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의 시대, 두 욕망의 결탁

오늘의 교회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세습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아름다운 전통과 신앙의 미덕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족벌주의의 망령이 교회를 지배한 것이다. 특히 교회 세습은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된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직·간접적으로 교회 세습을 준비하고 있다. 신앙의 전통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인다. 오직 기득권의 연장을 위한 세습화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세습은 무엇인가.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신이 일군 기업이나 교회를 물려주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보면 이를 가족화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가업을 이어받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족화의 전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날개의 조화가 필수적이다. 하나의 날개는 족벌체제가 노골적으로 공고화되고 이를 고착화하려는 욕구로 무장한 족벌의 당사자들이다. 거기에 또 다른 날개가 있다. 족벌 체제의 지속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족벌의 용인체들이다.

탐욕으로 가득한 맹조(猛潮)는 언제나 피에 굶주려 있다. 그런 맹조의 두 날개가 부조화를 이룬다면 결코 그 새는 활동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습의 구조화와 지속이 가능할 수 있는 현실 역시 두 날개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곧 족벌 세습의 당사자가 가진 욕망과 족벌 체제의 공고화를 추구하는 무리들의 수요 사이의 조화가 없으면 애초부터 세습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과 자본주의적 구조로 연결되는 기업, 혹은 자본 세습의 체제와 종교의 구조로 연결되는 종교 세습은 그 성격상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자본 세습을 결코 옹호하자는 게 아니지만 이 경우 종교의 세습보다는 자본의 세습이 한결 유연한 특성을 갖는다. 세습을 포기할 수 있는 용의가 자본 세습이 종교 세습보다는 용이한 것인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종교의 세습, 세습의 교회가 포박하려는 욕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은 거의 무간지옥을 보는 듯 끔찍하다. 수습 불가한 악순환의 카르텔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질서를 들먹거리는 세습 

족벌 체제, 종교 세습의 당사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 바로 하나님의 영적 권위와 세상 질서와의 차별화다. 교회는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변명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습관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성경 말씀을 금과옥조의 깨우침처럼 들먹거린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구약성경의 세습 전통, 그중에서도 제사장 전통을 즐겨 인용한다. 제사장 전통은 오직 선택받은 혈통에게만 그 성스러운 직위가 계승되어 왔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다. 또한 제사장 전통의 세습도 아전인수격 주장이다. 구약시대 참된 제사장들은 기득권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원치 않는 업과 같은 굴레로 제사장직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족벌 세습의 당사자들이 원하는 검은 속내는 겉모양만 제사장 운운할 뿐 그 실체는 완전히 다르다. 족벌 세습 당사자들이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맘몬이다.

이 경우 맘몬은 모순적이게도 두 개의 대비되는 양태를 품고 있다. 하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의 양적 성장과 부흥의 떡고물로서의 맘몬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돈과 힘이 마르지 않는다. 머릿수가 곧 맘몬이다.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돈과 힘을 화수분처럼 길어 올리는 규모의 포악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친다. 이를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세습의 당사자들에겐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맘몬의 문제는 규모의 떡고물을 받아 챙긴 세습의 당사자들이 보여 준 욕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자기 합리화가 종교의 병풍 뒤에 교묘히 숨어들었다는 데 있다.

그들이 말하는 규모의 합리화는 단순하다. 모든 게 하나님의 축복이란 것이 그 명제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있다. 부흥하지 못했거나 규모를 부풀게 하지 못한 건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논리라면 말이다.

그와 함께 이 축복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 가려면 지금까지 톡톡히 재미를 본 체제의 영속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사장 전통, 다윗 왕조의 전통, 신약시대 사도직 계승 운운하며 자신들의 성 쌓기에 성경 말씀의 모든 것을 투자한다. 이런 식의 흐름에서 성경의 정신이 훼손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아니,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읽혀질지도 의문이다.

여기에 반대의 성격을 가진 다른 양태가 등장한다. 세습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 욕망이 좌절된 경쟁에서의 탈락자들이 품은 독기, 그 독기에 의한 비판과 공격이 그것이다.

규모의 애증에 사로잡힌 비판, 세습의 또 다른 얼굴

물론 진심으로 세습을 비판하는 교회와 그 주장까지 도매금으로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세습과 부흥, 규모를 동경하다가 좌절된 이들의 비판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들은 부흥과 규모의 괴물에 사로잡힌 교회가 뼛속까지 타락했다고 말은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목표가 실패한 이후에 그 목표를 향한 맹비난의 배후에서 성경 해석의 왜곡에 대한 진단과 성찰은 하지 않는다.

맘몬의 두 얼굴과 같은 구조적 폐습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대신 못 가진 것, 없는 것 자체가 청빈이란 논리를 앞세운다. 상대적 박탈감의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구태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태 역시 세습된다.

구조적 세습은 부흥과 규모의 수혜를 입은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규모의 수혜에서 직·간접적으로 기회를 박탈당한 교회에서도 함께 일어난다. 악순환이란 표현이 바로 여기에 어울릴 것이다. 오염된 정신의 세습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그대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세습이 족벌 세습의 당사자와 그러한 이들을 비판하는 비판자들의 날선 대립으로만 존재한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족벌 체제를 구축해 가는 축에는 또 다른 핵심이 있다. 바로 세습 체제의 당위성을 옹호하는 세력이다.

세습의 무리들

세력화된 무리의 특성 중 악질화되기 쉬운 속성이 있다. 무비판적 수용과 욕망의 노골화다. 성경은 한 번도 정의와 평화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상식을 외면한 적이 없다. '오직 말씀으로만'이란 건강한 구호를 가슴에 품은 프로테스탄트는 그 어떤 종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밀착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세력화된 무리들은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평화의 외침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하다. 대신 세습의 당사자들이 보여 준 카리스마에 열광하거나 그들의 카리스마를 비판하는 냉소주의자들의 가르침이나 주장을 스펀지에 물을 흡수하듯 빨아들인다. 그와 함께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영성의 내부로부터 성경 내러티브 곳곳에 살아 숨 쉬던 정의, 평화의 담론은 희석된다. 대신 규모, 부흥, 축복이란 성경 언어의 무자비한 왜곡이 가속화된다. 무리들은 급기야 세습 당사자들의 자기 변명이 어느새 성경 전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서 제사장 노릇, 왕 노릇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것이 신앙의 순수성에 기인한다면 면죄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필자는 개개인의 허물이나 잘못을 추궁하려는 게 아니다. 두 양태의 구조에 속절없이 포박된 구조의 악순환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그런 맥락에서 차갑게 응시하면 할수록 세습의 카리스마가 뿜어 대는 성경 왜곡이 자신들의 흉악한 허물을 상쇄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보인다. 바로 욕망의 노골화다.

욕망의 굿판

기독교의 숲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주어진 무의식적 안정감은 바로 천국 티켓 확보다.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는 천국 티켓을 미끼로 많은 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해 왔다. 그런데 이 안정감만으로는 부족한 게 인간이다. 인간의 욕망은 천국 티켓은 천국 티켓대로 받고 세속적 성공과 승리를 갈구하는 욕구도 함께 충족받고 싶어 한다.

족벌과 세습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수익 모델인 무리들이 요구하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든 보너스로 주겠다는 사탕 발림으로 성경을 대하고 조직을 이끌어 왔다. 이처럼 철저히 왜곡된 두 마리 토끼를 포획한 현장에서는 욕망이 욕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비쳐질 뿐이다. 그 현장에는 어느 때엔 터무니없이 가혹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거나 또 어느 때에는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이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형편없는 몰상식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렇듯 기형적 욕망이 노골화되는 현장은 족벌의 당사자가 벌인 악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뒤, 그 배후의 담보물로 설정된 천국 티켓과 현세 축복, 마음의 평화까지 옵션으로 쟁취하려는 욕망의 굿판만 계속될 뿐이다.

세습의 교회로부터 벗어나기

교회 세습은 비단 혈연의 대물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1인 독점 체제의 카리스마와 이로 인해 점화된 무리들, 그 욕망의 노골화가 합치된 결과물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세습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세습의 교회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세습의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것, 혹은 한 걸음 물러나는 길은 무엇일까. 예배와 기도에 더 정진하면 되는 것일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세습의 교회가 태동된 생래적 욕망을 무장해제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독려만으로는 곤란하다. 오히려 방법은 다른 데 있다. 인문학적 소양을 배양하는 요구와 필요에의 눈뜸이 그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왜 필요할까.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을 생각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간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 심연에 하나님이 보인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는 무엇인지, 그 심연의 진실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 주는 지점이 때론 섬광처럼, 때론 파편처럼 드러나는 때가 빈번하다.

종교와 맘몬을 세습하는 추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짐승의 모습이다. 짐승의 탈을 벗고 인간으로 거듭나려는 발버둥이 도리어 생명의 신, 하나님을 소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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