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편백마을에는 ㄱ자 형태로 지은 한옥 교회가 있다. 두동교회(강동훈 목사)다. 1929년, 교인들은 남녀가 유별한 시대에서 같이 예배해야 하니 건물을 ㄱ자 형태로 지었다. 출입구도 두개다. ㄱ자 꼭짓점에 강대상이 있어 설교자는 양쪽을 보며 말씀을 전한다.

9월 23일, 세계종교평화축제 나흘째 날. 종교 사적지 답사 '이웃 종교 돌아보기'에 참가했다. 처음 찾은 곳은 두동교회. 안내를 맡은 나종우 교수(원광대 사학과)를 비롯해 참석자 40여 명과 관광버스를 타고 전북 익산 일대를 돌았다. 두동교회에서 시작해 원불교중앙총부, 나바위성당을 방문했다.

▲ 참가자들이 두동교회 박정호 원로장로(92) 설명을 듣고 있다. 오른쪽 한옥 건물이 두동교회 옛 본당. ⓒ뉴스앤조이 박요셉

누른 빛이 감도는 들판 사이로 한참을 가니 두동교회가 나타났다. 빨간 벽돌로 지은 2층짜리 신식 건물이다. 'ㄱ자형 한옥 건물은 어디에….' 교회가 예상했던 모습과 달라 참가자들이 당황했다. 자세히 보니 교회 옆 공터에 '등 굽은 소나무'가 조그만 한옥을 지키고 있다. 두동교회다.

오늘날 ㄱ자형 교회는 전국에 두 곳밖에 없다. 두동교회 박정호 장로(92)는 교회가 있을 당시만 해도 전북 지역에 ㄱ자형 교회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두동교회와 전북 김제 금산교회밖에 안 남았다.

두동교회는 1923년 설립됐다. 나종우 교수는 당시 시대상을 소개하면서 기독교가 이 지역에 발흥한 이유가 시대상과 관련 깊다고 설명했다.

1920년대는 일본이 호남 지역 착취를 본격화할 때다. 땅과 곡식을 수탈하기 위해 전국에 수리조합을 만들었다. 전주, 군산에도 수리조합이 생겨 조선인 땅을 강탈했다. 수리조합은 조선인 앞잡이를 내세웠다. "땅을 팔면 목돈도 생기고 농사도 계속 지을 수 있다. 나오는 곡식은 소작료로 일부만 떼고 나머지는 다 당신들 것이다."

감언이설에 속은 농민들이 대거 땅을 팔았다. 일본인 농장주가 소작료로 장난치기 전까진 이들은 자신들이 겪을 고통을 예상하지 못했다. 호남에서 난 곡식은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넘어갔다.

▲본당 형태가 ㄱ자형이다. 설교자는 양쪽을 보면서 설교할 수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고통과 절망에 허덕이던 농민들 사이에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됐다. 해리슨 선교사가 전도해 기독교인이 된 박재신이 자기 땅에 예배당을 마련한 게 두동교회 시작이다. ㄱ자형 예배당은 1929년 지어졌다.

교인들 사이에서는 교회를 만들 때 하나님이 도왔다는 이야기가 돈다. 안면도 소나무가 마을 앞 포구까지 흘러온 일 때문이다. 안면도 소나무는 주로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한다. 목재를 실은 배가 풍랑에 뒤집혀, 소나무가 조류를 타고 마을까지 왔을 거라고 사람들은 추측했다. 교인들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목재들은 서까래로 쓰였다.

두동교회 옛 본당을 둘러봤다. 90여 년이 지났지만 나무 기둥은 균열 없이 튼튼히 서 있었다. 장마루 바닥 위를 지나갈 때 '삐그덕' 소리가 났다. 바닥 한쪽 구석에는 마루 밑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달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몸을 숨기기 위해서다.

당시 교회는 교육기관 역할도 했다. 조선인 선생이 일본 경찰 몰래 조선 노래, 말을 가르쳤다. 들판 사이로 순사가 칼을 차고 나타나면 선생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그러면 재빨리 책상에 있는 국어(일본어) 책을 꺼내 "이찌, 니, 산, 시, 고!"를 외쳤다.

현재, 두동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한국교회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전북 익산에 있는 원불교중앙총부 입구. 이곳은 소태산 대종사가 전법한 곳이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원불교 탄생한 원불교중앙총부

다음으로 찾은 곳은 전북 익산 원불교중앙총부. 이곳은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가 교법을 정리해 2대·3대 종사와 후학들을 가르친 곳이다. 원불교 입법·행정·사법 기관이 모두 모여 있고, 대종사성탑·대종사성비 등 사적지가 보존돼 있다.

참가자들은 김명화 공동집행위원장 안내를 받으며 총부 내부를 둘러 봤다. 5대 경산 종사가 시무하는 본원실과 옛 대종사가 제자를 길러낸 구조실, 1·2·3대 종사가 수련을 쌓은 공회당을 살폈다. 건물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일본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단층으로 된 목재 건물로, 검소하고 소박한 원불교 정신이 반영됐다.

원불교역사박물관에서 원불교를 소개하는 15분짜리 영상을 시청했다. 개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중요시 하는 것처럼, 원불교는 은혜를 중시한다. 천지·부모·동포·법률에게 받은 은혜(사은)를 세상에 베풀고 나누는 삶을 강조한다.

원불교는 생활 종교를 표방한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선을 실천하는 삶을 가르친다. '하는 일마다 불공드리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처처불상 사사불공)', '언제 어디서든 선을 행하는 것(무시선 무처선)'이 대표적 가르침이다.

▲한 참석자가 공회당 건물을 보고 있다. 원불교 초기 건물들은 일본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100년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바위성당

전북 익산 망성면 화산리. 1845년, 한국 최초 순교자 김대건 신부가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고 한국에 입국했을 때 처음 머문 나바위성당(김경수 요한 신부)이 있다. 김대건 신부가 배를 댄 황산포는 일본이 간척지로 만들어 지금은 논이 됐다.

나바위성당은 1907년 지어졌다. 1880년대, 이곳은 천주교 교인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소가 수십 개 있었다. 1897년 천주교대구교구는 초대 주임으로 베르모렐 신부(정약슬 요셉 신부)를 파견했고, 베르모렐 신부는 초가집을 얻어 나바위성당 문을 열었다. 교인들과 모은 돈으로 지금의 나바위성당 본당을 신축하며 보통학교(현재 초등학교), 사제관도 함께 지었다.

벽돌로 지어진 본당은 동서양 양식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종탑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뒤로 길게 늘어진 예배당은 한옥 양식이다. 신축 당시에는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에서 가져온 종이 있었지만, 지금 종탑은 텅 비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군수물자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예배당 안을 살폈다. 한때, 이곳에도 중앙에 가림막이 설치돼 있었다. 두동교회처럼 남녀가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서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가림막을 세울 때 사용했던 기둥들이 벌거벗은 채 중앙에 서 있다. 뒤쪽 출입구 옆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당시에는 성가대석이 맨 뒤쪽 2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 고딕 양식과 한옥 양식을 모두 갖고 있는 나바위성당 ⓒ뉴스앤조이 박요셉

김경수 신부는 한국전쟁 당시에도 미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북한군이 익산 일대로 몰려온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주민들은 신부와 수녀들을 화산리에서 멀리 떨어진 익산 고산으로 피신시켰다. 신부는 주민들이 걱정돼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 주민들은 북한군에게 원하는 음식과 물자를 지원할 테니, 미사는 계속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득했다. 북한군은 총 몇 발만 건물 벽에다 쏘고 철수했다.

전쟁 후유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릴 때, 나바위성당은 피난처였다. 음식을 제공하고 거처가 없는 사람들에게 잠잘 곳을 내줬다. 수녀들에게 의료 지식이 있어 간단한 진료도 진행했다. 나바위성당은 1960년까지 시약소를 운영했다.

한때, 나바위성당은 3,500명이 출석할 정도로 규모 있는 성당이었다. 지금은 대다수가 분가해 교인 200여 명이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 나바위성당 내부 모습. 중앙 기둥은 가림막을 설치하는 데 쓰였다(오른쪽 사진). ⓒ뉴스앤조이 박요셉

프로그램을 마치고 참가자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한 원불교 교인은 원불교에 좋은 점이 있는 것처럼 다른 종교에도 장점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예배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이틀 내내 행사에 참석했던 한 가톨릭 교인은 답사를 하며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첫째 날 사찰에 방문해 설법을 들었는데, 설법 내용이 좋아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답사를 안내한 나종우 교수는 "종교는 거울과 같다. 다른 종교를 통해 내 종교를 보고 나를 돌아볼 수 있다. 나는 어떤 세계관, 신앙을 바탕으로 어떤 삶을 사는지 깨달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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