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양육이라는 신화

대량 살상을 저지른 열일곱 살의 딜런 클리볼드. 그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문제아의 부모가 대단히 잘못된 양육 방식을 갖고 있을 거라는 통념과는 달리 20세기의 미국 사회가 제시한 기준에 매우 부합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수는 진보적인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두 아들이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쳤다. 또 워낙 매사에 조심성이 많은 편이었기에 자녀들이 좋은 버릇을 기를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전공 분야 덕에 인간 심리에 관한 지식을 평균 이상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지식을 아이들을 관찰하고 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했다(119).1)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수 클리볼드 지음 / 홍한별 옮김 / 반비 펴냄 / 472쪽 / 1만 7,000원

그럼에도 콜럼바인 사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비극적인 사건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수는 우연히 한 육아 잡지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윤리적 육아"에 관한 퀴즈가 실려 있었다. 열 개의 문항 중 아홉 개의 대답이 정답이었다. 단 하나, '아이의 사적인 일기를 읽는지'에 관한 질문에는 오답을 냈는데, 그 역시 딜런이 살아 있을 때에는 정답으로 맞췄을 법한 질문이었다(322).

수 클리볼드는 좋은 시민이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옳음의 기준에 따라 아이들을 양육했다. 그것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어야 마땅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해설을 쓰기도 한 임상심리학과 교수 앤드루 솔로몬이 밝힌 것처럼, 콜럼바인 사건은 마치 쓰나미처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성격의 재앙이었다.

나는 속으로 클리볼드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했다. 이 사람들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 일이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우리 중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니까. 그런데 두 사람은 정말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에는 콜럼바인 학살을 일으킨 정신이상은 어느 가정에서라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측하거나 알아본다는 건 불가능했다(9).

그러므로 딜런이 저지른 만행의 원인을 부모와 연관 짓는다면 그것은 수 클리볼드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기보다, 수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져야만 할 것이다. 딜런 클리볼드는 범죄자의 부모가 어딘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통념에 맞서기라도 하듯 아니, 어떤 아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될지 '당신들은 모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기라도 하듯 범행에 가담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

양육 주체는 사회화 주체인가

그런데 우리는 과연 '좋은' 양육을 통해 자녀가 어떤 아이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부모의 역할은 통상 자녀의 성공적인 사회화를 돕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양육을 돕는 1차적 주체(primary agent)의 자리에는 '사회 공동체'가 놓인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대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 관점에 따라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인식시킨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부모들은 '잘 자란 아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들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잘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말썽을 부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학업을 완수하며, 독립적이고 성공하는 어른이 된다. 부모들은 자신이 독재에 가까운 사회적 요구에 복종해 왔던 것처럼 아이들도 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사회 공동체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선을 옮겨 더 확장된 생태계에 속한 동등한 주체로서 부모와 자녀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특히 초기 양육 관계에서 감정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측면을 함께-조절(co-regulation)하는 일에 방점을 둔다면? 그렇다면 양육은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동 자신도 발달의 주체로서의 참여하고 상호 작용하는 것이 될 수 있다.2)

딜런의 경우, 콜럼바인 사건이 있기 1년쯤 전에 이미 조금씩 문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수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으로 기억하는 것은 딜런이 주차 중인 차에서 전자 장비를 훔친 일로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죄목은 중죄인 1급과 무단 침입, 절도, 그리고 경범죄인 범죄성 높은 장난이었다.

딜런이 한 행동이 잘못이라는 걸 딜런이 알기를 바랐다. 나는 딜런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면서 누가 네 물건을 훔쳐 가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딜런, 살면서 다른 규칙은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십계명은 따라야 한다.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말라." 나는 십계명 가운데 또 어떤 것이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려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쯤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범이야." 딜런이 말했다. "알아요."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시 말을 했다. "딜런,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어떻게 하면 네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딜런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자기가 충동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란 듯했다. 비참한 심정인 것 같았다. 그때에 나는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았고 딜런이 안쓰럽기만 했다(316).

회고적인 진술은 지나간 상황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이 대목에서 두 사람 사이 발화 비중의 차이는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당면한 문제적 상황이나 미래에 반복될 일에 대한 걱정, 혹은 부모로서의 역할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자녀가 말하지 못했지만 문제를 통해 전해야만 했던 어떤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부모는 자녀의 삶의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설계자로서 그 혼돈스러운 여정을 함께 헤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선도의 형태가 아니지만 무관심이나 태평함과는 다르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아이들은 이미 대부분의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아직 구성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내면의 힘과 복잡성을 끌어안고 분투하는 것뿐이다.

매뉴얼의 한계

양육 주체에 관한 문제와 함께 재고할 부분은 양육의 '매뉴얼화'이다. 매뉴얼은 우리에게 위험 요소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무탈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지지해 주기도 한다. 매뉴얼은 개별성과 예외성을 지우고 사태를 단순화하기에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효율성과 생산성 등의 가치에 주도되는 현대사회에 친화적이다.

일례로 2015년에 발표된 "동시대적 양육 모델을 향하여"라는 논문에서 저자들은 양육 행위에 관한 포괄적인 평가 지표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오늘날에는 부모들과 자녀들이 각종 광고와 매체, 신기술에 노출되면서 양육에 관하여 서로 모순된 정보와 조언을 접하기 때문에 '좋은' 양육의 정의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아동은 30년 전의 아동들에 비해 여러 방면에서 우수해졌음에도 유아기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적응 문제 및 심리 문제를 더 많이 겪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양육에 관한 핵심 요인들을 추출하고 양육 행위에 관한 포괄적 평가 지표를 개발하는 일의 중요성을 주장한다.3)

그러나 매뉴얼은 양날의 검이다. 그것은 큰 흐름 속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지만 한편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간과해도 되는 근거로서 작동할 수 있는 맹점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맹점은 양육에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모든 아이, 모든 부모, 그리고 모든 상호작용이 지니는 고유한 성질과 양상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이다. 매뉴얼에 대한 과신 탓에 현실 속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문제의 전조를 발견하더라도 자신의 감각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매뉴얼의 유용성을 인정하여 참고하거나 사용할 때에도 일반화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매뉴얼의 이용자는 행위 주체인 인간의 한계를 유념해야 한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고, 습득한 지식은 실천의 범위를 초과하기 마련이다. 매뉴얼의 이상은 인간의 의지와 실천, 통제의 한계에 종속된다. 양육자 개인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일반적 이상이 양육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무언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뉴얼이라기보다 낯설게 바라보는 법이 아닐까?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낯설게 배워 가고, 자신의 앞에 놓인 타자를 새롭게 배워가는 태도야말로 서로의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나아갈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사회화를 돕는 과정으로 양육을 이해하거나 양육 기준의 매뉴얼화를 지향하는 것은 미국의 주류 양육 담론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딜런 클리볼드를 키운 이러한 양육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주의 및 자본주의와 맞닿아있다. 자본주의는 꾸준히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본의 의미는 후기자본주의에서 초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 먼 것으로, 이제 돈은 더 이상 교환가치가 아닌 '동원(mobilization)'이라는 개념과 연동된다. 동원은 국가가 전쟁 상황에 처했을 때 활성화되는 국가-사회체의 상태인데 후기자본주의는 이러한 군사적 논리를 경제 일반의 영역으로 이식했다. 그 결과 불안정한 일상은 전시의 경쟁이라는 하나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고 인간 사회의 에너지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타인과 싸운다는 목표에 징집"당한다.4)

콜럼바인고등학교는 이러한 자본주의사회의 속성을 지닌 곳이었다. 학술 자본의 축적을 추구하고 학원 사회의 기준에 따라 학생들의 계급을 나누며 종교적으로는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불관용의 사회였다. 그곳에서 딜런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심각하게 수줍음을 많이 타고 불안의 정동을 강하게 느꼈던 딜런은 자라면서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사회 적응에는 여전한 어려움을 겪었다.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지만 열등감을 많이 느꼈고 자기혐오가 심하기도 했다.

딜런의 일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모욕하는 것 같다는 표현,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기대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 콜럼바인 사건 2년 전의 일기에서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자살을 생각하면 다음 생에 가게 될 그곳엔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나 자신, 세계, 우주와 치루는 이 전쟁도 비로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딜런은 심각한 상태의 우울을 겪고 있었으며 자가 처방으로서 몰래 보드카를 마시기도 했다.5)

학내의 질서를 따라 강자의 대열에 들지 못한 그는 자연히 낙오자로 낙인찍혔고 이는 콜럼바인에서 곧 속수무책으로 괴롭힘을 당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모든 우울한 사람이나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테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딜런도 에릭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테러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딜런과 에릭, 두 사람 모두가 일기를 남겼기 때문에 사건을 맡은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일기를 분석할 수 있었다. "딜런의 일기는 에릭의 일기와 내용이나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에릭은 자기애적 오만과 살기 띤 분노로 가득한 반면 딜런의 일기는 외로움, 우울, 반추, 사랑에의 갈구 등에 초점을 맞춘다. 에릭은 무기, 스와스티카, 군인을 그렸다. 딜런은 하트를 그렸다. (중략) 딜런은 진정한 사랑을 갈망했다"(272).

▲ 유투브 동영상 갈무리

그런데 자기혐오가 강하고 우울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던 딜런이 가학적인 성향의 에릭과 함께 움직이면서 증오의 방향을 외부로 틀게 되었다. FBI 조사반 자문이었던 퓨질리어 박사는 사건 당일 두 아이의 심리 상태를 이렇게 진술했다. "에릭이 사람을 죽이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반면, 딜런은 죽으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다른 사람도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280). 에릭과 딜런은 심리학적 견지에서 거의 양쪽 극단에 위치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결국 하나의 욕망을 공유하게 되었기에 함께 행동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관한, 곧 죽이고 싶은 욕망, 죽고 싶은 욕망이었다.6)

누가 자살 테러를 저지르는가?

딜런과 에릭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살 테러범의 유형은 단일하지 않다. 형사 사법 분야의 전문가인 랭크포드 박사는 자살 테러를 크게 네 범주로 분류한다. 이는 가장 전형적인(conventional) 자살 성향을 보이는 유형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테러, 강압적인 집단의 폭력에 시달리다가(coerced) 가담하는 테러,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escapist) 자행하는 테러, 처형을 당하기 위한 간접적인 덫(indirect)으로 기능하는 테러 등이다. 각각의 유형과 사례들에서 고유한 독특성이 발견되지만 그럼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러한 테러가 이미 자살 충동을 느끼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고, 둘째,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절박했다는 것이다. 자살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외부 현실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 실행을 지연하지만 고통스러운 정신적 현실에서 벗어날 만한 기회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애착을 가지고 있는 주체라면 고르지 않을 법한 선택지를 택한다.7)

전형적인 테러의 형태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 취약한 인물이 반사회적인 폭력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아주 많다. 이때 행위화는 촉발의 계기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 안에서 문제적인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면 그만큼 그 사회가 취약한 이들을 자극할 만한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장이라는 뜻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취약한 이들에게 얼마나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곳인가?

베라르디는 오늘날의 남한 사회를 경제적 신조가 정체화의 토양인 곳으로, 동시에 완벽하게 고립되고 완벽하게 연결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디지털 사회로 진단한다.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전쟁을 겪은 후, 폐허 위에 국가를 재건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의 정체성이 사라진 아노미 상태에서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시뮬라시옹을 성공적으로 구사했고 이후 남한 사회는 폭발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단 두 세대 만에 서구 사회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다는 나라들에 견줄 만한 부를 축적하고 또 소비 수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이 치르는 대가는 일상의 사막화, 리듬의 과잉 가속, 생애의 극단적 개인화, 노동시장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경쟁 같은 것들이다. 젊은 세대는 이러한 고립, 경쟁, 무의미의 감각, 강박, 실패라는 유산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하지만 고작 10만 명 중 28명만이 탈출에 성공한다.8)

모든 구성원에게 자리를

고백하건대 이 글을 시작할 당시에 나는 딜런 클리볼드의 문제가 누구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인지 밝히고 싶었다. 부모의 실책이었음이 자명할 것도 같았고, 주체 자신의 선택이라는 항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수 클리볼드가 스스로를 증언석에 세우면서까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독자로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과거를 되짚어 보는 일은 중요한 작업이지만 어떤 부분은 순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하며 사회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몫이 따로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소경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경유해 글을 맺고자 한다.

요한복음 9장은 제자들과 길을 가던 예수께서 소경을 만난 일화로 시작된다. 이 소경은 눈이 먼 채로 태어난 사람인데 제자들은 그이가 누구의 죄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인지 궁금해 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9)

잘못 놓인 결과를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야기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런 접근은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이며 무엇보다 예방의 차원에서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접근은 조금 달랐다. 예수는 발화의 시점에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명제-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를 제시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미래로 향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공동체의 층위에서 과거를 묻지 않는 행위는 구성원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셈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가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러한 환대를 통해서이다. 타자는 사회 안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우리의 몸짓과 말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고, 도덕적 주체가 된다."10)

다수의 가해자들은 본디 피해자였던 사람들이다. 애초에 그들이 피해를 입은 것 역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이 무뢰한이어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 개인의 한계와 사회의 한계가 일으킨 상승효과가 낳은 비극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계, 인간 세상의 한계 속에서 좀처럼 벗을 수 없는 굴레 같은 것.

한 사회의 성장이 역사와 세월의 무게를 단번에 거슬러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성장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양육자들 개개인에 대하여 그 자신의 역사를 초인적으로 극복해 내고 일정한 표준에 해당하는 양육을 해내야 한다는 식으로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닿지 못하는 한계들에 대하여 가혹하게 단죄하는 것은 역시나 해당 구성원의 자리를 없애는 일이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명백한 범법 행위는 법리에 따라 다스리되 우리 사회의 취약한 구성원들이 가해자로 몰락하지 않도록 건전한 사회를 구성해 가는 일이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일상이 사막화되지 않도록 고삐를 단단히 쥐고 분자화된 개인의 삶을 랜선 너머로 연결하며 정체성의 바탕을 다원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모든 성원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 다음 생에는 자신의 자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되뇌는 우리 사회의 딜런들을 위하여.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신윤주 /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각주

1)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반비).
2) Arminta Lee Jacobson, "Contemporary Models for Positive Parenting", Journal of Family and Consumer Sciences 96(4), 2004.
3) Carly A.Y. Reid, Lynne D. Roberts, Clare M. Roberts, Jan P. Piek, "Towards a Model of Contemporary Parenting: The Parenting Behaviours and Dimensions Questionnaire", PLoS One 10(6), 2015
4)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죽음의 스펙터클>(반비), 38쪽.
5) Adam Lankford, The Myth of Martyrdom: What Really Drives Suicide Bombers, Rampage Shooters, and Other Self-destructive Killers, Palgrave Macmillan, 2013: 133~136.
6) Ibid., 133.
7) Ibid., 125~147.
8) 베라르디, <죽음의 스펙터클>(창비) 231~240쪽.
9) 요한복음 9장 1-5절(공동번역성서)
10)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11~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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