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를 위하여> / 강남순 지음 / 동녘 펴냄 / 280쪽 / 1만 4,000원 ⓒ뉴스앤조이 강동석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비판적 저항'으로 '따뜻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책이 나왔다. 강남순 교수가 쓴 <정의를 위하여 - 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적 성찰>(동녘)이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강 교수가 <한국일보>를 비롯,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 44편을 모아 한 권으로 묶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 현주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담겨 있다.

강남순 교수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으로 '사유'의 중요성을 들고 있다. 그는 인간을 "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의미 물음'을 하는 존재"(14쪽)라고 정의하며 '새로운 물음', '비판적 사유', '물음표 붙이기'가 인간을 사회변혁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건강한 사회는 "모든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확장하는 사회"(109쪽)이다. "사회적 지위·성별·인종·종교·성적 지향 등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평등이 존중되고 보호받는 사회"(109쪽)를 말한다.

강 교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억압하는 구조를 바꾸고, 구체적 정황을 변화시키는 데 '비판적 저항'이 큰 몫으로 작용했다고 이야기하면서, '비판적 저항'을 크게 네 가지로 제시한다. 정치적 저항, 사회적 저항, 종교적 저항, 윤리적 저항이다.

정치적 저항은 세월호 참사, 역사 교과서 국정화, 난민, 테러 문제 등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인간을 획일화하고, 적대와 배제의 제도화 등에 개입하는 정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저항은 어떤 이유로든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포용의 원'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종교적 저항은 과거에는 십자군전쟁, 홀로코스트를, 오늘날에는 여성, 성소수자 차별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종교를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종교적 저항은 평화·평등·정의 확산을 추구한다.

정의 확산을 위해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윤리적 저항은 앞의 세 가지 저항처럼 구조적인 문제보다 개별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이들을 악마화하지 않고 내면에 있는 이기성, 권력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는 '비판적 저항'이 제대로 된 저항으로 작동하기 위한 기반으로 작용한다.

강 교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저항을 약화시키는 가장 큰 적을 '사유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악마의 얼굴이 아닌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한나 아렌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비판적 사유'를 촉구한다. "존재의 깊이에 도달하는 것은 진정한 비판적 사유로서만 가능하다"(37쪽)고 덧붙인다.

"끔찍한 악에 가담한 평범한 아이히만과 같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사유 없음 thoughtlessness', 즉 '비판적 사유 능력의 부재'이다. 비판적 사유의 부재는 아이히만이 그에게 주어진 규율과 명령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하였다. (중략) 아렌트는 비판적 사유의 부재야말로 이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악을 일으키거나 가담하게 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36~37쪽)

참된 기독교인은 '사유를 멈추지 않는 사람'

저자는 오늘날 종교에 대해서도 똑같은 적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바람직한 종교인을 '사유를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성숙한 종교인이란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다. 또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 세계 안에서 어떠한 적절성을 가지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이들이다." (188쪽)

그는 종교의 목적이 종교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집단 자체의 이익 확장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가 목적이 될 경우, 종교는 신의 자리를 대체한다. 또한 폭력·탐욕·권력 확장·증오 등을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게 된다"(143쪽)고 지적한다.

그는 무엇보다 개인의 구원 자체에만 천착하는 '구원 클럽'이 되어 버린 한국 기독교의 면모를 비판한다. 그가 참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할 때 인용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인상 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이 같은 질문을 치열하게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지적이다. 강 교수는 종교의 존재 의미를 여기에서 찾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강도 만난 이웃들을 돌보는 것이고, 의원이 필요한 병자들을 보살피는 것이며,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신을 믿는 것,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성서가 가르치는 '가이드라인'이다." (164쪽)

이런 바탕하에 그가 제시하는 구원관은 흥미롭다. 예수의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이 메시지가 한국 기독교가 일상적으로 외치는 구원관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구원이 "우리의 구체적인 정치·경제의 제도적·공적 차원은 물론, 내가 타자들과 함께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삶과 분리 불가한 문제"(188쪽)에 놓인다는 말이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절대적 공식처럼 외우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연결되는 최후의 심판과 관련하여 전혀 다른 가르침을 준다. 예수가 들려주는 최후 심판에는 종교·교회·신앙·불신·헌금 등과 같은 종교적 개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85쪽)

"예수는 최후 심판의 여섯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이방인이 되었을 때 환대하였는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는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는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주었는가." (185쪽)

이때 예수가 이야기하는 최후 심판관인 '나'는 "가장 작은 사람들, 가장 사람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답한다. 결국 구원은 사회적 약자를 환대하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구원을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으로 작용한다. 끊임없는 '물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환대 가능성을 놓고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측 불가능성으로의 모험, '따뜻한 정의'로 향하는 길

그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람의 불확실한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향한 순례를 예로 들면서, 본인도 예측하지 못하는 곳으로 새로운 삶을 위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 종교의 생명성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종교'라는 이름이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확실성과 정형화된 정답에 대한 나·우리의 저항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지점에서이다. 사랑할 만하지 않은 것을 향한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기 시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불가능한 용서를 꿈꾸기 시작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새로운 삶을 꿈꾸기 시작하는 여정에 들어설 때, 비로소 종교가 그 생명성을 발하게 된다." (206쪽)

그는 이런 여정을 통해 새로운 신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연민의 신', '연대의 신', '포용의 신', '환대의 신'이 그 신의 이름이다. 이런 새로운 신 인식이야말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정의를 향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때 이야기되는 정의는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와 평등한 삶을 증진하고자 다층적 운동을 하는 이들은 환대의 미소의 얼굴을 한 정의"(267쪽)가 될 것이다.

강 교수는 이 같은 '따뜻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을 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의에 헌신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모순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종적 정의에 헌신하는 이들이 젠더 정의에는 전혀 의식이 없다든지, 반대로 젠더 정의에 예민한 사람들이 인종적 불의나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불의의 문제에는 의식이 없는 경우"(270쪽)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종류의 정의에 헌신한다고 하는 이가 인간의 얼굴을 상실할 때, 그 얼굴은 타자를 향한 미소 역시 상실하게 된다"(270쪽)고 지적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의를 타자를 향한 환대에서 나타나는 '미소'와 분리해서 접근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때까지 제시한 내용을 보면 이 책이 비판만을 추구하는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비판적 저항'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말은 맞기도 하고 다른 점에서는 틀리기도 하다. 이 책이 저항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희망 없이는 어떤 의미에서 비판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낙관적으로만 미래를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희망 역시 품고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제 '미안하지만' 희망을 창출하고, 갈망하고, 노래해야 한다. 여러 가지가 낙관적이어서가 아니라 절망적이기에 더욱 절절한 희망을 부여잡고 있어야 한다. 나나 우리만이 아니라 너와 그들이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차별받거나 존재가 부정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꿈꾸는 것, 이러한 희망은 사치가 아니다. 우리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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