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숲비품과일 유영춘 목사는 매주 월요일 서울 마곡지구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에서 과일을 판다. 과일 판매는 예약제로 운영된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오전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운 게 비가 올 성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오가 되자 소나기가 쏴-하고 한바탕 내렸다. 9월 8일,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과일 장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장을 차리고, 네이버 밴드 회원 3,500여 명을 보유한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약속 장소는 손님들로 북적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개의치 않았다.

"사과 (1박스에) 어떻게 해요?"
"청포도 2봉 예약했는데요"
"거봉도 팔아요?"
"어쩜 이렇게 사과가 달아요?!"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기웃한다.

"한 번 드셔 보세요."

파란 반팔티 입은 남자가 천도복숭아와 사과를 쪼개 손님들에게 전했다. 과일이 맛있다는 말에 남자가 생긋 웃었다. 푸른숲비품과일 대표 유영춘 목사였다.

밀려드는 손님에 정신이 없다. 다행히 유 목사 아내와 장모님이 일을 거들어 줘서 장사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자두·사과·배·고구마·거봉·포도·블루베리·바나나 향기가 주변을 감쌌다.

1톤 트럭 위에 '저걸 다 팔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과일 박스가 한가득 실려 있다. "다음 주면 추석인 걸 감안해 예약보다 조금 더 사왔어요. 남지 않을 거예요"라고 유 목사가 자신 있게 말했다.

한창 과일을 파는데, 또다시 소나기가 내렸다. 과일이 젖지 않도록 천막을 펼쳤다. "마침 잘됐네요." 유 목사는 아내에게 장사를 맡겼다. 함께 근처 카페로 이동해 인터뷰를 했다.

본래 꿈은 농부…청소년 좋아 사역까지

▲ 과일을 사기 위해 부천과 동두천에서 오는 회원도 있다. 유 목사가 만든 네이버 밴드 회원 수는 3,500명이 넘는다. 과일을 판매하는 중 한 회원과 통화 중인 유 목사 모습. ⓒ뉴스앤조이 이용필

얼굴과 팔다리가 까무스름한 게 꼭 농부처럼 보였다. 유 목사는 여름 장사를 하느라 타기도 했지만, 원래 까맣다고 웃으며 말했다. 유 목사 꿈은 농부였다. 조금 특별한 농부. 농사를 지으며 그곳에 집을 지어 고아, 장애 아동, 오갈 곳 없는 아이들과 살고 싶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청소년을 향한 연민이 컸다.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신학교를 선택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목회자가 되거나, 교회를 개척하고 싶다기보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사역 방향도 자연히 청소년에 가닿았다. 부교역자로 지내며 청소년 사역을 했다. 목표도 세웠다. 40살에 청소년 문화센터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39살이 됐을 때 하던 사역을 잠시 내려놓고, 문화센터 건립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후원과 도움이 절실했지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은 없었다. 유 목사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사역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라고 회상했다.

꿈은 잠시 미뤘다. 대신 아내가 어린이집 원장으로 있는 곳에서 2년간 '숲 체험 교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어린이집 교사를 그만두고, 실업 급여를 받으며 지낼 때였다.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비품 과일'(약간 정도 손상을 입었지만, 먹는데 지장 없는 과일)을 팔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얼떨결에 체리 5박스를 받았다.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인터넷에서 팔아 보자고 생각했다. 금방 동이 났다. 비품 과일이라 하지만 상태가 나쁘지 않았고, 가격도 저렴해 인기가 높았다. 체리 20박스를 추가로 가져와 팔았다. 30분 만에 완판(완전 판매)했다. 장사가 되는 느낌. 유 목사는 인터넷을 통해 과일을 판매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체리에 이어 골드키위를 팔았다. 보통 5~6kg에 4~5만 원가량 하는데 반값도 안 되게 팔았다. 유 목사는 "비품 중에 물러진 키위가 있어요. 사실 물러진 게 더 맛있어요. 싸고 맛도 있으니까 입소문이 쫙 퍼졌죠"라고 말했다.

결정타는 한 인터넷 카페에서 나왔다. 회원 10만 명이 참여하는 '부천맘' 카페에 푸른숲비품과일가게를 홍보하는 글이 오른 것. 유 목사가 만든 밴드 회원이 하룻밤 사이 100~200명씩 늘었다. 밴드에 가입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1,000명. 현재 유 목사는 밴드 5개를 운영하고 있다.

장사도 목회처럼, 깨끗하고 정직하게

▲ 예약한 손님에게 과일을 전달하고 있는 유 목사. ⓒ뉴스앤조이 이용필

과일 판매 시스템은 간단하다. 하루 전, 과일을 팔 시간과 장소, 상품 사진 등을 밴드에 상세하게 공지한다. 회원들은 어떤 과일을 얼마나 사겠다는 댓글을 단다. 월~금요일까지 서울과 부천을 오가며 장사한다. 토요일에는 떨이로 파는 이벤트도 진행한다.

어느 곳이든 장사가 잘되면 견제가 있게 마련이다. 유 목사와 같은 지역에서 과일을 파는 한 마트 사장은 '소음 공해', '통행 방해' 등을 이유로 수차례 경찰에 민원을 넣었다.

유 목사는 확성기를 사용하거나,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다. 통행이 불편하다는 지적에 아예 과일을 트럭에 쌓아 두고 판다. 어느 날 그것마저 문제 삼았다. 유 목사는 트럭을 몰고 외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 뒤로 차량 7~8대가 따라오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과일을 사려는 회원들이었다.

하루는 건달로 보이는 사람이 찾아와 "누구 마음대로 장사하느냐", "신고하고 하는 거냐"며 시비를 걸었다. 우연히 시작한 장사였지만, 준비 과정은 철저했다.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사업자 등록부터 했어요. 할 거면 깨끗하고 정직하게 하자고 생각했죠. 세금도 당연히 내고요. 애당초 온라인 판매를 염두에 뒀기에 통신판매업 신고까지 했죠."

지난해 6월 시작한 장사는 꾸준히 잘됐다. 계절 영향도 받지 않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올해 여름에도 평균 매출의 70~80%를 달성할 정도였다. 유 목사는 비결을 '신뢰'에서 찾았다. '맛'이 신뢰의 핵심이다. 맛이 없으면 손님들은 과일을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컴플레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바다 건너온 비품 과일 중에는 가급적 빨리 먹어야 하는 것도 있다. "과일이 상했다"는 항의가 들어오면 100% 환불해 준다. 회원이 원할 경우 다음번 거래에서 과일을 더 얹어주기도 한다. 불만이든, 칭찬이든 '소통'이 먼저라는 게 유 목사 철칙이다.

과일 판매로 얻은 수익 중 10%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 명절이 다가올 때는 회원들 추천을 받아 홀로 지내거나 자식이 없는 어르신들에게 과일을 전달한다. 이번 추석에는 서른 명을 추천해 달라는 글을 밴드에 남겼다. 회원들이 댓글을 남긴다.

"저희 위층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만 지내세요. 할아버지 몸이 불편하셔서 할머니가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서 돌보고 계시죠. 가끔 시골서 야채나 과일 따오면 나눠 드렸는데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우리 동네에 엄마와 1급 장애우가 사는 집이 있네요. 따뜻한 추석이 될 수 있을까요.^^"

"상2동 동사무소 옆 주택단지 2층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딸들은 있는데~아들이 없으셔서 혼자 사십니다. 저희 동네 특성상 노인정이 없어서 매일 바깥에 혼자 앉아계십니다."

유 목사는 회원들에게 이번에는 직접 과일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과일만 주고 오지 말고, 안부 인사도 묻고 말동무가 돼 달라고 요청했다.

'목사가 장사를?'…자존심 내려놓으니 새 삶이 찾아왔다

▲ 유영춘 목사에게 있어서 장사는 곧 목회다. 수익의 10%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 밴드 회원 3,500여 명은 교인으로 이해한다. 장사도 목회처럼 정직하고 깨끗하게 하자는 게 유 목사의 철학이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과일 장사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장도 차리고 차량도 구입했다. 이렇게 장사가 잘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초기에만 해도 내적 갈등이 심했다. 고생해서 목사가 됐는데, 장사를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목사가 장사를 해도 되는가' 생각도 들었다.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하루는 아이들에게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설교했는데, 유 목사 자신이 은혜를 받는 생소한 경험을 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은 비무장이었어요. 투구, 갑옷, 칼이 없었죠.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물맷돌로 싸웠죠. 저는 다윗이 버렸던 장비에 집착했어요. 투구는 명예와 자존심을, 갑옷은 경험과 지식, 칼은 능력과 힘을 상징한다고 봐요. 이것들을 내려놓기가 어려웠죠. 그런데 설교를 하는 도중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죠. 그 길로 목사로서의 자존심과 편협한 사고는 내려놨죠."

과일을 사기 위해 유 목사를 찾는 회원 말고, 과일 파는 일을 배우기 위해 찾는 이들도 있다. 그중에는 전도사, 개척교회 목사도 있다. 유 목사는 노하우를 있는 그대로 알려 준다. 유 목사 도움으로 자리 잡은 사람 중에는 그때그때과일 대표 김정훈 목사(힐링힐처치)도 있다. 현재 8명이 유 목사 도움을 받고 있다.

유 목사는 매일매일 새벽 3~4시간을 도매시장에서 보낸다. 맛 좋은 과일을 찾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 없이 장사하기 쉽지 않다. 과일은 언제나 대량으로 구매한다. 이쪽 업계 용어로 '싸그리'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 목사에게 도움받는 멤버들을 위해서다. 남들이 1만 5,000원에 사는 과일을 유 목사는 1만 원에 산다. 저렴하게 구입한 과일은 멤버들에게 제공한다.

장사 초기까지만 해도 사역을 했지만 이내 관뒀다. 몸이 견디질 못했다. 예배 시간에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은 예배만 드린다. 유 목사는 장사도 하나의 사역이라 생각한다.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믿는다. 회원 3,500여 명과 함께 세상을 밝혀 나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 지나가던 동네 어르신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도복숭아와 사과를 맛봤다. 유 목사는 "누구든지 모든 과일을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아직 못다 이룬 꿈은 어떻게 됐을까. 유 목사는 목표를 재설정했다고 말했다.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을 마련해 주는 것.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번 꿈은 이전 꿈과 달리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인터뷰하는 동안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가을 하늘이 드러나기 무섭게 유 목사 핸드폰이 울렸다. "아무래도 가야겠네요"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 과일 향기가 맴돌았다.

싸고 맛있는 과일이 먹고 싶다면, 네이버 밴드 '비품과일 전문점 푸른숲'에 가입한 다음 이용하면 된다.

▲ 과일 장사를 시작한 지 1년 3개월이 지났다. 트럭에 걸려 있는 빛바랜 플래카드에는 "그 소망, 그 사랑, 그 생명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야 할 이유"란 문구가 적혀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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