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을 하며 만난 노숙인 청년 이야기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조선족 형제님이 꿈을 찾아가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주

중국 선양(沈阳)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쌍둥이 여동생과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한 남동생이 한 명 있다. 부모님 노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칭다오(靑島)에서 한국어 통역사로 일했다.

이후 상하이(上海) 한국 음식점에 취업해 수년간 일하다 방문 취업으로 한국에 왔다. 부모님이 한국으로 먼저 건너 가셨다. 내가 한국에 올 당시에는 방문 취업 조건이 많이 완화되어 200여 만 원만 소개비로 주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한국은 꿈을 이루기에 알맞은 장소처럼 보였다. 병원과 경찰서와 은행에서 중국과는 전혀 다르게 낯선 이방인인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첫 직장으로 취업한 중국 식당에서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행복한 시간은 지나가고…

손이 느려 주방과 홀에서 빨리 일하지 못하는 나를 보는 시선이 차가워졌고, 조그만 실수에도 육두문자를 쏟아 냈다. 부모님은 내가 한국으로 온 뒤 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셨다. 자녀들 대학 학비를 벌고 나니 병을 얻으신 것이다.

한국 어디에도 나를 위로해 주고 함께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신이 많이 위축되었다. 감기와 몸살로 직장에 며칠 무단결근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첫 직장을 잃었다.

두 번째 직장은 종로에 입점한 국수집이었다. 당시 갑자기 불어닥친 메르스 여파로 손님이 급감했다. 사장님은 나에게 휴직을 제안했고, 메르스가 잠잠해질 무렵 다시 복직했지만 경기가 여전히 좋지 않아 또 한 번 직장을 잃게 되었다.

꿈 많던 30대 초반인 내가 한국에서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가?' 매일 수백 번도 더 했던 질문이다.

직업소개소는 알선비를 미리 챙겨 간다. 첫 주에는 3~4일 정도 일당을 받는 자리를 소개해 주다가, 둘째 주에는 1일, 셋째 주부터는 전화조차 끊겼다. 매달 백만 원씩 중국에 송금하고 나머지 돈으로 살아갔다.

직장 구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송금은 고사하고 고시원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한 주에 한 번 일을 구하기도 힘들어졌고, 거리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 갔다.

'지금 이 상태로 중국에 돌아갈 수 없다. 그 누구도 나를 반겨 주지 않을 거고 이런 실패한 인생을 내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거리에서 지내다 교회를 만나다

거리 생활을 시작하고 7개월이 지났다. 한강에도 가봤고, 자해 시도도 해 봤다. 어떻게든 이 비참한 생활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한 노숙인을 만났고, 굶주린 배를 채워 줄 교회 급식 장소를 소개받아 함께 가게 되었다.

'나와 같은 사람도 도와주는 분이 계시구나.'

오랜 시간 가져 보지 못한 따뜻한 느낌이 가슴을 채웠다. 지금 나는 고시원에서 지내며 노숙인 사역을 돕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