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무브먼트 이동현 목사 사태는 충격적인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청년, 청소년 사역자다.
단체 내 여성을 은밀하고 집요하게 성폭행했다.
공적 회개 절차를 간과하고 있다.

이동현 개인에 대한 충격은 라이즈업무브먼트 관계자에 맡겨두면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검토가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

청년·청소년 사역에 대한 검토

1990년대 들어 새로운 형태의 청년, 청소년 사역이 본격화됐다. 신선했다. 찬송가 중심의 고루한 예배 문화를 혁신했고, 어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뻔한 설교 방식을 탈피했다. 젊은이들의 감성을 매우 강렬하게 사로잡았고 강력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변화를 도모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곧 개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악기를 둘러싼 잠깐의 논쟁, 목회자 개인의 스타일을 둘러싼 호불호, 단체의 활동을 두고 몇몇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이들 사역은 기존 교회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기존 교회 질서를 파괴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기존 교회와 빠르게 영합하여 성장했다.

대형 교회 예배당에서 공연을 하거나, 대형 집회를 주도하거나, 시청 광장에 모여 시국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행사를 진행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던 기존 교회는 이들을 환영했다. 이러한 방식을 거쳐 매우 단기간에 새로운 청년·청소년 사역은 교회의 주류 문화가 되었고,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효과가 있었다. 새로운 예배 문화가 정착했고, 신앙생활 스타일 자체가 바뀌었다. 새벽 기도와 엄숙한 예배가 기존 어른들 문화였다면 찬양이 중심이 된 예배가 일상이 되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금요일 밤 집회나 별도로 특별 부흥 성회가 새롭게 요리되어 예배의 중심이 되어 버린 정도다. 이런 시간이 벌써 25년 이상 흘렀고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의미 있는 사역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냉정히 따져서 큰 의미는 없었다. 숫자는 늘지 않았고, 교회학교는 소멸되고 있다. 대부분의 부흥이란 이미 믿는 청년들이 '좋은 교회'를 찾아 이동하는 것에 불과했다. 교회 다니는 젊은이들은 그들끼리만 어울릴 뿐이다.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감수성, 그들만의 소통. 그들만의 리그는 한없이 아름다운 말과 성서 구절로 가득 포장된 상태.

누군가 음률에 취해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격렬히 노래 부를 때, 더 많은 사람이 이 감성의 향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신을 만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났다. 대중문화나 미디어의 범람으로 그마저도 매력을 잃은 지 오래. 우리는 예배라고 부르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만의 콘서트, 신이라는 이름을 끼워 놓고 그들끼리 벌이는 축제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교회를 개혁하자, 사회참여를 하자. 온갖 구호가 범람했지만 그곳에 사람은 모이지 않았고 교회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롯이 새로운 찬양 문화, 새로운 예배 문화 정도만 수용할 뿐이었다. 숱하게 반복되고 심화되는 한국교회의 수많은 문제는 오직 일부 목회자 타락, 대형 교회의 실수 정도로 여겨졌다.

찬양 집회. 오직 찬양 집회. 기타와 드럼을 빼면 한국교회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설교도 듣고, 성경 공부도 하고, 나름대로 책을 읽는다고 하겠지만 나머지는 언제나 선택사항이다. 그나마 성경 공부 수준은 1970년대 김준곤 목사가 만든 'CCC 기초 신앙 훈련' 혹은 1980년대 옥한흠 목사가 고안한 '구절을 찾아서 받아 적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나마 읽는다는 책은 자기 계발 서적, 그것도 아니라면 대부분 누군가의 감동적인 수기다.

한국교회 청년에게 성경이 있는가, 독서가 있는가? 물론 열심히 하면 독실하다는 소리는 들을 것이다. 하지만 개혁을 이야기하면 고립될 것이고, 그의 진지함은 결코 교회 안에서 꽃피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찬양 집회. 오직 찬양 집회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다. 강렬하건, 차분하건 교회당에 들어오는 순간 감정이 모든 것을 압도하며 인도자가 이끄는 리듬에 맞춰 울고 웃고를 반복한다. 정규 신학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목사 이상으로 마음껏 선포하고, 극도의 감정적 발현 이상도 이하도 없는 신앙을 보여 준다.

집단적으로, 함께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성욕도 완전히 제어될 수 있고, 세상이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세상과 싸워 쉽게 승리할 수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온갖 인물들이 될 수 있으며, 감히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와 승리, 하나님의 나라 등등에 대한 어휘가 마음껏 사용된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무엇이 남는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승리했는가. 도덕적 결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했으며, 성적인 부분을 비롯해 조금이라도 일반인과 차별점이 있으며,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 있는가.

사실 걱정할 필요 없다. 어차피 설교는 교묘했다. 용서는 이미 받았고, 온갖 편하고 쉬운 동정적 행위 같은 것을 늘어놓으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충분히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답답함을 느낀다? 다시 집회로 가자. 뜨겁게, 뜨겁게!

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젊은이들

구조는 계승되었다. 이동현 개인의 일탈일까.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한국교회 '구조'의 문제다. 설교자건 예배 인도자건 결국 누군가가 주도하는 상황은 여전하다. 모든 조직에는 지도자가 있고 지도자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유독 목사의 성범죄가 압도적인 이유는 왜일까. 카리스마적 설교, 감정의 향연, 그리고 끝없이 요구되는 헌신과 결단이라는 이름의 맹목적 복종. 이 정도면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지도자가 탄생하는 것이고, 리더진은 지도자의 의지를 꼭 같이 발현하는 동일체들이다. 사고와 판단은 일체화되어 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지도자에게 일탈을 강요하는 수준이다. 모두가 지도자의 말을 듣는다. 지도자가 불같이 화내면 모두가 움찔한다. 주변에 충성을 맹세하는 자가 늘어나고, 합리적 소통이나 제대로 된 통제 장치, 유효한 견제 도구가 없는 상태라면 지도자는 모든 것을 자기 의지대로, 자기 기분대로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사탄이 하는 짓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목사와 같은 지도자는 사람이 아니던가. 집회가 끝나고 나면 모두가 평범한 인간이다. 똑같이 성적인 욕구를 느끼는데 자신에게 감격해하고, 자기 말을 잘 듣는 여성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불러내면 아무 말 없이 나올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나쁜 마음을 먹으면 욕망을 풀어낼 수 있다. 무엇을 못하겠는가.

라이즈업무브먼트 전 대표 이동현 목사가 지어야 할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집요한 성폭력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 안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동등하게 처벌받아야만 한다. 노회는 교단 헌법에 따라 치리해야 하며, 그는 온갖 도덕적, 정서적 비판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금의 문제를 만들어 내는 현실이다. 목사가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교회 건축만을 목표로 하고, 다수의 여성도와 염문을 뿌린다. 예배당 밖에서 교인이 낸 헌금으로 사치를 일삼거나 성적 향략을 탐닉한다. 이 같은 일이 수십 건, 수백 건이 일어나고 있다. 라이즈업무브먼트 이동현 목사 사태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말할 수 있나.

반격을 시작할 때

사안이 충격적이기에 비판과 분노로 시작한다. 이를 아는지 이동현 목사는 몸을 바짝 낮추었다. 진심인지는 지켜볼 노릇이다. 이미 "사탄이 우리를 공격했다"는 식의 발언이 나왔고, 단체는 동생이 이어받았다. 오륜교회를 비롯해 든든한 대형 교회가 후원을 하고 있고, 앞서간 많은 파렴치범이 버젓이 사역과 목회를 하고 있는 상태니 말이다. "평생을 사죄하겠다"는 말은 "조만간 돌아오겠다"는 말과 얼마나 다를까.

문제의 본질은 이동현 개인이 아니다. 매우 빠르게 반론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 그것 자체가 훨씬 심각한 문제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랴. 모두가 죄인인데 왜 이동현 목사만 뭐라 하는가. 다들 자격이 있는가.
사탄이 라이즈업무브먼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동현 목사 잘못을 떠나 이것은 하나님 역사에 대한 훼방이다.

결국 죄를 판단하고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닌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영역이라면 그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도 아니고, 말할 수 있는 바도 아니다. 판단 가능하고 논의 가능한 것은 오직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데 이는 너무나 정확하다.

죄를 죄라고 판단하고, 죄의 책임을 묻고, 심판하며 진멸하며 자기 아들까지 보내어 처형하신 분이 하나님 아닌가. 하나님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은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닌가.

구원을 받고도 왜 우리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가. 용서받은 죄인, 의인으로 선고받은 죄인으로서 우리가 신앙 안에서 추구해야 할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제시한 방향과 내용 안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사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아간의 범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십계명을 비롯해 신구약에 넘실대는 온갖 치리와 규제 조항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호한 말장난'으로 누군가의 죄를 변호하는 것만큼 불경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어디서 함부로 하나님의 깊고 높은 뜻을 왜곡하냐는 말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에 대한 훼방? 지도자는 사탄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리고 지도자의 부정이 드러나자마자 사탄의 공격 운운하는 소리가 노회한 어르신이 아닌 20대 청년들 사이에서 퍼져 나오고 있다. 이게 정상적인 현상일까.

그렇다면 쉬운 말로 되묻겠다. 왜 우리는 이완용을 증오하는가. 왜 친일파 처단을 하지 못했다고 여전히 분개하는가. 일본이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갖고 조선을 침략했고 집어삼켰다. 수많은 사람이 변절하여 일본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식민지 치하 조선인을 앞장서서 괴롭혔다. 이들에 대한 '처단'은 당연한 것 아닌가. 강호순, 조두순 같은 연쇄살인범이 여자를 꾀어 성폭행하고 사람을 잔혹하게 죽였다. 이들을 처단해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것 아닌가.

그것은 다른 문제라고? 그러면 지하철에서 슬그머니 치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만취한 상태에서 버스 운전기사에게 시비 걸고, 말리는 사람들에게 욕지거리하고, 기어코 운전자에게 싸대기를 날리려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상식적인 문제가 아닌가. 이 문제가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고,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오묘하고, 모호하고 까다로운 문제인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셨고 다시 양심을 주셨고, 다시 자연을 주셨는데 범죄에 대한 판단이 뭐가 어렵다는 말인가.

판단이 구부러지는 이유는 하나다. 그간 한국교회는 제대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고, 루터와 칼뱅을 계승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맞서 싸운 중세 말기 교회의 타락이 무엇인지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독히 감정적이며, 감정적 혼란을 해결하려고 이것저것 논리를 만들어 대고, 기껏해 봤자 주변에 자기들밖에 없기에 자기들끼리만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껄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저열함이다.

죄 있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적재적소'라는 말 모르는가. 수학 문제 푸는데 국어 이야기를 하며, 단어 외우라니까 듣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격이다.

한국교회는 종합적으로 망가졌다. 청년·청소년 사역은 헛발질을 반복했다. 목회자의 성적 타락을 별도로 하더라도 청년·청소년 사역 그 심각한 한계를 인정하라.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으며 그럭저럭 간신히 버티고 있는 척할 뿐인데 이젠 그마저도 틀렸다. 너무 명확하게 입증되었고 입증될 것이다.

심용환 / 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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