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핵심

최근 박근혜 대통령 일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떠들썩하다는 말로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음에 양해를 구한다. 뭐랄까. 이 사태는 일국(一國)의 국가원수가 엄중한 사상적 이단성을 드러냈다든지 하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이른바 헌법 유린 혐의 이면에 도사린 샤먼의 유혹과 사적 권력욕의 무한 확장이 낳은 웃지 못 할, 그러면서도 연신 헛웃음이 새어 나오는 촌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를 지켜보는 교계의 시각은 심히 우려스럽다. 이 우려는 최근 사태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를 비롯해 비판하고 규탄하는 교계의 시각 모두에 해당된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알려진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배후에는 우리네처럼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정통 교회가 주범이 아니라 일부 사이비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네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선을 긋는 교계의 태도가 엄존한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일부 극우 목사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악한 뱀의 혀에 놀아난 희생자인 것처럼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망언을 일삼는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교계의 태도는 이뿐만이 아니다. 나라꼴이 엉망이고 세상사 허무할 뿐이라 말하는 종교 본질주의자들의 태도는 이 모든 걸 '내 탓이요' 하면서 기도와 예배, 영성을 일종의 도피처로 설정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러한 도피처를 진정한 사회적 변혁보다 더 가치 있고 쓸 만한 그리스도인의 절대 미덕이라고까지 선전하는 데 열을 올린다.

사실 이러한 도피주의적 성향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다. 영성은 이렇듯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고 싶을 때 단골 메뉴처럼 사용하던 유혹이었음을 우리는 종종 발견해 왔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대통령을 비판하고 강한 어조로 질타하는 교계의 모습에서도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을 피해 갈 수 없다.

앞선 말한 '내 탓이요' 영성은 분명 도피주의적 영성이요, 엄밀히 말해 '영성'이란 단어를 견강부회식으로 사용한 오독의 산물임이 틀림없다. 그렇다 해서 일부 교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가 언제나 시대의 예언자나 큰 어른, 현명한 원로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한국교회는 분명 최순실 게이트의 망령적 배후인 최태민의 종교 술수와 계략으로 인해 한국 사회 배후 권력으로 기생하고 진화하는 데 있어 사상적, 종교적 자양분을 제공해 온 혐의를 잊어선 안 된다. 무조건적 비판과 비난 일색의 교계 성토의 무의식적 일면에 우리만큼은 저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에서 시작된 시국 비난의 징후 또한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질문이 생긴다. 뭘 어쩌란 말이냐. 한국교회는 철저한 자기반성에만 몰두하란 얘기냐. 아님, 실천에만 몰두하란 말이냐.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한 영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책임 의식을 다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어떻게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 왔는지를 철저히 성찰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성장해 온 한국교회가 성서를 어떤 방식으로 유린해 왜곡된 텍스트로 우리네 삶과 문화, 정치의 억압 기제로 적용해 왔는지 분석해야 한다.

그 사태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이뤄지게 될 때, 실천은 불가피한 동력이 되어 우리에게 스며들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는 한국교회 성장 과정에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동기부여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군대의 교회, 군대의 종교화다.

군대의 교회

구약성서에서부터 군대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구약성서의 모티브는 대부분 군대 이미지에 대한 강한 증오와 강한 동경의 상관관계가 뒤섞여 있다. 대표적 예가 애굽 왕 바로의 군대와 만군의 야훼라는 호칭 안에 담긴 하나님의 군대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식민지 주민보다도 못한 노예로 삼은 애굽으로 대표된 지배자의 폭압과 그 배후의 실제 위협인 군대를 향한 강한 증오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출애굽의 해방을 주도한 야훼의 뜻 역시 군대의 폭압적 질서와 그 명령 체계가 낳은 인간 존엄 말살을 주도한 이념인 파시즘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했을 것이다. 여기엔 거창하게 노예제도 해방이나 피식민지적 이념의 탈각, 민주적 인간화에 대한 정서 요구가 덧입혀지지 않는다 해도 해석의 방점인 증오와 분노의 종식이란 의미로서의 해방 모티브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증오와 분노의 종식을 지속시키고 싶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의식에선 신의 명령이란 당위와 명분을 앞세운 강력한 힘, 또 다른 대항 세력으로서의 군대를 향한 갈망이 있다. 구약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인 야훼 하나님의 군대 정서에는 평화와 정의로운 질서에 대한 염원이 적극 반영된 것이다.

물론 만군의 야훼란 호칭이 갖는 이면의 상징성을 해석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경우 야훼의 군대는 평화와 정의로운 질서 갈망이란 보편 정서에의 호소가 담겨 있다. 이를 오늘의 현실에 투영해 보면 일견 타당한 구석이 있다. 세계가 막장으로 치닫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잠정적 방편으로서 협의와 조율을 강조하는 국제기구들의 불가피한 선택인 평화 유지군 파병과 그 지원은 정의의 잠정적 지속을 위한 조율의 한 과정으로 평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약성서가 배경이 된 이스라엘 역사 현실과 오늘의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 정서의 해석에 있어서는 신의 본래적 뜻과 인간의 요구 사이에 끔찍할 정도의 기괴한 간극이 발견된다. 인간과 집단이 요구하는 평화와 정의는 자기네 가족과 자기네 집단을 지키기 위한 보호조치로서의 직능으로 내려앉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군중들은 끊임없이 강한 왕을 요구했다. 그 갈망은 왕의 강력한 통치 체제의 견고화로 확장된다. 결국 평화와 정의라는 명분하에 더 크고 강한 군대 조직의 출현이 불가피한 것이다. 이에 대한 끊임없는 변명이 이어진다. '우리 민족은 세계열강들에 비하면 그 세력이 너무나 미미하다.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힘을 잃어버리면 끝장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강력한 신정 통치의 다른 버전인 강한 군대의 출범을 원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야훼가 원하는 군대는 그런 군대였을까. 야훼가 생각한 출애굽, 해방의 원형이 과연 그랬을까. 야훼가 갈망하는 강함은 주위의 모든 것이 무장해제되어도 상관없는 상태 아니었을까. 이름 없는 하나님, 형상 없는 하나님이란 약하고 무력한 존재를 붙잡고 광야 한복판에 서도 두려울 것 없는 신적 집념이 아니었을까.

강고한 우상과 집단 체제의 파시즘 없이도, 스스로 총과 칼, 무기와 보습을 내던지는 자발적 비폭력을 천명하고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초월적 신념이 야훼가 원한 강함 아니었을까. 약자를 탄압하지 않는 군대, 파시즘적 복종 체계를 해체하는 군대, 오합지졸처럼 보이더라도, 그 자체로 출애굽의 전무후무한 해방을 지속할 수 있는 신비적 공동체가 '만군의 야훼'란 호칭의 본령인 것이다.

그럼에도 야만적인 주류의 해석은 이러한 군대 개념을 나약하고 무력한 것으로 일축한다. 대신 강한 하나님의 군대, 강한 교회 조직을 주장하며 성장과 악진화(惡進化)를 독려해 왔다. 이러한 밀어붙임이 가장 효과적인 흐름을 탄 시공(時空)이 바로 한국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해 온 한국교회라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누가 그 군복을 입혔는가

군복을 입고, 누군가에게 허락받지도 않은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누구 흉내를 내듯 선글라스 끼고 설레발치며 호국 운운하는 망령이 있다. 바로 최태민이란 이름 뒤에 병풍처럼 스며든 '구국십자군'이란 망령이다. 이 망령은 분단국가의 비극을 종식시킨다는 명분,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멸공만이 살길이라며 다른 생각 아예 못하도록 다그치는 명분, 이 모든 게 나라 사랑, 민족 사랑, 하나님 사랑이란 명분을 들먹거리며 신의 사제 행세를 해 왔다. 그러면서 철면피 같은 얼굴로 강력한 군대 이미지 뒤에 따라붙는 권력의 떡고물을 챙겨먹는 데 익숙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강한 증오와 분노의 바탕 위에 세워진 파시즘을 온전히 닮아 버린 군대는 그 체계가 겉으로 보기엔 완전무결, 일사불란해 보이지만 그 속은 완전히 썩고 쓸모없는 허술함, 몰상식, 비루함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거들먹거리는 최태민이 선택한 아바타는 텅 빈 무덤과 같은 권력의 공허, 그 당사자들이다.

그렇게 권력 기생자들이 끌고 온 굿판은 비선이란 명목하에 벌어진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온갖 불법, 편법, 상스러움, 야만적인 오기로 뒤섞여 버렸다. 이 추태의 한복판에 강한 군대에 대한 향수가 있다. 강한 군대, 강한 권력, 강한 하나님, 강한 독재자에 대한 절망적인 향수가 텅 빈 무덤에서 벌어지는 굿판을 스스로 신비롭다고 추켜세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누가 과연 최태민에게 그 군복을 입혔는가. 독재자와 군부 세력의 폭압 탓으로만 돌릴 셈인가. 아니다. 최태민이 군복을 입고 '구국십자군'을 목청껏 부르짖을 수 있었던 배후의 핵심은 허위로 가득한 강한 군대에 대한 환상이 신의 뜻이라 외치던 소위 정통 교회의 부끄러운 비호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권력자들 앞에선 한없이 침묵하면서 약자들에게 회개나 부르짖고 헌금이란 명목으로 호주머니를 강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을 볼모로 세력 확장에만 골몰하던 교회 성장의 큰 그늘이 있었기에 악의 곰팡이가 활개 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한다며 정치 시절이 올 때마다 정치인들을 줄 세우거나, 권력가가 된 정치인들에게 줄을 서며 연명해 왔던 것이 한국교회의 생존 방식 중 하나 아니었느냔 말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보면 이를 어떤 예외적인 스캔들로 볼 수가 없다. 최순실 게이트의 배후에는 군대와 권력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 성공, 강한 하나님,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 세 가지 키워드, 성공, 강한 하나님, 믿음의 마약으로부터 한순간도 자유롭지 않았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기에 한국교회의 공동 책임은 막중하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를 다시 교회 안의 일부로 소외시켰던 약자들, 개인들의 문제로 돌려세워선 안 된다는 것이다. 자학의 영성을 가동시켜 '내 탓이오'라고 떠들면 안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이는 한국교회와 무관한 일이라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이미 교회 밖 사람들은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군대 귀신의 추태 앞에 치를 떨고 있다. 이를 외면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떠들어 대서도 안 될 말이다.

그렇다면 뭘 어쩌란 말인가.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교회는 군대에 대한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강한 조직, 강한 영성에 대한 허위를 벗어던져야 한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강한 하나님, 강한 조직, 강한 군대에 대한 통념적 해석을 전면 재고해야 한다. 단언컨대 그리스도인은 저들의 힘과 동경의 상징인 기득권을 버린다 해서 죽지 않는다. 신의 약속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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