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장'이 발목을 잡는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꽤 오래전 관련 내용으로 써 놓은 글이 있었다. 내가 성서학자는 아니지만, 작금의 우리 상황을 생각해 보면서 교회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대는 이 명제에 대해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서 13:1-7의 서두에 나오는 이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는 세 개의 패턴이 있다.

첫째, 케제만(E. Käsemann)은 로마서 12장을 열광주의에 대한 바울의 반대 입장 표명으로 본다. 케제만은 바울이 13장에서 하늘의 시민권자가 세속의 권위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는데, 본문 자체에 열광주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케제만은 고린도 공동체와 로마 공동체 상황 사이에 명확한 연결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가능성 혹은 경향을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맥도날드(J. I. H. McDonald)의 경우다. 이 본문이 네로의 통치 초기(A.D. 56-58)에 있었던 과세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는 이 시기에 로마의 과세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셋째, 마커스 보그(M. Borg)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다. 로마에 있는 교회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동족들과의 연관을 부인할 수 없는 유대(Jewish)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로만-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시(市)에서 황실의 반유대 정책으로 자주 고통받았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선민인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그들의 형제자매들이 로마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처한 고통스런 상황을 근심하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보그는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혈연 혹은 상업적 관계로 팔레스타인과 연관되어 있었고, 그들은 56년경 민족주의와 반로마 감정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보면서, 바울 사도가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로마서에 반영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로마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공동체 일부가 이러한 민족 정서를 전혀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고려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관점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두말할 것 없이, 롬 13:1 이하 본문은 로마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처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고 봐야 한다. 이 본문을, 사도바울이 국가 혹은 교회-국가 관계에 대해 특정하여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교회와 국가에 대한 신자의 정치적 태도에 대해 한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본문은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는 특정 믿음 공동체에 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목회적 측면이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러했을까?

그는 팔레스타인 유대 민족주의에 의해 수행된 중과세에 대한 반로마 저항운동을 염두에 두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해야 할 목회적 필요에 의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즉, 이 본문은 바울 시대 이후 이어진, 그리고 광역화한 기독교 사회들 속의 2000년 역사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내용이 아니다. 당시 특별한 상황을 전제로, 그의 목회적 관심과 지역 교회 상황을 전제하고 쓴 내용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바울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점이다.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바울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일부 유대 동족들보다 로마 통치권자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바울이 여행자로서의 안전을 고려하여 현행 질서인 로마의 권위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가 로마서를 써서 보낸 것은 60년대 로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의 박해 시기이다. 바울의 이 본문은 로마에 사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보전과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한 지침이고, 기독교 태생 초기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성도 상호 간의 사랑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고, 전도 여행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전제이며, 유대 지역을 향한 사랑의 발로에서 기술된 것이다. 하나님이 제정한 것으로서의 현행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청하는 일종의 안전 지침이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에게는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복종이 앞서는 것이었고, 당대 상황에 대한 그의 인식이 이 본문 기저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 그럼 이 혼란스런 명제의 진의에 접근하기 위해 본문을 좀 살펴보자.

로마서 13:1-7의 핵심 포인트는 이 명제가 포함된 1절(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에 있지 않고, 3절에 있다. 그럼에도 이 부분, 1절을 우선 보자.

개역개정판은 롬 13:1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이 교회가 교인을 권세 아래의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헬라어 본문에서 '위에 있는'으로 번역된 단어는 '휘페레쿠사이스'이다. 이 단어는 beING-superior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본문의 '위에 있는 권세'(exousiais hyperechousais)는 지상의 통치자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최고의 통치자, 하나님을 전제한다.

어쨌든 이 본문의 핵심 구절인 3절을 보자.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이 본문을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 현대 영어 성경)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Rulers are a threat to evil people, not to good people.

There is no need to be afraid of the authorities.

Just do right, and they will praise you for it.

통치자들은 선한 백성에게가 아니라 악한 백성에게 위협이다. 권력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의를 행하라 그러면 그들이 그것으로 인해 너를 칭송할 것이다."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나 통치자들이 위협이 되지 선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선한 정부는 선한 일을 하는 데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정부가 폭정과 불의를 행한다면, 더 이상 거기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정신이다.

사람이나 사람이 정한 제도같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법을 거슬러 저항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모든 권위를 낸 최고의 권위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동상에 절을 하라는 법, 즉 현실 정부가 제정한 법을 지키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부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발견하면 돌아와 보고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악한 자에 의해 제정된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로마 정부가 정한 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따랐다. 그들에게는 황제(태양신의 아들)나 미트라교의 신들이 최고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왕 중의 왕으로서 모든 세속 권위가 무릎을 꿇어야 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권위였다.

이것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였다. 즉 당대 로마에서 신들에게 제사하는 행위는 황제와 국가 안녕을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들에게 제사하고 신탁에 복종하라는 정치 행위로서의 로마 실정법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표면상으로는 종교적 이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로마서 13장 1-3절은 통치자가 악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 두려운 권위지만 선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두려운 권위가 아니라고 말하듯이, '더 높은 권세' 즉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라고 신자에게 명령한다. 세상의 권위가 악한 일을 행한다면 신자는 세상의 권위에 대해 '아니오'를 선언하고, 선한 일을 도모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5:29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박찬희 / 서울신학대학교 겸임교수, 기둥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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