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거룩한 전쟁과 헤렘1) 보기.

2. 가나안 정복 전쟁의 이론들

신명기와 여호수아서, 그리고 사사기에 묘사된 가나안 정복 과정과 결과들은 고고학 증거와 성서 본문의 불일치와 성서 기록 자체의 모순으로 그 역사성을 확증하기가 쉽지 않다. 성서 기록들이 서로 불일치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성서가 정경화하는 과정 속에서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당대나 후대의 독자들이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비평적 해석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

사사기

1) 대부분의 땅을 정복하고 나중에 땅을 나눔

2) '온 이스라엘'이 힘을 합침

3) 이스라엘이 그 땅의 도시 대부분을 정복

4) 예루살렘,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게셀, 벧세메스 등 멸망했다고 분명하게 기록된 도시들(수 12:7-24)

5) 신속한 '정복 이후, 정착'

6) 여호수아 10:13 / 기브온에서 아모리 사람들과 전투하던 가운데 태양이 멈춘 사건에 대한 정보의 출처가 야살(Jashar)의 책

1) 땅을 먼저 분배하고 나중에 정복 전쟁

2) 각 지파들이 산발적으로 전투

3) 쫓겨나지 않은 20개 도시(삿 1:21, 27-33)

4) 예루살렘,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게셀, 벧세메스 등 정복되지 않은 곳들(삿 1:27-33)

5) 개별적인 전투와 오랜 시간 평화로운 정착

6) 사무엘하 1:18 / 야살의 책이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책이라면 여호수아서 기록의 실제 연대는 다윗의 시대로 봐야 할 것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중심으로 △정복 모델 △평화 정착 모델 △농민 반란 모델 △점진적 출현 모델이라는 네 가지 이론이 있다.

1) 정복 모델(Conquest Model)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이다. 정복 모델은 가나안 정복에 관한 성서 본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여호수아의 탁월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가나안 땅을 신속하게 정복, 지파별로 땅을 분배, 정착했다는 이론이다.

전설적인 근동학자이자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인 미국의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W. F. Albright)는 처음에는 성서 자체의 기록 연대(왕상 6:1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 시브월 곧 2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를 근거로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정복이 기원전 15세기에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솔로몬이 930년에 죽었고 40년을 통치했으니 그는 기원전 970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성전 건축은 4년이 지난 966년에 시작된다. 966년에 480년을 더하면 출애굽은 정확히 기원전 1446년 곧 기원전 15세기라는 가정이 나온다. 그러다가 넬슨 글루에크(Nelson Glueck)가 1938-40년에 트랜스요르단 지역을 조사한 뒤에, 이들 지역이 기원전 13세기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자 정복 연대를 기원전 13세기로 수정한다. 그는 성서와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1920년대부터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정복 모델'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고고학적인 발굴과 탐사는, 대략 기원전 1200년경으로 보이는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에 대한) 점령의 성격에 대해서 점차 밝은 빛을 비춰 주고 있다."

1957년에는 그의 제자 라이트(G. Ernest Wright)가 뒤를 이어서 "우리는 기원전 13세기에 어쨌든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된 일단의 무리들이, 땅이 아니라 본래는 약탈할 목적으로 신중하게 계획된 침투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에 들어갔다고 결론 내려도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고고학자이자 이스라엘 방위군의 참모총장, 부수상을 역임한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은 1955-58년에 상부 갈릴리에 있는 하솔의 유적을 직접 발굴하였는데, 사실상 여호수아 11:10-13에 있는 "본래 모든 나라의 머리였던" 하솔의 멸망에 대한 역사성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고고학 발굴들이 정복 모델을 무너뜨리고 있던 1982년까지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이렇게 주장했다. "후기 청동기시대의 마지막 시기에(기원전 13세기), 반(半) 유목민 이스라엘 민족이 수많은 가나안의 도시들을 파괴했다는 것을 고고학이 광범위하게 입증해 준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그리고 천천히, 그들은 폐허 위에 자신들이 거주할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땅의 나머지 부분들을 점령했다."

처음에는 정복 모델이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서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해 주는 것처럼 보였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까지 벧엘, 드빌, 라기스 그리고 하솔 같은 유적들에서 나온 증거가 기원전 13-12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며, 이는 가나안 땅에서 광범위한 정복 활동을 했다는 여호수아서 이야기를 확증해 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브라이트-라이트-브라이트로 이어지는 올브라이트 학파의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결국 스승들의 주장을 철회한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일이었다. 이 정복은 멀리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족장들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고,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완결되었다. 이렇게 출현한 이스라엘은 그 체제 안에 극히 이질적인 출신 배경을 가진 여러 집단을 끌어안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정복에 관한 표준적인 전승이 형성됨에 따라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일어난 사건들이 '정복'이라는 표제 아래 결합되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이론의 단점은 대규모 전쟁에 대한 고고학의 증거가 매우 부족하고, 여호수아서와 사사기가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에서는 대부분의 땅이 정복되고 지파별로 땅을 나누는 것과 달리(수 13:1-21:45), 사사기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삿 1:1) 땅이 먼저 분배되고 나중에 정복 전쟁을 벌인다. 그래서 유다는 형 시므온에게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간다(삿 1:3). 여호수아서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힘을 합쳤지만 사사기에서는 각 지파들이 산발적으로 전투를 한다.

더 나아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이 소탕했다는 가나안 도시들이 사사기 1장에서는 쫓겨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쫓겨나지 않은 20개 도시의 목록(삿 1:21, 27-33)에는 예루살렘,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게셀, 벧세메스 등이 나오는데, 여호수아서에는 멸망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수 12:7-24).

고고학 발굴과의 불일치는 둘째 문제이고, 성서 본문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정복 모델의 가장 큰 단점이 된다.

2) 평화 정착 모델(Peaceful infiltration Model)

평화 정착 모델은 사사기서 1장을 근거를 삼았으며 정복 모델이 여호수아서를 중심으로 연구되는 것과는 다른 시각이다. 사사기 1:27-36에는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한 상당히 많은 가나안 백성들을 열거한다. 이 학설은 여호수아서가 묘사하는 대규모 전투를 통한 단기간의 가나안 정복을 부정하며, 가나안 정착을 위한 기나긴 투쟁이 정착으로 귀결되었다는 이론이다. 이스라엘인들(또는 잠재적 이스라엘인들)은 통합되지 않은 채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방향에서 약간의 전투와 대부분 평화로운 이주를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갔음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이 가설에는 주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던 자들이라고 하는 성경의 전승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동하며 텐트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이라고 가정한다. 둘째, 중동 목축 유목민의 정착화에 대한 근대의 민속학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연구에 따르면 천년 동안 부족민들이 멀고 먼 거리를 옮겨 다녔는데, 결국 그들 대부분이 농부나 마을 주민이 되기 위해서 '정착'했다는 것이다.

평화 정착 모델에 따르면, 기원전 13-12세기에 가나안의 고지대 또는 서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본래 트랜스요르단의 반건조지역(semi-arid)에 살던 유목 부족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풀과 물을 찾아서 요르단강을 건너서 모든 계절이 시원하고 물도 많은 비옥한 고원지대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견해로서, 결국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기록된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는 가설이다.

이 이론의 주요한 약점은 이 가설이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회학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막스 베버는 촌락 정착민의 생활 방식과 유목민의 생활 방식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나누었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학에 따르면 농경과 반(半)유목민 생활이 고대에서는 그렇게 엄밀하게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민속학 측면에서 볼 때 '평화적인 잠입'은 베드윈(유목민)의 삶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19세기 유럽 사람들의 오해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중동 목축 유목 사회와 생활양식 연구자들이 아라비아 말을 할 줄 몰랐기에 단지 피상적으로만 관찰했을 뿐, 유목민들의 실제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마추어 민속학자들은 유목민들의 삶을 '낭만화'했기에 정착화의 실제 역학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초기 철기시대의 중앙 산지 정착민들은 주로 농부들이었고 일부만 목축업자들이었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정설이다.

평화 정착 모델과 정복 모델은 성서의 기록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 '밖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 '안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다.

3) 농민 반란 모델(Peasant revolt Model)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에 관한 정복 모델과 평화 정착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 훨씬 이전의 것인데, 1950년대 초반에 이미 그 이론들은 용도 폐기되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조지 멘덴홀(George Mendenhall)이 짤막한 논문 '히브리 민족의 팔레스타인 정복'(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을 출판하였는데, 정복의 개념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가나안 사람들이라는 주장이었다.

이후에 노만 K. 갓월드(Norman K. Gottwald)가 '초기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한 군사 정복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랜 기간 이어진 사회-문화적이며 종교적인 '혁명'(revolt)의 결과라는 이론을 주장한다. 이 혁명은 후기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시기)의 지방 가나안 농민들에 의해서 촉발된 것인데, 농민들이 부패한 권력자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일으켰으며 도시화로 인한 격차와 계급화의 지배에서 벗어나 팔레스타인 고지대에 정착하였다는 이론으로, 실제 이스라엘 사람들 대다수는 도시의 지배 엘리트들의 억압에 반기를 든 가나안 땅 농민들이었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의 결정적인 문제는 고고학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혁명이라는 것이 대개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실체적인 물질적 문화를 발견하기가 극도로 어렵다. 자유농민들, 농업 잉여물, 부족 간 협력 등은 초기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민족 문화에도 해당된다. 또한 갓월드는 도시 군주제가 되기 전 부족 사회의 초기 이스라엘을 자유와 평등의 시대라고 가정했으나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 그의 맑스주의 경향 등이 비판을 받았다.

4) 점진적 출현 모델(Gradual emergence model)

최근에 들어서 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견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이었고 외부에서 들어온 여러 집단들, 특별히 이집트를 탈출한 집단들과 혼합과 융화되면서 이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실제로 기원전 1200년대에는 고대 근동의 도시국가들이 군사 활동, 기근, 자연환경 변화 등의 원인으로 도시국가들이 대규모로 급격히 붕괴되는 시기였다. 붕괴된 사회구조에서 탈출한 집단들이 이스라엘이 정착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와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들이 곧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는 이론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출애굽을 직접 경험했고, 또 다른 일부는 경험하지 않았는데 이들을 하나의 이스라엘 민족으로 묶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여호와 신앙이라는 이론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론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설명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확정된 이론은 없다. 오늘날에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역사성이 성서 자체의 불일치와 고고학 증거 부족으로 성서 본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 의견이다. 그렇다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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