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1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대학에 갓 입학해 영어 공부 한답시고 학교 근처에 있는 영어 회화 학원을 열심히 다닌 적이 있다. 거의 결석을 하지 않고 2년 정도 다녔을 무렵, 학원의 마지막 단계 최고 클래스를 듣게 됐다. 학원에 있는 강사들, 직원들과 이미 한참 친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가 나보다 한두 살 많았던 강사 친구가 지구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수강생들에게 아느냐고 물었다. 물론 클래스 중에. 글쎄. 한 45억년 되나? 아닌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 강사 친구는 "6천 년"이라고 당당하면서도 진지하게 말했다. 파란 눈을 반짝이면서. 맙소사.

에피소드-2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3월의 어느 목요일, 석사과정을 마치고 잠깐 청강으로 듣는 클래스 전에 신학 박사과정에 있는 한국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다 (물론 한국말로) 독일 출신 친구의 등장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영어 두뇌로 변신!) 박사 몇 년 차인 그 독일 친구(박사과정을 하면서 다른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이제야 졸업했다.)와 한참 얘기하다 "창조과학"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그날의 클래스가 "과학과 신학" 관련 세미나였기에. "독일에도 창조과학회가 활동해?" "NEIN!" 독일 친구가 웃는다.

그러나 웃을 일이 아니다. 창조과학을 부르짖는 분들은 일사 각오로 진지하다. 과학자인 어떤 분은 만사를 제쳐 두고 창조과학에 올인한다. 그분을 두고 어느 누가 웃을 수 있나? 한국에 창조과학이 소개된 게 1981년이니까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지만 한국 개신교계에서 창조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작지 않다. (창조과학회가 미국과 한국에만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이 얼마나 될지)

중대형 교회치고 창조과학회의 순례를 비껴 난 교회가 얼마나 될까? 그분들은 정말 열심이다. 그러나 과학계는 냉담하다. 왜 그럴까? 과학의 한 분과처럼 여겨지기까지 하는 "창조과학"이 왜 이렇게 찬밥 신세일까?

몇 년 전, <종교전쟁>이란 이름의 책이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필자도 구입해서 읽었는데 그 내용이 그리 깊지는 않으나 파급력이 클만 하다. 신앙인보다는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더욱 호소력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들 중 필자와도 오래전 안면이 있는 장대익 교수의 주 공격 대상이 다름 아닌 "창조과학"이었다. 왜 그는 그렇게 창조과학에 대해 비판적일까?

장 교수의 의견에 대해 필자도 할 말이 많지만 그의 의견에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 꽤 있다. 한편 천문학자이자 "과학과 신앙"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종학 박사의 지적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창조과학자들이 주로 취하는 방식은 과학이 틀렸음을 과학으로 증명하려 하고, 신이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는 창조의 증거를 과학적 증거를 통해 뒷받침하려고 시도한다."

그렇다. 이것이 창조과학의 현주소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성공회 관구의회(General Synod)도 "종교와 과학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결의안을 채택하며 종교(창조 신앙)과 과학(진화론)을 대결시키는 일은 일종의 "범주 오류"라 지적했다.

그러나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거의 절반 정도가 지구의 나이가 1만 년 정도라는 생각에 동의하고 있어 과학자들을 놀라게 한다. 마치 창조과학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출발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출발점은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도 아닌 바로 제7일안식일재림파의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라는 사실! "노아의 홍수 때문에 지질학적 형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오늘날의 학자들이 지질학적 자료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의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과학자들이 얼마나 될까? [다행히 이달(2016년 5월)에 새물결플러스에서 로널드 넘버스의 <창조론자들>(신준호 역)이 한글로 번역된다 한다.]

2009년은 다윈이 태어난 지 200년, <종의기원>이 출간된지 150년이 되는 해라 세계 생물학계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기울였었다. 그는 실로 대단했다. 온 세계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Google 에서 "다윈"을 한 번 검색해 보시라. 얼마나 방대한 정보가 있는지. 그런데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다윈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단체도 무척 많다는 사실이었다. 유명 연예인의 주위에 팬뿐만 아니라 "안티"도 많은 것처럼. 혹시나 해서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역시나!

나는 개신교회에서 봉사하는 목회자다. 루터와 칼뱅의 후예다. 그래서 궁금했다. 그들은 어떤 과학을 수용했을까? 독자들에게 묻겠다. "여러분은 지동설을 믿습니까? 아니면 천동설을 믿습니까?" (지동설과 천동설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들은 논외로 하고.)

거의 100%가 지동설이라고 대답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그 훌륭하신 루터와 칼뱅은 천동설, 그러니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수용했다. 왜 그러셨을까? 오늘날의 "창조과학회"처럼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옹호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자신의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바로 루터다. 루터 이후 1600년경 이제 종교개혁이 자리를 잡게 되자 성서의 문자적 진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성서는 아무리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실수와 착오가 없다. 진리가 아닌 것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루터와 칼뱅은 더 신중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이 없는 문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에 기초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독하는 것에 그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지만 한편 성서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천동설을 지지했을까? 이는 다름 아닌 당시의 가장 지각 있는 견해(과학)였기 때문이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543~1600) 이후 16세기에 그를 따랐던 과학자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겨우 10명이었다. 그것이 당시의 한계였다.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 해도 할 수 없다. 자기 맘이니까. 그러나 루터나 칼뱅의 말처럼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에 목사가 필요한 게 아닌가. 이도 필요없다면 할 말이 없다.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의 중심엔 여러 가지 이슈가 존재한다. 아예 출발점부터가 성립되지 않는 "범주의 오류"도 있다.(성공회의 지적처럼) 이에 또 다른 하나를 지적하자면 바로 "해석"의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더 복잡한지도 모른다. 물론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기독교의 종파는 매우 소수다. 그러나 과소평가할 수 없다. "창조과학"을 어찌 간과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한 사람의 목회자이자 신학도로서 "진화론과 창조 신앙"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쉽지 않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편 노아의 대홍수, 창조의 6일, 1만 년도 되지 않는 지구의 역사를 지지하는 극단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존재함을 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다윈주의와 기독교가 한 배를 탈 수 없다.

왜 그럴까? 오늘날의 생명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진화란 명확한 하나의 사실이다. 마치 물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양자물리학"이 명확한 하나의 출발점인 것처럼. 하긴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죽는 순간까지 "양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을 발전시킨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위배된다 하여 진화론을 완전히 배격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교회의 생명과학도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또한 지면을 빌어 "창조과학회"에게 묻고 싶다. "진화론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마켓 앞에서 어느 교회의 소식지를 한 부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 역시나 "창조과학란"이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꼼꼼하게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실망이었다. 첫 면에 위치한 목사님의 칼럼에 비해 현격하게 수준이 낮았다.

어느 노벨상을 수여했던 생명과학자의 말처럼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차라리 "종교"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했다. 허나 오해하거나 서운해 마시라. 이 칼럼을 통해 "창조과학회"를 공격하고픈 생각은 없으니. 필자의 진심은 교회가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박하다"라는 공격을 막고자 함이다.

아무튼 금세기 초 제7일안식일재림파의 열렬한 신앙인이었던 조지 맥그리디 프라이스(George McGready Price)라는 캐나다의 관광 세일즈맨 덕택에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당시의 광신자들로부터도 관심을 못 받던 과학의 "과"자도 모르는 그로부터 드디어 불이 번져 갔다. 1920년대의 스콥스 재판 이후 성서 문자주의는 찬란히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내 성서 문자주의의 지나친 교만과 무미건조함 덕택에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죽지 않았다. 존 휫컴(John Whitcombe)과 헨리 모리스(Henry Morris)에 의해 그는 부활했다. "노아의홍수"가 계속됐다! 창조과학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필자가 잘 아는 노부부 권사님들이 계신다. 가끔 말씀을 나누다 깜짝 놀라곤 한다. 물론 내가. 그 분들은 70여 인생 동안 세계 안 가본 곳이 없는 듯 했다.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매우 남다르다. 또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잘 아시는 듯 했다. 그러나 커피샵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백인 할아버지는 80 평생 캘리포니아를 떠난 적이 없으시단다. 하긴 내가 태어난 대한민국보다 훨씬 크니까. 그 분은 그저 매스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왜 뜬금없이 어르신들을 비교하느냐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창조과학"은 그저 미국과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작은 운동일 뿐이다. 또한 창조과학이 기대고 있는 성서 문자주의도 미국과 대한민국에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미국과 대한민국의 선교사들이 다녀가면 창조과학과 성서 문자주의가 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이다. 그 소수가 유일한 하나님의 진리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렇다면 나머지 다수의 기독교는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지면을 통해 수십 년 전 미국 공립학교의 교사가 되셨던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을 던지고 필기구를 던지며 아시안인 여교사를 거부하던 아이들에게 지구본의 어느 한 점과 같은 작은 나라, 코리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너무 나라가 작아 자꾸 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고 소회하던 그분의 현재 마음을 아시는가.

대한민국은 변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 과연 변할까? 과학자들로부터 정통 신학자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던 "창조과학"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편 과학자들은 그들이 왜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또한 신학자들은 왜 그들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내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사실 "창조론과 진화론"이란 주제는 진부하면서도 너무도 무거운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 주제를 다루면 다룰수록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신학 작업을 하고 있는 자로서 필자 역시 괴롭다. 이 주제의 무게와 관심 때문에 사실 글이 길어졌지만 도저히 짧은 칼럼의 글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창조와 진화"에 관한 책만 해도 50여 권에 달한다. 그런데 어쩌랴? 오늘의 신앙을 생각할 때 그냥 간과할 수만은 없는 노릇. 다만 이 글로 이 주제를 마무리하련다. 나중을 기약하며.

필자는 이 주제를 시작하며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혹자는 이 질문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실상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은 긍정적 태도를 갖는다. 심지어 질문 자체가 너무 유치하다 지적하며 다윈주의와 기독교는 당연히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다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정말 그들의 주장처럼 둘 다를 긍정할 수 있는가?

오래됐긴 했지만 1963년 미국 북가주의 교회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한인 교회가 아니다.) 미국에서의 창조과학 운동이 부흥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에 대해 반대하는 비중이 30퍼센트에 달한다. 각 종파별 수치는 다음과 같다.

*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s), 감리교회(Methodists), 성공회(Episcopalians), 제자교회(Disciples): 11퍼센트
* 장로교회(Presbyterians), 미국 루터교회(American Lutherans), 미국 침례교회(American Baptists): 29퍼센트
* 하나님의교회(Church of God): 57퍼센트
* 루터교 미주리시노드(Missouri-Synod Lutherans): 64퍼센트
* 남침례교회(Southern Baptists): 72퍼센트
* 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 78퍼센트
* 나사렛교회(Nazarenes): 80퍼센트
*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91퍼센트
* 제7안식일재림파(Seventh-day Adventists): 94퍼센트

어떤가? 이 설문조사 이후 창조과학이 더욱 지지를 받았을까? 즉 1960년대 이후 제7안식일재림파를 선두로 한 운동의 세가 확장되었을까? 크지는 않지만 확장된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후 80년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44퍼센트에 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지구의 나이를 1만 년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물론 "젊은 지구 창조론"(지구의 나이를 6,000년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요즘은 조금 관용적으로 변하긴 했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

당황스러운가? 하지만 미국 교회의 현실이 그렇다. 교단마다 천차만별이지만 한편으로 "왜 미국에서 창조-진화 논쟁이 끊이질 않았나?" 하는 의문이 풀리는 듯하다. 대략 7대 3 내지는 6대 4 정도의 비율로 창조과학 운동은 그 설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듯하다. 물론 이는 나중에 다룰 주제이지만 "지적 설계" 운동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

"창조론인가 진화론인가"라는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여쭙고 싶다. 최근 성공회의 발표처럼 창조와 진화 논쟁은 "범주 오류"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가? 즉 각각은 독립된 체계를 가지고 있어 서로를 침범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인가? 아니면 창조와 진화 논쟁은 과학과 유사 과학의 힘겨루기인가?

어느 학자의 심한 표현으로 과학이 아니라 차라리 종교이므로 논란의 일말도 없단 말인가? 이것도 아니면 이 논쟁의 기저에 다른 무엇이 있는가? 성서 해석의 문제? 즉 성서 문자주의에 입각한 해석을 통해 성서를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충심에서 비롯된 해프닝인가? 독자의 반응을 기대한다.

*이 글은 웹진 <신앙과 과학>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신앙과 과학> 바로 가기: http://www.faith-science.com/

민기욱 /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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