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사람에 등급을 매겨 취급하는 회사가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는 같은 일을 했다. 똑같은 광산에서 석회석을 채굴하고 운반했다. 같은 레미콘 차를 몰고, 식사도 회사 구내 식당에서 같이 했다. 똑같이 힘들고 위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임금은 천지 차이였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동양시멘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으며 일했다.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 임금 절반도 못 받았던 건 '위장 도급'이었기 때문이다. 위장 도급이란 회사가 노동자를 고용할 때 직접 고용하지 않고 유령 회사를 세워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고용하는 것을 말한다. 정규직과 똑같이 동양시멘트를 위해 일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9개 하청 회사로 흩어져 저임금 노동을 이어 왔다.

직접 고용 판결 대가는 계약 해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청 업체 소속이었지만 동양시멘트에서 일했다. 하청 업체 9개 중 동일·두성 두 개 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중부지방고용노동청 태백지청에 동양시멘트가 하청 업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회사는 다르지만 쓰는 기계, 입는 옷, 임금체계, 상여금 등 하청 업체 노동자의 제반 사항을 결정하는 것은 동양시멘트였기 때문이다.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광화문 리마빌딩 앞에서 작은 기도회가 열린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2015년 설 연휴 하루 전인 2월 15일. 태백지청은 노동자들 쪽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들 주장대로 동양시멘트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근로 환경, 조건 등 모든 것을 결정하고 노동력을 제공받았기 때문에 이들과 직접 계약을 체결하라고 결정했다. 정부가 원청과 사내 하청 노동자의 암묵적인 근로계약 관계를 인정한 첫 사례였다.

기쁨도 잠시, 태백지청이 결정을 발표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동양시멘트는 두 회사와 계약을 해지했다. 정규직이었다면 '해고'라는 표현이 맞겠지만, 동양시멘트와 직접 고용 관계가 아닌 두 회사와는 계약을 해지하면 그만이었다. 고용노동부는 정규직 전환 및 직접 고용을 하라고 했지만 동양시멘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태백지청에 이어 중앙노동위원회도 똑같은 결과를 내놨다. 동양시멘트가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판결에 강제성은 없었다. 정부가 업체의 불법행위에 대해 과태료를 징수하겠다거나 확실한 불이익을 경고하지 않는 한, 회사는 움직이지 않는다. 현재 노동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걸고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직접 고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낸 비정규직 노동자 101명은 직접 고용은커녕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노동조합 활동에 열심이던 80여 명이 복직 투쟁에 앞장섰다.

투쟁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달갑지 않은 소식은 또 있었다. 동양시멘트는 삼표그룹에 경영권을 넘겼다. 삼표는 레미콘 회사로 종로구 수송동에 본사를 두고 있다. 노동자들은 삼표그룹에 직접 고용을 요청했지만 삼표는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삼척에서 상경해 삼표그룹 본사 앞에 텐트를 쳤다. 직접 고용을 명한 노동부의 판결을 받아들이라 요구했지만 경영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삼표는 오히려 각종 소송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본사 앞에서 천막 농성을 못 하게 가처분을 신청하고, 노조에 가담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손배 가압류 소송을 걸었다. 노조에서 탈퇴한 사람은 이름을 빼 줬다. 소송과 배상금, 거기에 생활고라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하나둘 싸움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서울 한복판 자리 잡은 지 380일

84명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23명만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생계 활동을 이어 가는 6명, 아픈 사람을 빼고 나머지 노동자들이 조를 짜서 매주 교대로 서울에 올라온다. 이들이 텐트를 친 곳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 뒷골목이다. 출동 대기 중인 경찰 버스가 공회전하는 곳. 매캐한 매연을 맡으면서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은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함이다.

김경래 씨(오른쪽)와 동료들은 '바위에 계란 치기' 같은 싸움을 900여 일 동안 이어 왔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삼표의 입장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노동자들의 요구(직접 고용)는 들어줄 수 없고 비정규직 노동자로 복직은 허락해 주겠다는 것. 정부는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 판결을 내렸지만, 업체는 여기에 응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삼표는 그 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노동자 편에 서지 않는다.

김경래 씨(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동양시멘트지부 수석부지부장)는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만 해도 딱히 노동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삼척에서 나고 자란 그 또한 '회사가 먼저지 노동자가 먼저인가', '국가가 먼저지 국민이 먼저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노동자와 회사의 싸움을 보면 '바위에 계란 치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권 바뀌어 봐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달고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삼척이라는 오지에서 박정희 정권에서 반공 교육받고 자랐어요. 그때는 학교에서 하는 말이 다 맞는 줄 알았죠. 학교에 걸린 반공 포스터에 보면 중국·러시아 사람들을 이상하게 그렸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면 아닌 거 다 알잖아요. 지금은 생각하죠. 잘못된 교육이 나를 바보로 만들었구나. 앞으로는 그렇게 안 살고 싶어요."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결과는 12월 20일 나올 예정이다. 벌써 수차례 연기된 재판이다. 노동자들은 여기에 조그만 희망을 걸고 있다. 비록 1심이긴 하지만 이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향후 투쟁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골리앗 같은 기업과 끝이 없어 보이는 싸움. 그럼에도 김경래 씨는 복직이 이뤄질 때까지 싸움을 이어 가겠다고 했다. 그에게 투쟁은 단순히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문제가 아니다. 김 씨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 차별이 여전한 상황이다. 우리의 싸움은 복직을 위한 싸움이 아닌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싸움에 함께하는 기독인들

동양시멘트 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혼자 싸우지 않는다. 매주 금요일이면 이들을 기억하고 모이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동양시멘트투쟁승리를위한기독교대책위원회'에는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사회문화선교위원회, 고난함께, 도시빈민선교회, 불한당, 영등포산업선교회, 평화누리,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등 여러 단체가 함께하고 있다.

기도회는 32차를 맞았다. 특별한 활동이 없으면 매주 금요일 리마빌딩 앞에서 7시에 시작한다. 동양시멘트 해고 노동자들을 잊지 않은 기독인이 모여 예배하고 노동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다. 기도회에 참석하는 이는 20여 명. 영하 9도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12월 17일에도 이들은 노동자들이 쳐 놓은 텐트 곁을 지켰다.

김경래 씨는 함께 싸우는 이들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본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그리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는 요즘이지만 "아무 이익 관계도 아닌 자신들을 잊지 않고 찾는 이 사람들에게서 낮은 자리에 임하신다는 예수님을 본다"고 말했다.

싸움에 함께 하는 기독인이나 싸우는 동양시멘트 해고 노동자는 지금처럼 손을 맞잡고 끝까지 싸울 생각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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