진 씨. 곧 철거되어 없어질 과천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2014년 5월 결혼을 앞둔 이한진 씨(33)가 신혼집을 구할 때다. 시세보다 싸게 나온 한 아파트 단지를 알게 됐다. 과천주공아파트 1단지. 1984년 한진 씨가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자란 곳이다. 재건축 소문이 퍼져 임대료가 다른 곳보다 저렴했다. 한진 씨는 105동 206호에 신혼집을 차렸다.

과천 재건축은 2007년 한진 씨가 입대할 때부터 주민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했다. "어느 단지가 재건축하기로 확정됐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이 빠르게 확산된 것과 달리 공사는 차일피일 연기됐다. 그러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새 과천시장이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현재 4개 단지에서 재건축, 이주, 철거를 진행하고 있다.

한진 씨는 곧 철거될 주공아파트 1단지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를 모아 책으로 냈다. 12월 12일 출간한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다. 12월 19일, 한진 씨를 만나 과천주공아파트 1단지와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살던 고향, 과천주공아파트

"다시는 못 볼 제 고향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과천은 제 고향이니까요. 33년 동안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저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1단지 101동 102호에서 살았어요. 이후 강화로 이사 갔다가 3년 후 돌아왔어요. 지금까지 (1단지가 있는) 중앙동 인근을 벗어나지 않았죠. 시내로 가려면 늘 이곳을 봤고 거쳐야 했으니까요. 과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제 또래 친구들 모두 과천을 고향이라 여길 거예요."

처음에는 사진만 찍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우연히 읽었다. 이 책은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의 원조격이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가 재건축을 앞두고, 이인규 씨가 아파트 모습을 책으로 담아냈다. 현재 이인규 씨는 '마을에숨어' 출판사를 운영 중이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네 번째 책까지 출간했다. "그래, 이거다." 이 책을 보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고 한진 씨가 말했다.

"2014년 4월이었어요. 사무실에서 우연히 이 책을 봤을 때, 이거다 싶었어요. 저도 우리 아파트 모습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친구들과 뛰놀던 놀이터, 단골 분식집과 이발소가 있는 1단지 종합 상가. 한진 씨가 마주쳤던 모든 공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매년 봄이 되면 볼 수 있는 벚꽃도, 혹시 올해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셔터를 눌렀다.

과천주공아파트 1단지 모습. 사진 제공 이한진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는 단지 조성부터 철거까지 1단지 전 생애를 다룬다. 전반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때 시행된 과천 신도시 사업과 101동 102호에서 나고 자란 한진 씨의 어린 시절을 소개한다. 이를 위해 관리 사무소 구석에서 먼지 쌓인 사업 계획서를 뒤졌다. 과천문화원에 옛 사진 자료를 요청하기도 했다. 

중반부에서는 1단지 사람들을, 후반부에서는 1,062가구가 이주하고 빈집이 된 1단지 모습이 나온다. 수십 년간 아파트를 지킨 미용실 사장(17년 운영), 분식집 사장(23년 운영), 수선집 사장(35년 운영) 등이 등장인물이다. 한진 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1단지 관리소 과장이라 답한다.

관리소 과장은 30년 넘게 1단지를 지켰다. 1981년 11월, 준공이 완료되고 입주가 시작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관리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30세 청년이었던 그는 올해 65세로 은퇴할 나이가 되었다. 7월 29일, 마지막으로 아파트 현관 전등을 소등했다.

"정말 큰 사고 한 번 없이 참 좋은 곳이었어. 주변에선 너 아직도 거기 있냐 그러는 사람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렇게 좋았기 때문에 어디 안 가고 지금까지 있을 수 있던 거였겠지…." (1단지 관리소 과장, 279쪽)

책 제작에는 한진 씨 외에 여러 사람이 참여했다. 1단지에 거주했거나 과천을 좋아하는 청년 9명이 자신들 이야기를 글·사진으로 실었다. 한진 씨가 출석하는 과천교회 친구들과 인터넷에서 알게 된 지인이다. 과천에서 중학교을 나온 김 아무개 씨는 캐나다 대학에서 사진 강사로 일하고 있다. 올해 여름 방학 때 재건축 소식을 듣고 과천을 찾았다. 한국에 왔을 때 틈틈이 찍어 둔 사진을 책에 쓰라고 줬다.

제작비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했다. 11월 14일 한진 씨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 '나의 살던 고향은, 주공아파트' 이름으로 펀딩을 진행했다. 129명이 431만 4,000원을 후원했다.

한진 씨는 펀딩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엽서와 책을 보냈다. 사진 제공 이한진
재건축에 교회는?

아파트 재건축은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다. 한진 씨 같은 일반 세입자들에게는 오래 머물던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일이고, 집주인에게는 재산을 더 늘릴 수 있는 기회다. 공직자에게는 주민 지지도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이다. 재건축 논의를 시작할 당시 주민들 반응이 어땠는지 물었다.

"집주인들은 재건축을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그분들에게는 좋은 소식이겠죠. 하지만 재건축 때문에 이곳을 떠나야 하니, 아쉬워하는 주민들도 적지는 않았어요."

한진 씨가 다니는 과천교회는 교인 5,000여 명이 출석하는 대형 교회다. 교인들은 재건축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물었다.

"교회 안에서는 이런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눌 만한 공론의 장이 없어요. 저마다 뒤에서는 재건축이 어떻다고 얘기는 해요. 그렇지만 교회에서 교인들이 모여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아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려워요.

그러고 보면 이런 부분이 아쉬운 것 같아요. 우리 동네, 지역 문제와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교회는 신앙 공동체잖아요. 그 말은 하나님 뜻대로 함께 살려고 하는 공동체를 함의하잖아요. 근데 우리 삶과 밀접한 문제, 현안에 대해 왜 교회는 침묵하고 거리를 두는지 모르겠어요."

한진 씨가 지난여름 문원동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1980년대 초 과천 신도시 계획 때 살던 이들이 밀려나면서 형성된 지역이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지난여름 한진 씨는 과천 외곽에 있는 문원동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문원 이주 단지'라고 불린다. 1979년 당시 시골 마을이었던 과천 일대를 정부가 불도저로 모두 밀었을 때, 농촌 사람들이 문원동으로 이주해 마을을 만들었다. 

"과천은 이제 제가 알던 과천이 아니에요. 저를 포함해 제가 알던 이들은 모두 1단지를 떠났어요. 5층짜리 단층 아파트 자리에는 이제 대형 건설사의 고급 브랜드로 치장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겠죠. 이름은 계속 과천으로 남겠지만 이제 과천은 옛날의 과천이 아니에요.

그러고 보면 도시가 갖는 의미는 그 이름이나 건물이 주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사람 간의 유대와 기억이에요. 이 책을 만들 때도 그런 보이지 않는 끈들, 제가 경험했던 '과천다움'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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