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헌신했던 한 교수가 역사 국정교과서 저자로 알려지자마자, SNS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무용성에 대한 말이 무성하다. 왜 한국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실패했는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시작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화란의 개혁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였다.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세계관이라는 단어에 기독교적 세례를 주면서 발생한 용어이다. 카이퍼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주된 계기는 이렇다.

카이퍼는 당시 교육정책(가치중립을 근거로 공립 교육에만 국가 재정을 지원하는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학부모는 각자의 세계관(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든, 로마가톨릭 세계관이든 무엇이든지)에 걸맞은 자녀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카이퍼에 따르면, 공립 교육과 달리 사립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부모가 모든 교육 비용을 대는 것은 납세자 입장에서 불공정한 처사다. 모든 시민은 각자 세계관에 따라 교육을 선택하고, 그것이 공립 교육이든 사립 교육이든 기독교 교육이든 무엇이든지 공통되게 국가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카이퍼의 주장이었다.

카이퍼는 자신의 교육정책에 걸맞은 입법 활동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이 상상도 못할 로마가톨릭과의 정치적 연합을 통해 수상이 된 후, 로마가톨릭 세력과 더불어 자신의 교육정책을 입법하는 데 성공한다.

뼈대만 전수된 기독교 세계관 운동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소위 창조-타락 구속으로 패턴화되어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이 운동의 뼈대만 다루고 있어서, 이 운동의 부요하고 다양한 살점을 다 발라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영어 교육으로 비유해 설명하면,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영문법만 가르쳤지,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풍성한 언어교육(카이퍼의 세계관 운동)이 전수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적어도 카이퍼가 생각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 세계를 회복한다(grace does not abolish nature, but restore it)는 기본 신념 아래,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강조한다. 창조 세계가 원래 선하며, 죄에 의한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회복되는 것(소위 창조-타락-구속)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잘 요약한 것이라면, 그 운동성은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나게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 은혜로 정치, 학문, 예술, 종교 등을 회복하려 적극적으로 각각의 영역에 참여하게 된다.

카이퍼나 바빙크는 상원 활동을 하면서 반혁명당에서 당수로 활동하였다. 카이퍼는 화란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를 세웠다. 네덜란드의 수많은 초·중등 기독교 학교 이름이 헤르만 바빙크 이름을 딴다. 신학자로서 카이퍼와 바빙크는 당시 3대 칼빈주의자로 알려졌다. 카이퍼는 일간신문과 주간신문을 창립하고 편집자로서 자신의 직업군 중에서 제일 오래 일했다. 바빙크는 네덜란드 왕립 학술위원으로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 즉 심리학이나 교육학 등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 창립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려 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이 운동이 마치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는 지성의 활용만 강조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실패한 이유

사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실패했다고 본다. 미국을 보면, 카이퍼가 직접 기독교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프린스턴신학교 스톤 강좌에서 소개했다. 교리 체계로서 칼빈주의가 아닌,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카이퍼의 주장이 잘 먹히지 않았다.

당시 미국 칼빈주의자들, 더 정확히 말해 장로교도들은 자유주의의 대항마로서 전투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창조 세계의 영역들, 예를 들어 학문이나 예술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대안 체계를 제공하기보다는 근본주의적 자세를 취하면서 몇몇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보호하는 데만 급급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대표 신학자 그레셤 메이첸(J. Gresham Machen)의 당시 별명은 '미국의 카이퍼(American Kuyper)'였다. 정치, 교육, 학문, 언론 등 거의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카이퍼와, 프린스턴의 좌경화에 대항해 기독교 근본 교리를 사수하고자 필라델피아 웨스터민스터신학교를 세운 메이첸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라.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화란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를 졸업한 손봉호 교수를 통해 소개되었다. 손봉호 교수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소개된 1980년대.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사회에 이미 참여하는 그룹(한신대학교나 감신대학교 등)과 마땅히 사회에 참여하고 싶으나 어떤 신학적 토대를 발견하지 못한 보수주의 그룹(총신대학교, 고신대학교나 복음주의 학생 단체 계열 등)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곳은 당연히 보수주의 그룹이었다. 보수적 그룹들의 성향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 창시자인 화란 카이퍼보다 미국의 카이퍼에 가까웠다. 아니 메이첸보다도 신학적으로는 더 보수적(메이첸은 바르트에 대해 우호적임)이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더 이원론적이었다.

헤르만 바빙크는 신학적 방법론에서 이성이나 감정 그리고 의지 모두를 포괄하는 인격성(personality)을 강조한다.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보다 더 이원론적이며 보수적인 한국 신학계나 교회 문화를 통해 유추해 볼 때,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려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뼈대만이 흡수되면서 부요한 살점들이 다 뜯겨진 채 한국에 소개된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기여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실패했다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대학생 시절 내 세계관의 뼈대를 잡아 주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본다. 주님 말씀하신다면, "마른 뼈도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은득 / CRC 소속 칼빈신학교 박사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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