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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파시즘, 그리고 교회

불확실성이 낳은 마초 전성시대…교회, 저항과 탈주의 장소 되어야

주원규   기사승인 2016.11.26  11: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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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벨트의 무간지옥

바야흐로 마초의 세상이 찾아왔다. 일찌감치 강추위란 기후적 조건을 무력의 정서로 연결시킨 러시아는 푸틴이란 21세기 걸출한 마초를 낳아 버렸다. 푸틴을 시작으로 이른바 신보수주의 물결과 함께 넘실대기 시작한 마초 전성시대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한 남성, 강한 통치력의 발현을 강력한 무기로 삼고 이른바 마초 벨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초 벨트의 연속성은 최근 각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선출되는 양상만 봐도 충분한 예상이 가능하다. 이미 일본은 오래전부터 자민련 체제를 강고히 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항구적 여당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선두에 선 아베 정권의 독단과 자위대 창설, 평화 헌법 개정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파고는 예사로운 흐름이 아니어서 필리핀의 인권 파괴자란 오명을 오물처럼 뒤집어쓴 두테르테란 인물을 비롯해, 급기야 아예 노골적인 마초임을 선포하고 성공 이데올로기의 샴페인으로 도색한 트럼프란 일그러진 영웅의 미국 접수는 그야말로 세계의 지도자적 풍모를 마초의 시대로 명명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마초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필자는 이러한 마초의 흐름이 갑자기 휘몰아친 유행과 같은 일시적 현상으로 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은 문명의 급작스런 변이와 그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한 주기, 예를 들어 10년의 시차를 두고 그 누적된 현상의 가시적 분출로 평가하는 게 적합하다. 다시 말해 마초 전성시대 입성 배경에는 10년, 그보다 더 보수적으로 잡으면 20년 전부터 누적된 세계화, 민주화, 그리고 인간 존엄에 대한 이념 뒤편서부터 쌓이기 시작한 개혁 피로증이 파열된 결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분명 억울할 수 있는 분석 지점이 존재한다. 틀림없이 자본을 위세로 내세우면서 세계를 자본주의적 단일 체계로 만들어 버린 글로벌리즘(globalism)과 인종, 차별, 위계의 폐쇄를 앞세우는 민주화의 대오는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오히려 둘은 상극의 대립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두 물결은 안타깝게도 20년 전부터 동질의 대오로 인식되면서 뒤섞여 버렸고, 그렇게 뒤섞여 버린 지류는 재앙적인 직하 현상처럼 주류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민중에게 개혁 피로증으로 인지되고 말았다.

이 경우 인류는 존엄보다는 각 개인의 안정과 불안, 불확실성, 눈앞의 자신에게 닥쳐든 난처함, 삶의 어려움들에 대한 즉발적 상쇄를 갈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갈구를 향한 즉발적 상쇄 매체로서는 인류의 비극적 역사가 늘 그래 왔듯 강한 남자, 강한 영웅, 강한 체계, 그로 인한 불확실성의 완벽한 틀어막음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렇듯 마초 전성시대 배경의 배후에는 세계화와 민주화의 파도 속에서 불확실성에 발버둥 치는 다수 민중의 본능적 갈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억울해할 수 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본질 지류의 한 뿌리가 발견된다. 바로 다수의 민중이 선택하는 마초의 뒤편에는 비록 세계화의 광풍에 휩쓸려 버렸지만 여전히 민중의 삶 저변에 단단히 뿌리내린 민주화의 열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 다수의 민중은 마초를 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다수성과 익명성으로 가득한 민중을 선동에 휩쓸리는 우매한 무력 인자로 치부할 수 없는 결정적 신비다. 비록 민중의 갈구 형태가 마초, 신보수주의로 대표되는 보호주의, 협소적 의미에서의 자국 우선주의 외피로 나타난다 해도 민중의 근원에는 불확실성의 망령을 거둬 내기 위한 본능적 연대 움직임이 숨 쉬고 있다. 이렇게 숨 쉬고 있는 지류의 바탕이 바로 20년 전, 아니, 그보다 더 훨씬 이전부터 인류 역사의 한 뿌리를 넉넉히 지지하는 존엄과 관련된 민주화의 열망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민주화의 열망 지류가 대의라는 명분 아래 자행되는 권력 이양 이후, 극소수 권력자들에게 집중되는 이른바 대의적 시메트리(symmetry) 안으로 귀속되면서부터 기형적 권력 집중화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권력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되돌리는 공동화현상에 기꺼이 헌신된다. 역사는 권력 공동화현상을 파시즘으로 명명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권력, 그 확실한 무덤

파시즘의 야만은 그것이 어떤 원인 작용에 의한 것이든 독재의 일사불란함을 결정적 무기로 과시하고 행동한다는 특질을 갖는다. 독재는 질서의 강요를 명분으로 가져오고 그 명분의 실제적 수단으로 직간접적 통제를 본격화한다. 동시에 파시즘은 인간의 주체적 판단 능력을 거세하고 존재의 파편화를 본격적으로 작업하면서 부품으로서의 인간, 전체의 일부로서의 인간화를 자명한 것으로 합리화한다.

그렇게 주체성이 결여된 민중의 자리를 일그러진 영웅, 더 강한 남성성의 마초이즘으로 대치하면서 존재들을 거의 정신착란의 자리로 끌어내린다. 인류는 이미 20세기 초반 스탈린주의와 히틀러의 전체주의 망령을 역사의 분명한 한 축으로 체득해 오면서 파시즘의 야만에 지금도 치를 떨고 있다. 그럼에도 파시즘의 망령은 집요한 진화를 거듭하여 21세기, 현 상황에서도 대의로 위탁받은 권력을 일종의 망령의 이면에서 사유화하는 이른바 권력 세탁 작업을 거쳐 한층 견고한 민중의 우민화를 유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똑똑히 목도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숨어 있는 지류, 그 실체를 발견하는 우리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권력가들과 그들이 벌이는 권력 행위의 온갖 초법적 무례가 실상 어떤 연대적 근거도 없는 사문화되어 버린 죽은 조문이란 사실의 발견이다. 이것은 일종의 일그러진 영웅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납득하기 어려운 오만한 패착이다. 마초로 옹립받은 영웅은 스스로 가장 성실한 파시스트가 되어 대의로 위임받은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민중을 혐오의 특질로 분한 개, 돼지의 상징으로 치환시키려 한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중은 오염될 수 없는 뿌리 지류로서의 민주화적 정서에 눈을 뜨고 분명히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화와 민주화, 두 지류의 엉킨 실타래를 끊어 내는 도상 위에 불확실성과 대의, 그리고 파시즘의 위계 막장에 자리 잡은 일그러진 우상에 대한 향수를 반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반성의 항수 일반에 예수, 십자가, 그리고 교회가 있다.

예수, 십자가, 그리고 교회

이걸 뭐라고 봐야 할까. 2,000년 전의 예수 시대와 21세기를 맞이한 작금의 현실에서 세계화의 흐름은 거의 여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헬레니즘 문화의 융성 시대에서 A.D. 1세기를 장악한 주체는 로마제국이었다. 팍스로마나로 대표되는 로마의 힘은 강력한 군주와 신권을 앞세운 독재 체제가 우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 기준을 마련하는 세계화가 우선이었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보편 기준의 선봉에 서는 것은 단연 돈, 맘몬이다.

일찍이 성서에서도 예수가 돈에 대한 해악의 뿌리를 강하게 밝혔듯 돈의 세계화로 인한 인간 황폐는 민주적 자아로서의 주체의식을 지속적으로 망실케 하는 망각 인자로 작동해 왔다. 이 경우 십자가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세계화 속에 스며든 민주화의 도도한 영적 물길을 외면한 채 세계화의 표층적 뒤엉킴 속에서 피식민지인의 설움을 벗고 새로운 지상 왕국을 염원하는 비틀린 유대 메시아니즘의 좌절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가 고통의 결박을 단숨에 끊어 내고 자신들의 메시아니즘을 실현시켜 줄 영웅적 마초로 신앙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알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이 갖고 있는 메시지는 그 메시지 자체가 각자의 마음속에서 현현하여 영적 빛으로 투사된다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화다.

이 대목에서 언급된 민주화는 세상과 하나님나라, 두 접점을 효과적으로 공유한다. 종교 없는 세상이 없으며, 세상 없는 종교가 없다. 또한 세상과 종교는 부정적 경향과 긍정적 함의 사이에서 수시로 교감하며 자체적 진화를 거듭해 왔다. 민주화라는 뿌리엔 인간 존엄에 대한 무수한 편린이 숨어 있다. 그 편린이 찬란한 섬광이 되어 터져 오를 때, 인간은 자신을 존엄케 한 조물주의 신비 앞에 근본적 예배자로 바로 서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현실의 눈으로 보면 지독히도 비효율적이고 지난한 작업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허위적 결계를 폭로, 분석하고, 더 나아가 해체하는 작업, 그 과정을 감내할 수 있는 기관, 단체는 과연 어디여야 할까. 우리는 교회에서 그 희망을 찾는다. 아니, 찾아야 한다.

교회, 마초와 파시즘으로부터 탈주하는 곳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희망의 진보보다는 절망의 안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전히 오늘의 교회는 마초와 같은 일그러진 남성 영웅, 힘세고 거칠며 무례하지만 적어도 불확실성은 제거해 줄 거란 환상을 추앙한다. 왜곡된 메시아니즘을 마초에게 한 방울도 남김없이 수혈한 뒤, 그렇게 위임된 권력자와 권력의 장을 교회는 너무나 쉽게 허용해 왔다.

사람이 모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뜻을 나누는 소중한 예배 시간이 알게 모르게 친권력적, 친어용적 사유 방식으로 세뇌당하는 순간 교회의 일원은 마초와 파시스트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 이 땅에서 그 어떤 것도 해석할 수 없는 무색, 무취의 존재들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한 교회는 눈먼 자들이 지배한 교회다. 그러한 교회에서의 십자가는 그냥 흔하고 흔하게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는 현재를 지배하는 마초와 파시즘의 망령으로부터 저항과 탈주를 동시에 추구하는 곳이어야 한다. 저항과 탈주란 단어가 신앙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거둬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세속화가 되는 것과는 맥이 다르다. 교회는 인간 존엄의 민주성. 그 뿌리 깊은 생명의 징후를 발견해 내는 곳이다. 그 생명 울림 속에서 보편을 넘어선 계시의 신비를 최소한 왜곡과 편견 없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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