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죽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모여야 하고 나눠야 합니다."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기죽지 말라는 박정은 수녀 당부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 말을 전하는 박 수녀도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10월 13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 여성 3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손에 책 한 권씩 들고 있었다. 어떤 이의 책은 조금 너덜너덜하고, 어떤 사람 책에는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은 <사려 깊은 수다>(옐로브릭). 4월에 출판돼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책이다.

저자 박정은 수녀와 독자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박 수녀는 책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와 책에서 소개한 '지혜의 원'과 유사한 모임을 시작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점을 설명하고,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점을 저자에게 직접 물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린 강의는 아니었지만, 여성들이 함께 모여 웃음과 울음을 나눈 소박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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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겪는 고통은 개인 문제가 아니다

박정은 수녀는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실패할 수 있고, 그때 받는 상처가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상처받았을 때 혼자 고립되지 말고 더 힘을 내서 사람을 만나고 친한 사람들과 자신의 아픔을 나눠야 하는 이유다.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나의 그림자를 주변 사람들이 보고 얘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내 그림자가 뭔지 제대로 알수록 삶을 더 잘 살 수 있기 때문.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조심해야 할 점을 언급하던 박정은 수녀는 영성에서 그 답을 찾았다. 박정은 수녀는 영성을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 가고 자아가 확실해지는 모든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박 수녀는 여기에 덧붙여 영성을 몇 가지 단어로 설명했다.

먼저 영성은 과정이다. 영성은 어느 한 순간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변하는 건 당연한데 과거에 인상 깊었던 한 시점만 끝까지 고집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하는 말이 다 비슷한 듯하지만 들어 주는 사람 태도에 따라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진다며 늘 새로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 영성은 사회성이다. 박정은 수녀는 주어진 환경과 참된 자아를 착각하는 것이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실수하는 일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참된 자아 안에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마음이 깃들기 때문에 신앙인이라면 참된 자아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어떤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자아를 투영하며 참된 자아를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나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쉽지 않겠지만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은 수녀가 보기에 한국 여성은 고통과 한이 많은 것에 비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적다고 했다. 세월호 같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을 사회에서 겪지만, 한국 사회는 유독 누군가의 고통을 개인적인 일로 국한하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긴다.

한국은 산업화를 거치며 성공 신화를 추구했다. 성공 사회에 들어가지 많은 사람들 이야기는 사회에 드러낼 것 없는 개인 이야기로만 여겼다. 박 수녀는 우리네 고통이 공동체성을 띄고 있음을 꼭 기억해 달라고 참석자들에게 주문했다.

▲ 저자 박정은 수녀는 행복해지고, 기죽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기죽지 말자는 말을 전할 때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듣는 이들도 박 수녀의 말에 공감했는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고민과 한이 많은 우리 사회 여성들이 더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일까. 박정은 수녀는 힘들어도 사람을 더 많이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통을 나누는 일보다 혼자 소외된 채 고립돼 있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많이 모여 얘기할 때 소위 '기 빨리는' 경험, 한 번씩은 해 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보다 더 중요한 '듣기'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들으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 나누면서 함께 갑니다. 혼자 가다 힘들면 같이 가고 쉬었다 가는 거죠. 지치지 말고 서로 위해 주고 무엇보다 기죽지 말고요.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꼭 해야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행복해야 합니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 나로서 행복하셔야 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사람과 화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두 번째 누가 뭐라 해도 기죽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씨앗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습니다. 절대 기죽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는 더 모여야 하고 나눠야 합니다. 서로 약속합시다. 행복하고, 기죽지 말기로 약속합시다."

공동체가 병들면 약자가 먼저 다친다

박정은 수녀 강의가 끝난 뒤 참석자들 질문이 이어졌다. 독자들 중에는 직접 '지혜의 원'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의 빈도로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모임을 진행해야 하는지 등 궁금한 점들을 쏟아 냈다.

또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묻기도 했다. 더 잘 싸우는 방법을 물은 이도 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같은 문제로 부딪치고 그럴 때마다 비슷한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박 수녀에게 물었다.

▲ 박정은 수녀는 강의 시작 전에 참석자들에게 나무로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참석자 모두가 말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참가자들은 단순히 듣는 행위에서 말하는 행위까지 더하는 경험을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박정은 수녀는 공동체가 병들면 언제나 연약한 존재가 가장 먼저 상처받고 다친다고 했다. 상처받은 약자는 버티지 못하고 결국 강자만 살아남는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싸워야 할 때 두 가지를 꼭 명심해 달라고 했다.

"분노는 나의 힘입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분노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사회적 약자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분노하지 않으면 어디서 정의의 힘을 얻어요. 내 마음 속에 있는, 올바른 일에 대한 분노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바른 일을 위해 화나는 마음을 놓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기죽는' 일입니다. 백남기 농민 추모 미사에서 어떤 신부님이 부드럽게, 간절하게, 계속해서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안에 분노를 지키지만 부드럽고 간절하게, 계속해야 합니다.

싸움은 외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처럼 양순하게, 뱀처럼 지혜롭게 하라는 성경 말씀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같이 일할 수 있는 동지를 찾아야 합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연대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협력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지치지 않게 손잡고 같이 가는 것이 중요하죠. 싸우다가 너무 지치면 멈추고 잠깐 쉬면 됩니다. 마음이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박정은 수녀는 소수인 여성들에게 '연대'를 주문했다. 그는 남성 중심 공동체는 꼭 성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수가 권력을 갖는 피라미드 구조를 '남성 중심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고 봤다. 젠더(성별)는 이제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약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박 수녀는 "소수자는 적은 숫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힘이 없는 약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럴수록 소수자끼리 협력하고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여성들과 더 연대해야 합니다. 힘없는 사람끼리 만나 먼저 교류하는 것이 좋습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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