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다루끼, 호네, 다데, 요꼬, 우라, 데시라, 빠대. 어떤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황준영 씨(32)는 순식간에 처음 듣는 단어들을 쏟아 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일본어처럼 들리는 이 단어들은 황 씨가 평소 현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9월 21일 마포구 연남동에서 황준영 씨를 어렵사리 만났다. 추석 전에 잡았던 약속이지만, 황준영 씨 일정이 계속 이어져 추석이 지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일이 많을 때는 두 달 내내 주중, 주말 없이 공사 현장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이런 생활을 1년 반 정도 하고 있다.

그는 건축 일을 한다. 돌이 깔린 바닥을 다지고 나무 뼈대를 세우고 서까래를 얹어 집을 만든다. 카페나 가정집 리모델링도 한다. 고객 요구에 따라 콘크리트와 나무로 계단을 만들고, 단층 방을 복층으로 바꾼다. 벽을 부숴서 새로 만든다. 손만 대면 새로운 게 생긴다.

'아멘 맨', 전도사 내려놓다

황 씨는 전도사 출신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중3 때 성령을 체험한 후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을 위한 삶 = 목사'라고 생각했다. 서원 후 출신 교단 학교인 감신대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그는 '아멘 맨'으로 통했다. 설교를 들을 때 아멘을 많이 해서다. 선배들은 그런 그를 귀여워했다. 때가 되자 황 씨도 다른 신학생들처럼 전도사 활동을 시작했다. 3년 정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교회에서 파트 전도사로, 2년 정도 학생부 간사로 있었다. 재밌게 사역했다. 그러나 늘 마음 한 구석에 질문이 있었다.

'목사가 될 수 있을까.' '옳은 선택일까?'

▲ 20대에 전도사로 활동했던 황준영 씨. 지금은 집을 짓는 일을 한다. 그는 왜 사역을 그만뒀을까. ⓒ뉴스앤조이 최유리

회의감이 있었다. 동기들은 시험 때 커닝하기 바빴다. 교수가 여러분을 믿는다고 말하며 강의실에서 나가자마자, 절반이 책을 꺼내 답안지를 썼다. 커닝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깊은 고민 없이 정해진 텍스트를 가지고 강단에 올랐다.

설교는 교인들 삶과 거리가 멀었다. 영적인 이야기가 주였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교인 삶과 직결되는 이야기지만, 설교에서 이런 부분은 다뤄지지 않았다.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파트 전도사로 일할 때는 스스로가 부품으로 느껴졌다. 알바생과 다를 바 없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개인의 몫이었다. 케어는 없었다. 사역이 끝나는 주일 저녁엔 늘 다른 전도사들과 치킨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교단 소식도 어두웠다. 같은 감리교인데도 출신 학교에 따라 파가 갈렸다. 감독회장이 되기 위해 돈을 내고, 서로 소송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열심히 사역하는 목사도 있겠지만 교단의 행보는 신뢰가 되지 않았다.

미래도 깜깜했다. 감리교는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수련목 코스를 밟아야 한다. 지금은 없어진 제도지만 부목사로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하면 사람들이 꺼리는 시골 교회에 가거나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 년에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만 몇 백인데, 모든 사람이 임지를 찾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같이 학교를 다닌 여학생들 미래는 더 암담해 보였다.

"나 한 사람이 목사 된다고 무슨 변화가 생길까 싶었어요. 그 구조 속에 들어가면 나도 똑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 편승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제가 알던 가치에 반하는 일이었어요. 대학 공부했으니까 또는 새로운 길을 찾기 막막하니까 일단 가는 건 아니었죠. 결국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택배 일부터 건축 일까지, 고되지만 즐겁다

대학원 진학을 접은 후, 택배 일을 시작했다. 교회 집사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아침 7시에 시작해 저녁 10시에 끝났다. 하루에 200~300개를 배송해야 했다. 주택가 같은 경우 1시간에 15개 정도 배달할 수 있었다.

단순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송장 및 물건 정리, 배송지에 맞춰 탑차에 택배물 싣기, 배달 후 정산까지 하루 안에 모두 끝내야 했다. 난감한 일도 많았다. 배송을 마쳤는데 물건을 못 받았다 연락이 오기도 하고, 김치가 터져 직접 포장을 한 적도 있다. 그렇게 2년을 일했다. 몸이 지쳐 더 일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결혼을 했다. 전세로 집을 얻었는데 고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사람을 부르려니 다 돈이었다. 결국 스스로 고치기 시작했다. 신혼집에 쓸 물건을 만드는 게 계기가 됐다. 일에 재미를 느껴 고용노동청에서 건축 일을 배웠다.

지금은 팀에 속해 일한다. 필요한 공구를 미리 준비하고 옆에서 동료들을 돕는다. 처음에는 소음이 많은 현장이라 말귀를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하루 업무를 알려 주거나 지시하지 않아 뻘쭘해 하기도 어려 번.

어깨너머로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뭐가 필요한지 안다. 손발이 맞을 때 묘한 희열도 느낀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완성되어가는 집을 보면서 성취감도 생긴다.

"처음에는 일을 잘 모르니 실수가 많았어요. 천장을 뚫는데 갑자기 물이 막 쏟아지는 거에요. 위에 수도관이 있었는데 제가 그걸 몰랐던 거죠. 다행이 동료들이 그걸로 뭐라고 하진 않으셨어요. 현장에 있다 보니 거친 부분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 황 씨는 땡볕에서 일한다. 그늘막이 없는 일터에서 일한 지 1년 반. 몸이 고되긴 하지만 사역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다. 교회 부품처럼 일하던 전도사 시절보다 만족감이 크다. (사진 제공 황준영)

삶이 부재한 설교하던 때보다 지금이 좋다

3년 반 정도 교회가 아닌 사회에서 일하고 있는 황준영 씨. 그새 얼굴이 까맣게 타고 손목 수술도 한 차례 했다. 고된 일을 하다 보면 교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을까. 그는 단호하게 없다고 답했다.

전도사로 일할 때보다 현재가 더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삶이 부재한 설교를 할 때보다 신앙 없는 사람들 속에서 신앙인의 삶을 지키는 게 더 좋다. 무책임한 설교와 목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기에, 다시 목회할 생각은 없다.

대신 그는 처음 다짐처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다. 동료들은 황 씨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안다. 늘 식사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마감이 다가오면 교회에 가지 못할 때도 많지만 불평은 하지 않는다. 그저 성실히 일하고 게으름 피우지 않는다. 가끔은 사장님이 황 씨에게 일을 빼 줄 테니 교회 다녀 오라고 배려해 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황준영 씨에게 진로를 고민하는 신학생들에게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목사나 전도사가 되기 전에 사역의 방향성을 고민하라고 당부했다. 교회 사역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혹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홀로 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조금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다시 사역지로 갔을 때 교인들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라 했다.

"먼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목사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잘못된 설교로 여러 교인을 망칠 수도 있어요. 노인 분들은 목회자 눈빛 하나로 웃기도 울기도 해요.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런 고려를 충분히 하고 갔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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