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부끄러움

성서에서는 최초의 수치심, 부끄러움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최초를 떠올리게 하는 성서 속 이야기로 에덴동산을 빼놓을 수 없다. 최초의 인간으로 알려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조성해 놓은 순수가 살아 숨 쉬는 에덴동산의 아늑함을 스스로 박차 버리는 계기가 등장한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부끄러움이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을 가질 수 없었던 상태와 다르게 이른바 선악과 참여 사건이 벌어진 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무화과나무로 그들의 치부를 가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에피소드가 기독교의 원형적인 신 인식으로 자리 잡아서일까. 치부를 가린 행동, 다시 말해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대처한 행위 자체에 대한 이해나 의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보다는 부끄러움을 자각할 수 없었던 에덴동산의 원형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경우가 다분하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의 원형이 회복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불순종으로 인한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곧바로 성서 전체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환해 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그 희생의 의미를 뼈아프게 반복 재생산한다. 신앙의 눈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보배로운 피, 보혈이란 관점으로 집중된다.

불순종으로 인해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추방된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피 흘림이란 강고한 한 현상에 압도되어 보혈의 능력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구령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환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강조되는 건 불순종한 인간이 보여 준 행위의 중심과 뼈대, 둘 모두를 지배한 부끄러움을 향한 말소 욕구다. 불순종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시작되었는데, 그 불순종을 예수가 십자가 보혈로 씻어 내셨으니 더 이상 부끄러움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책임질 필요성에 대해서는 점점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추방된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존재자는 이전 시원(始原)의 기쁨과 빗대어 말할 수 있는 부끄러움의 망각이 자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묻고 싶다. 과연 부끄러웠기 때문에 치부를 가린 것으로만 봐야 하는 걸까. 그 부끄러움이 인류 불순종의 대체제로 이해되는 하나님 아들의 희생, 곧 십자가의 보혈로 모두 씻겨진 뒤, 그 은혜의 지속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의 출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걸까.

필자는 부끄러움의 주제를 신학적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려놓으려는 의도는 없다. 신학적 문제 제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부끄러움의 인지를 단순히 창세기 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건과 동일한 의미로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수치심, 부끄러움이란 의미는 개인적, 사회적, 심리적 등 매우 다양한 층위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왜 부끄러움의 망각이란 주제와 신학적 테마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함께 보려는 걸까.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부끄러움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태도에서 드러난 무의식적 야만, 그 근원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수치심

말 그대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그 주제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밀접함과 파탄적 균열에 대한 극적 대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하나님과 최초의 인간 사이에 형성된 밀접함, 태고 이전, 생명 원형의 고고한 들끓음 속에서는 온전한 신성의 공존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지속되는 신비의 자장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는 온전한 정일(靜逸)에 사로잡힌다. 정일의 압도가 부끄러움을 잊게 만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엄밀히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부끄러움과 수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이 파탄적 균열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것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고조에 이르는 에덴동산 내부에서 말이다. 이러한 균열의 심대한 결과가 부끄러움과 수치의 발견이었다는 게 성서가 강조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인간이 마땅히 느껴야 할 신적 거룩의 한 자극이었던 부끄러움이 신성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자장(磁場) 밖으로 탈각(脫却)되었다는 두려움과 함께 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움의 발견은 부끄러움을 모르다가 알게 되었다는 맥락만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자극을 거룩한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로 지속해 오던 시원의 결속 관계가 끊어진 것에 대한 극한의 두려움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로 전율하는 인간의 극한적 두려움, 그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온 영적 혁명가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과 공포를 향한 대가 없는 상쇄, 극적 화해, 하나님 생명 자장의 필연적 지속을 역설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전 시대, 다가오는 시대,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부끄러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부끄러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망각되어야만 하는 건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숨어 있다. 과연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에 대해서

원형의 관점에서 본 부끄러움은 하나님과의 성스러운 교감 속에서 필연적인 인간다움의 작동 기제로 부각된다. 인간은 자신이 벌이는 행동의 행간마다 도리 없이 스며든 탐욕과 이기심, 광기에 경도된 종교심을 자각해 낼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다. 그 자각의 가능성이 곧바로 부끄러움으로 연결된다.

자신이 자행해온 탐욕과 이기심, 끝 모를 자기애가 타인과 공동체를 얼마나 아프고 힘들게 해 왔는지를 자각하는 부끄러움 말이다. 이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이 하나님이란 생명 울타리 안에서 벌어질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의 주체적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인간은 이 부끄러움의 자각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움의 자각은 행위자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반성과 복기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한다. 반성의 시간을 허용함으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와 희생이 감당할 만 한 수위를 넘어선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지속되는 부끄러움이라면 인내할 수 있다고 성서는 밝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은 반드시 자각되어야만 한다.

더욱이 교회는 부끄러움과 대좌하는 용기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원해 내야만 한다. 교회의 존재 가치는 부끄러움을 두려움의 다른 이름인 망각의 괴물에게 헌납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기억해 내어 반성과 복기의 시간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견뎌내는 최후의 보루이어야 하는 것이다.

부러 기독교적 사관을 도입하지 않아도 인류의 역사는 힘과 권력, 쟁투의 역사였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짓누르고 차별과 억압, 편견과 종교적 광기로 인한 학살의 징후로 가득한 피의 역사임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피의 역사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자각해야 하는 걸까. 근원적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든 인간의 부끄러움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부끄러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반성과 복기의 도약대로 보고 있는가. 불행히도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주어져 있는 듯 하다.

부끄러움을 잊은 교회

근현대사를 겪어낸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한국교회의 존립과 지속 과정에서 벌어진 모순과 부조리를 잊어선 안 되는 것이다. 때론 이념의 시녀로, 권력의 주구로, 이도 저도 아님 타계주의적 종말론으로 치닫는 경향으로부터 한국교회는 한 발자국도 자유롭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동북아시아의 근현대사 자체가 격동했던 것처럼 한국교회 역시 비겁했으며 불의에 침묵했다. 가진 자의 편에 서서 권력가의 편에서 설교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른바 부끄러움의 역사를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놀랍게도 건강한 그늘이라 할 수 있는 교회사의 명암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복기한 뒤 청산하려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를 교회가 스스로 벌여 놓은 부끄러움의 굿판을 망각하려는 또 다른 굿판의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려 한다. 쌓여만 가는 구조적 죄악과 모순에 대해 한국교회는 더 확실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세상 법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며 스스로 부끄러움을 지우는 데 앞장서는 홍위병 육성에만 바쁘다. 교회는 이미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인데, 이게 모두 영적인 문제라며, 사회가 이야기하는 양심과 하나님이 말하는 복음은 다르다며, 복음의 주술적 기능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다.

이렇게 형해만 남은 교회, 한 줌의 반성도, 성찰도 없는 교회가 굶주린 늑대가 되어 물어뜯는 인질은 누구인가. 부끄러움을 자각하려고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상실의 영혼들이다. 망각을 가르치는 교회,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를 주술의 차원으로 내려앉힌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포악스럽게 입을 벌린 그물에 상실의 영혼들이 포박된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탈주를 선포하고 격려해야 할 교회가 가난한 자, 병든 자, 우는 자들의 순수 정신,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려는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약탈의 선봉에 서버린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아는 것, 견딜 수 없어 신음하는 맨얼굴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설령 그러한 현실 인식과 고백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와해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결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다르게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살펴보면 답은 분명하다. 부끄러움을 잊는 것이 아닌 부끄러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로 인해 모든 기득권이 박탈된다 하더라도 새로운 생명의 길, 새로운 지평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용기를 긍정했던 것이 예수의 길이었다. 그 길은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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