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막을 내린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김은성 作)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촘촘하게 그립니다. 좌우 이념 소용돌이 속에서 스러져 간 평범한 이들을 통해 어둠의 시대를 조명합니다. 제주 4·3 사건, 6·25 전쟁, 군부독재 등 가슴 아픈 시대가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30대 초반인 제가 그 시절을 가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연극이 끝난 뒤 문득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이의상 씨는 올해 84세입니다. 천지가 논밭 뙈기뿐인 전라남도 순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고 공교육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습니다. 가난하든 못 배웠든 시간은 차별 없이 흐릅니다. 이 씨는 "남들처럼 똑같이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늘그막에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목사인 둘째 아들 영향을 받았습니다. 10월 27일 평범하지만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이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기자 주

여든넷 노인을 만났다. 젊은 세대들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격동의 근현대사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여든넷 노인 얼굴에는 주름이 차고 넘쳤다. 한평생 미간에 달라붙어 있던 사마귀에도, 눈알을 감싸는 눈꺼풀에도 주름이 서려 있다. 깊게 패인 주름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듯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 4월 27일, 이의상 씨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0월 6일생으로 올라갔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태어난 아이들은 허약했고 이따금씩 죽어 나갔다. 살아남은 이는 한참 뒤에야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은 지금도 기억하기 싫다. 산업화 시대 이전까지 이 씨는 배고픔의 시대를 살았다. 위로 형들만 넷이 있는데 장단이 있었다. 부모님 따라 농사를 지을 때는 손이 많아 좋았다. 밥 먹을 때는 달랐다. 나이가 어릴수록 밥양도 줄어들었다. 이 씨는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고 했다.

교육받은 기억은 없다. 6형제 중 유일하게 셋째 형과 막내만 학교에 다녔다. 특히 셋째는 머리가 좋았다. 집안에서는 큰사람이 나오는 줄 기대했다. 그런 셋째는 6·25가 발발하기 전 해군에 입대했다. 아버지는 '고작' 군인이 된 셋째에게 실망했다. 그 후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이 씨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질 때쯤 집으로 돌아오는 농사일을 반복했다.

일제강점기 이 씨의 삶은 해방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한여름 논에서 김을 맬 때였다. 마을 어른이 지나가면서 아버지에게 "나라가 해방됐다"고 말했다. 해방이 가져다준 기쁨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이 씨는 형들과 함께 김을 맸다.

이의상 씨는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랐다. 현재 여수에 있는 한 요양 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해방 이후 순천 인구는 2만 명 수준이었다. 작은 도시에 살던 이 씨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1949년 10월경, 총을 든 군인이 도시와 시골로 들이닥쳤다.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여수·순천·벌교 등 전남 동부 일대를 점령한 것. 반란은 일주일 만에 진압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반란군에 동조했다는 등의 이유로 진압군에게 살해당했다. 수천 명이 죽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 씨가 말했다.

"(진압군들이) 많이 죽여 가지고, 남국민학교에 쌓아 놨당게. 살짝 쳐다보고 얼른 와부렀재. 무서워 깆고 나돌아 댕기들 못 해." 이 씨에게 광복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 준 여순 사건의 진상은 6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격동의 세월을 빗겨 가다

사상자 100만 명을 낸 6·25 전쟁 이야기에서는 예상과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이 씨는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 투입되지 않았다. 북한군이 남도 일대까지 들이닥쳤을 때에도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 씨는 특별히 북한군으로부터 해코지당한 기억이 없고, 북한군은 며칠 뒤 떠났다고 말했다. 이 씨가 총 쏘는 자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그때 (전쟁) 나갔으믄 탕! 하고 한 방 쏴 봤을 것인디, 아쉽재." 웃는 얼굴에 주름이 일렁였다.

1953년 휴전이 되던 해 이 씨는 입대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군대 소속과 직책은 잊지 않았다. "미 1군단 제51통신대대본부 위병 선임하사." 이 씨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카투사였다. 카투사는 미 육군에 배속된 한국 군인으로, 요즘 같은 시대에는 영어를 잘해야 갈 수 있다. 그 시절에는 규정이 좀 달랐다고 이 씨가 말했다.

"영어도 잘 모르는디 갔재. 거기서 다 배웠재. 우리는 통역관도 필요 없었어. 양놈들은 나를 '단오'라고 불렀어. 갸들이 지어 줬는디 뭔 뜻인지는 몰러. 근디 거기서는 착실허게 생활해야 돼. 안 글믄 한국군으로 돌려보내 부러. 쟁(장난 또는 사고 - 기자 주) 떨다가 하루나 사흘 있다가 딴 데로 간 놈들도 많았어."

이의상 씨는 6년간 군대에서 복무했다. 장기 복무를 하라는 주변 권유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군대를 나왔다.

"몸서리가 나니까…6년간 갸들하고 같이 있었는디 뭐할라고 또 같이 살어? 안 해."

이의상 씨는 평생 농사를 지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일을 했다. 그렇게 자녀 넷을 길렀다.

제대하니 26살이었다. 머리와 몸만 컸을 뿐 일상은 일제강점기를 보낸 유년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동네에 작은 월세방을 얻어 군대 시절 만난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이 씨는 "신나게 놀고, 농사지으며 살았다"고 했다.

이 씨는 집안에 돈이 많거나 특출하지 않는 이상 그 시절 대부분은 자신과 비슷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현재 젊은 세대들이 책에서 배우는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6·10 민주 항쟁 등 역사적 사건은 이 씨에게 조금 먼 이야기였다.

"그런 일이야 소문으로만 들었재. 먹고사느라 바쁜디 데모하러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우리 같은 사람은 정치는 하덜도 안 해. 평상 농사만 지을 줄 알재. 아버지가 큰아들하고 둘째 아들한테만 땅을 줘 가지고, 나는 다른 땅 빌려서 농사를 지었어. 안 굶어 죽을라고. 땅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은 정치는 하도 못 해."

그나마 이 씨가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은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5·18 민주화 운동뿐이다. 당시 순천에서 광주까지 차로 2시간 정도 걸렸다. 이 씨는 네 자녀에게 절대 광주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누군가로부터 군인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씨는 1949년 여순 사건을 떠올렸다.

"씨벌 것들이 또 총 들고 와서 죽인다고 항께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재. 우리 식구들은 순천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게 했어."

"천국도 좋은데, 집에 먼저 좀 갔으면…"
예상과 달리 이 씨는 역사적 사건을 빗겨 살았다. 이 씨는 먹고살기 바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쏟지 못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이의상 씨는 올해 4월부터 여수에 있는 한 요양 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자녀들이 곧잘 병문안 오지만,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삐쩍 마른 다리를 매만지던 그가 말했다.

"침대에만 누워 있응께 다리가 얇아지고 안 좋아. 그래도 나는 우리 형제 중에 제일 오래 살고 있어. 내년이면 여든다섯인디, 이걸 넘긴 사람이 없어. 옛날에는 칠십만 돼도 다 죽었으니까."

손주와 자식 자랑도 나왔다.

"손주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여. 인자 2년 차인디 머리가 좋응께 벌써 6학년 맡고 있재. 둘째 아들은 목사여. 나가 신대원까지 보내 줬어. 여수에서 목회하면서 강연도 댕기고 바빠. 시방 안 본 지가 열흘 됐는디 소식이 없네."

이 씨는 아들 목사 권유로 20년 전부터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다. 병원에 입원한 뒤로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 씨는 하루라도 빨리 집과 교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천국도 가고 잡은디, 집에를 먼저 가면 좋겄어. 여기는 너무 답답해."

인터뷰가 끝나 갈 즈음 이의상 씨는 기자에게 나이를 물었다. 서른둘이라고 답했다. 뜸을 들이던 이 씨가 말했다.

"시간, 그냥 지나가. 부지런히 살어."

이의상 씨는 답답한 요양병원이 싫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바나나를 까는 이 씨의 모습.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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