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대중에게 이미 끝난 일이다.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운동가들의 반대에도 해군기지는 기어코 들어섰다. 감귤 농사를 짓던 한적한 마을은 반으로 쪼개졌고 주민은 서로 등을 돌렸다. 주민이 떠난 자리는 군인들이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계속 해군기지를 반대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누군가에게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인 커리(28)는 벌써 1년 가까이 강정에 머물며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멜리사(24)도 2017년부터 강정에서 활동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게 아니다. 이들에게는 '평화운동'이라는 목적이 있다.

한국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커리(왼쪽)와 멜리사(오른쪽). 사진 제공 커리

제주 강정을 사랑하는 미국인 두 명을 11월 15일 만났다. 이들이 한국, 특히 강정마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들어 봤다.

해군기지 건설로 강정마을 끝났다 보면 오산

커리는 2013년 처음 한국에 왔다. 미국 남부 조지아주 출신인 커리는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과 평화학을 전공했다. 대학교 다닐 때 수단 다르푸르 문제가 터졌다. UN이 평화유지군을 보낸다고 했을 때 커리는 정말 평화가 유지되리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순진한(naive)' 생각이었다.

"평화유지군은 말 그대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았어요. 평화유지군이 다르푸르에 갔지만 똑같이 대량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어요.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나 일반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어요. 당시 미국에 있는 수단대사관에 가서 시위도 하고 그랬어요. 자국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물었죠. 평화는 그냥 유지하려 한다고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어요."

평화 활동을 하고 싶었다. 미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었지만 정확하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이미 친구들이 가 있던 동북아평화교육훈련원(NARPI)이 주최하는 평화 캠프에 참여했다. 커리는 미국에서도 이미 기독교 공동체에서 살면서 평화교육을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커리는 벌써 1년 가까이 강정마을에 살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서부 워싱턴주에 살던 멜리사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교회에서 '기도하면 좋은 기독교인'이라는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 대학생 때 우연한 기회에 '가톨릭워커(Catholic Worker)'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했다. 가톨릭워커는 미국 소설가이자 진보 언론인 도로시 데이와 철학자 피터 모린이 만든 단체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며 단순한 삶을 추구한다. 2014년 마침 공동체에서 열흘 동안 한국 강정마을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길을 나섰다.

"2014년 처음 강정마을에 갔어요. 비록 열흘 정도만 있다 갔지만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대학교에서 대안 경제를 배웠고 평화운동에도 관심이 있었죠. 하지만 미국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운동을 경험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2014년에 이어 2016년 3월 강정을 한 번 더 방문했고 오래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8월에 다시 한국을 찾았죠."

왜 하필 한국에서도 제주 강정을 택했는지 궁금했다. 이미 모든 기지가 완성되고 더 이상 저항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 커리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 평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지금 해군기지가 들어선 것만 보면 싸움에서 패배한 것처럼 느낄 수 있어요.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전에는 조금 더 싸우기가 수월했지요. 건설만 반대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건설이 완료됐다고 해서 평화를 위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기지 건설 뒤에도 군대가 주둔하기 때문에 감시해야 할 일은 더 늘어납니다."

커리는 다양한 예를 들었다. 군대가 주둔하기 때문에 독극물 유출을 계속 감시해야 한다. 과거 주한미군이 독극물을 한강에 흘려보낸 것처럼 혹여 바다로 비소(arsenic)를 포함한 독성 물질이 새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배에 페인트칠한다고 하면 바다로 떨어지는 페인트는 인근 해양 생태계를 파괴할 여지가 있다. 해군함이 바다로 나가 훈련이라도 하면 또 어떤가. 우리나라만 훈련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은 또 다른 훈련을 낳는다. 당연히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다.

강정마을 주민과 함께하는 생활 평화운동도 진행 중이다. 소위 '평화 감수성'을 높이는 일이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강정마을을 잊지 않고 계속 관심 갖도록 1년에 수차례 강정 평화 학교를 연다. 올해는 강정 평화 영화 학교도 열었다. 강정을 주제로 다큐 영화나 단편영화를 찍어 상영회를 갖기도 했다. 개신교인들은 매일 강정에서 만종 기도회를 연다. 커리는 모든 행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쟁, 무기상 배만 불리는 일

기독교인조차 강대국 도움 없이는 평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시대. 커리와 멜리사는 오히려 기독교인이기에 더 평화운동에 열심이다. 커리는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군대를 거부한 전력이 있다고 했다.

멜리사는 양평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지금 교회는 초대교회 정체성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초대교회도 군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해서 박해받은 역사가 있지요. 아주 오랜 후에 재세례파가 초대교회를 따라 어떻게 평화를 위해 행동해야 하는지, 교회가 군대라는 매개체로 어떻게 국가와 연결돼 있는지 연구했죠. 사람들이 '당신들 행동 때문에 국가가 약해진다'라고 하거나 제주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사람을 '종북'이라고 낙인찍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저는 어느 특정한 나라 국민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나라 시민으로 사는 것과 매우 다르다고 생각해요. 하나님나라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작동하죠.

예수님만 해도 그래요. 예수님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어요. 하나님나라를 위해서였지요. 십자가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죠. 예수님은 권력을 더 모으려 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으로서 가진 권력을 계속 주위에 나눠 주셨죠. 심지어 몸소 죽으면서까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대안을 제시해 주셨어요.

평화와 갈등, 비폭력을 공부하다 보면 어떻게 해야 북한과 전쟁을 피할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요. 무기를 줄이고 대화를 늘려야 하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죠. 너희가 미사일을 설치하니까 우리도 설치한다는 식입니다. 훈련에 훈련을 반복하며 서로를 위협하는 것 대신 대화를 통해 군사 위협을 감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방법은 무기 제조로 돈을 버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안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꼭 어디에 가서 평화운동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평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해도 미국인 혼자 이 모든 일을 찾아 감당할 수는 없는 법. 이들은 기독교 평화운동 단체 '개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커리는 강정에 있고, 멜리사는 경기도 양평 개척자들 공동체에서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마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당장 제주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단체 내부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내년 초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꼭 물어 오는 질문이 있다. "한국에서 뭐하고 사세요? 영어 선생님이에요?" 커리와 멜리사는 딱히 수입이 없다. 하지만 한국 생활에 큰 문제는 없다. 미국 공동체에서 살 때부터 이미 적게 벌어 적게 쓰고,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생활 방법이 몸에 뱄다. 각종 미디어에서 더 좋은 차, 더 넓은 집, 더 맛있는 음식 광고가 판치는 미국과 한국. 둘은 이런 사회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단순한 삶이 가능하다고 웃어 보였다.

커리(맨 오른쪽)는 강정마을에서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 커리

두 사람은 살던 곳을 떠나 먼 타국에서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평화운동을 위해 꼭 눈에 보이는 갈등이 존재하는 곳에만 가야만 할까. 커리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며 부모님을 예로 들었다.

"얼마 전 부모님이 미국에서 한국에 오셨어요. 와서 딸이 무슨 활동을 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지내는지 보고 가셨죠. 그동안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이번에 보고 가셔서 좀 안심도 되고 뭔가 생각에 변화가 오셨나 봐요. 교회에서 하는 짧은 프로그램에 참여하셨대요.

사시는 곳 가까운 데 소말리아 출신 난민이 모여 사는 곳이 있나 봐요. 그곳에 가서 처음에는 몇 시간, 나중에는 주기적으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필요한 서류 작성하는 것 도와주는 일을 했대요. 그러다가 소말리아 난민 가족과 친해져서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인데.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작은 행동 하나를 하는 것부터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멜리사는 인생의 먼 곳까지 보고 계획을 세우지는 않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하려다 보면 걱정이 많아지고 욕심도 많아지기 때문. 지금 주어진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고 한다. 당장은 개척자들과 함께하면서 제주-오키나와-대만을 잇는 '섬들의 연대' 활동에 함께할 생각이다. 공동체 식구들과 생활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며 내년부터 시작할 강정마을 평화 활동을 기다리고 있다.

당장 내 옆 사람과도 평화를 누리기 힘든 시대. 두 미국인은 이역만리 한국까지 와서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신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