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어떤 이가 평생 일궈 온 생각의 흐름을 한 어구로 요약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중 하나다. 사상이 단조롭고 단순해서 손쉽게 정리되는 경우거나, 한 가지를 깊게 파서 일가(一家)를 이룬 경우다. 박영선 원로목사(남포교회)는 후자다.

박영선 목사 이름 앞에는 '하나님의 열심을 설파한 설교자'라는 수식이 붙는다. 박 목사의 요한복음 강해를 엮은 <위로부터>·<어찌하여>(남포교회출판부) 책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나님께 열심'이라는 구호에 몸부림치던 시절, 박영선 목사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주제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에 깊이 천착해 왔다. 그가 믿음의 주체와 원동력을 신자가 아닌 하나님으로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만을 끈질기게 붙들어 온 신학함의 결과이다."

▲ <위로부터>·<어찌하여> / 박영선 지음 / 남포교회출판부 펴냄 / 200쪽·196쪽 / 각 1만 원 ⓒ뉴스앤조이 강동석

<위로부터>·<어찌하여>는 각각 요한복음 1-3장, 4-5장 강해를 담고 있다. 박영선 목사는 30년간 남포교회에서 설교 사역을 해 왔다. 그가 1985년 1월 개척한 남포교회에서 처음 강해한 성경 본문이 요한복음이다. 남서울교회에서 설교했던 1984년 3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4년 동안 요한복음을 강해했다. 남포교회출판부는 30년 전 그때 그 설교를 책으로 엮었다. 요한복음 6장 이후 내용은 계속 출간될 예정이다.

약간 정리가 안 된 느낌이 들기는 한다. 하나 이때 설교는 30년 세월이 켜켜이 쌓인 오늘날의 박영선 목사 설교 메시지와 맥을 같이한다. 구원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횡행했던 1984년 한국교회 현실과 2016년 한국교회 현실은 여전히 겹치는 대목이 있다. 박 목사가 걸어온 길과 아직도 이와 같은 메시지가 설파되어야 하는 현실은 사뭇 대조적으로 다가온다.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나, 아래 두 구절은 박 목사가 비판하는 율법주의적 신앙관과 박 목사가 전하는 신앙의 본질에 천착한 신앙관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나마 드러낸다. 그가 전하는 설교 메시지 기저에는 자기 의나 율법주의적 신앙이 아닌 '하나님 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10:1-2)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이사야 9장 7절은 신앙의 능동성이 하나님께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동시에, 하나님나라라는 큰 역사가 하나님 경륜 속에서 주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드러낸다.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박영선 목사의 해석 틀에 따르면 개혁주의 신학에 기반하고 있는, 종말론적이면서도 지극히 신론적인 진술이다. 이 같은 이해가 그의 요한복음 강해 전반에 깔려 있다.

요한복음을 다루는 두 강해 설교집 제목(<위로부터>·<어찌하여>)은 짧고 강렬하게 그 신학적 메시지를 지시한다. 서문(序文) 바로 직전에 나오는 다음 두 구절이 제목에 대한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요 3:31),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책 표지 중앙에는 각각 "The one who comes from above", "How come you, a Jew, are asking m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하나님의 능동성과 신자의 수동성

책을 출간한 남포교회출판부는, <위로부터>를 펴내며 덧붙인 글에서 요한복음이 '너희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느냐?'라는 복음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질문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믿음에 대한 주권을 가진 이가 전적으로 위로부터 오시는 분, 만물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구원 문제나 신앙의 기초, 신앙의 성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 소관이라는 지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택할 권리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끊어 내어 구원으로 붙잡아 가기 위한 것입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신앙이 성장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데에 하나의 시금석이 됩니다." (<위로부터>, 132쪽)

"구원은 지적 동의로, 감정적 항복으로, 의지적 결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언제 어떻게 왜 받았는지 모릅니다. 지적 동의나 감정적 항복이나 의지적 결단은 구원을 얻어 새롭게 출생한 자가 자기의 출생에 대해 인식하는 이차적 과정입니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는 나중에서야 생기는 이런 인식을 조건이라고 여겨서 자꾸 처음으로 돌아가 구원 얻을 때에 자기가 이 조건을 갖췄었는지 고민합니다." (<어찌하여>, 58쪽)

박 목사 말이 당연한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별것 아닌 지적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가 신앙적 행위, '열심'을 내는 것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상태를 확인하는 일에만 집착하게 된다. 신앙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무엇보다 겉으로만 나타나는 행위로 다른 이의 신앙까지 쉽게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어찌하여>에서 핵심 성구로 제시하는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의 물음은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을 함의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예수께 물을 달라는 요청조차 할 수 없는, '자격 없는 존재'라는 지적이다.

요한복음 3장 31절이 하나님의 하나님 됨에 대한 인식을 품고 있다면, 요한복음 4장 9절은 인간의 인간 됨에 대한 인식을 품고 있다. '어찌하여'라는 한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의 무력함을 내포한다.

박영선 목사는 요한복음 4장을 풀면서 참다운 신자의 조건에 대해 말한다. 그는 신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줄 만한 존재가 못 된다고 지적한다. 신자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수동적 존재고, 그것이 신자 됨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뭔가 '열심'을 내어서 구원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 은혜에 대한 사무치는 깨달음이 성숙한 신앙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는 기초가 된다.

"우리는 누구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어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야 했습니다. (중략) 우리가 요구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여 우리에게 보내신 분입니다. 그분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대속하셨습니다." (<어찌하여>, 193쪽)

박 목사는 내가 무언가를 해 냈기 때문에, 신앙적 열심을 하나님 앞에 내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언가 해 주어야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깨뜨린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순종하고 신앙하는 자리로 이끌어 냈다는 지적이다. 이는 다른 이를 판단하지 않고, 오롯이 은혜 속에 침잠하여 신자다운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하나님의 능동성, 신자의 수동성을 강조하는 박영선 목사의 어법은 지나치게 '행위'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생각되는 지점도 있다. 물론 아예 무위로 돌리지는 않는다. 순종이나 신앙 행위보다 선행되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되짚는다는 점에서 신자의 경건 생활이나 영성을 북돋운다. 얼핏 본질과 행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열심'에서 격발되는 복음의 근본성이 갖고 있는 무게중심에 주목한다. 아래 진술을 보라.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하셨고 그 일을 위해 주께서 친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심령을 붙잡아 흔들고 씨름하여 한 영혼, 한 영혼씩 항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시기까지 우리를 찾아오셨고 간섭하시며 지금도 계속 그렇게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어찌하여>, 103쪽)

한계점이 없지는 않다. 박 목사는 집회 참석, 예배나 봉사 등을 모든 신앙 조건으로 판단하고, 소위 '영적인 일'이나 외적 행위에 힘을 쏟는 것을 전부라 여기는 신앙관을 바로잡는 데 치중한다. 이것은 일견 중요한 부분이다. 문제는 구원 그 이후 신앙 행위와 순종의 방향은 제시했으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박 목사는 구원 문제에 지나치게 천착하고 있다. (물론 어떤 신자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신자가 기초해야 할 신앙의 근본성을 고려할 때는 두 책이 가지고 있는 함의, 의의에 동의를 표하는 바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