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표절 문제를 논의하는 공론의 장이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열렸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는 9월 23일 총신대학교에서 '표절, 그 불편한 현실'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신학자들의 표절 논란이 불거진 지 1년 반이 지났다. 내로라하는 교수들이 얽히며 여러 책이 절판됐고, 독자와 제자들에게 고개를 숙인 사람도 나왔다. 그러나 의혹을 부인한 사람이 더 많다. 문제를 꺼낸 이에게 민·형사소송을 제기하고 법정 싸움에 돌입한 신학자도 있다.

논란 때마다 "교수들이 일선에 나서지 않고 뭐 하느냐"는 질책이 빈번하게 나왔다. 각종 좌담과 포럼에서 학회 등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어졌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곳은 드물었다. 이런 맥락에서 9월 24일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포럼은 현직 신학 교수들이 처음으로 표절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주관한 이날 포럼 사회자로 회장 심상법 교수(총신대)가 나섰다. 남형두 교수(연세대), 김은수 교수(백석대)가 발표를, 박종석 교수(서울신대)와 고석표 기자(CBS)가 토론을 맡았다. 학회 회원 교수와 언론사 기자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자기 표절, 중복 게재 여부 핵심은 연구 기여도와 독창성

이날 포럼은 전반적으로 자기 표절과 중복 게재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꾸준히 연구 결과를 생산해야 하는 교수들로서는 앞선 저작물을 최신 연구에 어디까지 반영해야 표절 논란을 피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주제 발표를 맡은 저작권법 전문가 남형두 교수는 자신의 저서 <표절론>(현암사)을 중심으로 자기 표절과 중복 게재에 대해 설명했다. 남 교수는 학자가 자신의 선행 연구 결과를 가져다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학자들에게는 자기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매번 발전시켜 나가는 게 학문의 과정이고요. 제가 학문의 일반성으로 적용될 수 있는 <표절론>을 썼습니다. 그런데 만일 개신교계와 관련된 저작권 관련 책을 쓴다면 <표절론>에 있는 일반론적 얘기를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라는 건 학문을 하지 말라는 얘기와 같습니다."

남 교수가 제시한 지점은 독창성과 기여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먼저 쓴 책의 90%를 가져다 쓰고 새로운 내용은 10%만 썼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자기 표절로 볼 수는 없다. 만일 10%가 결과물을 독창적으로 만든다면 그 연구를 고유하게 만들기에 자기 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나머지 90%에서 자신의 선행 연구를 인용했다는 표기는 해야 한다.

▲ 남형두 교수는 무조건적으로 표절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출처를 밝히는 것을 전제로, 자신이 썼던 글을 다시 사용했을 때 새 연구가 나올 수 있다면 자기 표절이나 중복 게재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작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편집위원 김은수 교수(백석대)는 한 사람이 꾸준히 연구하다 보면 자기 연속성과 자기 발전성이 생긴다고 했다. 학자들은 앞선 연구 결과의 연장선상에서 더 깊고 고유한 연구를 하기에 연속성과 발전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타자를 위한 철학'이라는 한 가지 주제만을 평생 연구하면서 계속 심화된 연구물들을 내놓았는데, 그것을 자기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계속 새로운 적용과 심화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신학은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있고 교리적 표준과 전통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특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성경이나 교리적 표준을 벗어나서 너무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면 이단이 된다는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 내용 중복이 없는 연구 결과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 김은수 교수는 표절 문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시안을 만들어 제시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게"

이어진 토론 시간에는 실제적인 표절 방지 방안을 논의했다. 토론을 맡은 박종석 교수는 강력한 징계로 표절을 할 수 없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회 간 공조와 연대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사람이 나쁜 짓 하는 것을 막으려면 규정만으로는 안 되고 징계를 현실성 있게 해야 합니다. 학회끼리 연대해서 표절이 걸렸을 경우 빼도 박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학교와 학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 작업해야 합니다."

남형두 교수는 주요 대학이 구체적인 지침을 개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표적으로 표절 시효를 5년으로 규정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학위 논문 표절한 어떤 사람이 장관 한 번 하려면 5년 기다리면 된다는 말인가. 학문이 그럴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남 교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표절 문제 처리 과정은, 전적으로 관계된 학교나 기관에서 외부 전문가와 함께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이다. 학교의 명예와 명운을 걸고, 자기 구성원이라고 봐주지 않고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진행될 동안에는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대신 최종적으로 표절로 판명될 경우 가차 없이 퇴출해야 한다고 했다.

이상적인 절차지만, 생태계가 크지 않은 한국 신학계에서 자정 능력을 얼마큼 기대할 수 있느냐, 실효성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일례로 총신대는 표절 논란에 얽혔던 소속 교수에 대해 동료 교수들이 "문제없다"는 성명을 냈다. 백석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또한 소속 교수의 손을 들어 줬다.

오정현 목사 논문 표절 파동 당시에는 포체프스트룸대학이 입장을 바꿔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물론 학교 측은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엄정하게 사건을 판단했다는 입장이지만, 공정성 논란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박종석 교수는 "어떤 사람은 표절로 징계받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권력자와 친분 있으면 봐주고, 사이가 안 좋으면 꼬치꼬치 캐묻는다. 표절 문제가 정치적 타깃을 공격하는 방식으로도 쓰여 답답한 구석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학내 분규를 겪는 일부 대학에서는 반대편에 서 있는 교수들을 공격하기 위해 논문 표절을 자체적으로 검증하기도 해, 논란이 되기도 하다.

▲ 표절에 대한 엄정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박종석 교수는 학회 간, 학교 간 공조로 표절한 사람을 징계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부끄러운 논의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논의

참석자들은 표절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자리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종석 교수는 "이 논의는 누군가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들이 표절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차원에서 더욱 논의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형두 교수 또한 "표절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분야 학문 발전이 뒤따른다. 표절 논의라는 것을 부끄럽고 감출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심상법 교수(총신대)는 앞으로 책임 있는 자세로 표절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학계가 뭘 하느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동료 문제를 봐주기 식으로 넘기고 있다는 비판에 학자들의 존엄성과 위상, 양심이 많이 손상된 것 같다. 학자들의 저술 활동이 위축되지 않고 더 공부하는 계기로 만들고 싶고, 우리 학회가 그 역할을 선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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