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되어 자주 주권을 찾은 지 71주년을 맞는 날이다. 70주년을 보내면서 다소 한일 관계 개선을 기대했지만,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오히려 더욱 악화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일제강점기를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한 국무총리 후보자에 이어, 올해는 공기관장이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친일 세력을 척결하지 못해 후유증을 제대로 앓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8·15 해방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실존 및 역사 이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 절기 때마다 행한 고백,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의 손에서 건져 내셨다"는 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 경험에 바탕을 둔 그들의 고백을 이해함으로, 오늘 우리들의 해방 경험이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들은 이 고백을 통해 무엇보다 공의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작고 힘없는 민족을 당신의 계획 가운데 선택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또 선포하였다. 그렇기에 이 고백은 해방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본적인 고백이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다.

신명기 26장 5절부터 11절은 수확의 첫 소산물을 바치면서 하나님이 애굽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인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확에 대해 감사하고 또 그 수확물로 즐거워하라고 지시하셨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을 바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해 주었고 자신들에게 복을 주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 복으로 즐거워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의 명절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 건져 내셨다"라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받은 복으로 즐거워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침탈된 36년 세월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건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이 아니고, 오히려 민족이 양분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8·15 해방은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 투쟁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출발점이자, 근대화의 출발점임은 틀림없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한반도 해방을 기독교 신학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과 한반도를 비슷한 경험으로 이끌어 준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8·15 해방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과 근거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

해방에 대한 여러 이해들

역사적 상황을 중요시하는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은 8·15 해방을 '불의로부터 해방'으로 보았다. 정의를 위한 열심과 투쟁을 촉구하는 기회로 해석했다.

불의와 압제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진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 민족의 해방은 불의를 당하는 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해방의 하나님만을 증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면일 뿐이다. 그런데도 해방신학자들은 그것을 전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흔히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8·15 해방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가운데, 해방 경험을 영적 구원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신약은 출애굽 사건을 구속사의 한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고전 10:1-4, 계 11:8).

우리 민족사와 이스라엘 구속사가 분명하게 다른 상황 속에서 시공의 차이를 극복하는 좋은 다리 역할을 하고, 또 이를 해석하려는 작업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해당되지만 때로는 너무 지나치게 영적인 해석만을 강조하여 역사성이 상실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럼으로 역사적 사건인 8·15 해방과 기독교인들의 실존이 등한시되는 듯한 인상을 자아내기도 한다. 한민족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두 가지 해석을 통해 8·15 해방 경험을 이해하려 했지만 아직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내셨다"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렇게 주저하는 데는 우리 민족의 다양한 종교적 배경 이외에도 그럴 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선, 정치·외교사적으로 민족 독립의 결정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가 아직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해방을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의 패망에 있다. 역사가들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 한국인들의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일본 패망의 중요한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이 조국 땅을 밟으면서 "8·15 해방은 비자주적인 독립이 아니다"라고 통탄했고, 함석헌 선생이 "해방이 도둑같이 임했다"고 말한 데서 볼 수 있듯이 8·15 해방은 우리의 계획된 노력이나 혹은 자주적으로 이룩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해방은 외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민족 독립의 근거를 연합군의 노력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한반도의 독립을 원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전쟁의 승리로 해방이 부산물로 딸려 온 것인지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해방 이후 보여 준 연합군들의 제국주의적인 잔상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38선 이북에 주둔해 있었던 소련군의 속셈을 또한 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신탁통치 결정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우리 민족이 해방 이후 마땅히 이루어야 했을 자주적인 국가 건설에 큰 방해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점과 관련해 역사학자들 의견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분단에 대한 '내부 책임론', '외세 책임론'이 서로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8·15 해방이 외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남북한 역사학자들은 이 점에서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외교적인 측면 외에도 하나님 은혜로 민족 해방을 생각하는 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새로운 땅에 대한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은 새로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돼 있었다(출 2:23-25, 3:8).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해방 경험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비추어 이해했다. 출애굽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해방 그 자체보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약속에 더 큰 비중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해방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고 약속의 성취였다(신 1:8).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서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 경험은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다. 신명기 7:7-8절에 보면, 하나님은 수적으로 적고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애굽 손에서 구원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십계명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해방 경험을 바탕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결단했다.

이상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해방 경험'을 약속을 지키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나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인식 근거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하는 삶의 근거로 인식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단군신화 속에 나오는 환인이라는 하늘님의 후손, 곧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배워 왔다. 또 우리 민족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선택되었다는 의식도 없다. 약속 성취를 확인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만한 그런 약속도 받지 못했다. 당연히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도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양심이나 신화, 유교나 불교 같은 기독교 이외 종교 규범을 문화나 교육을 통해 간접적으로 습득하며 지내왔을 뿐이다. 많은 토착화 신학자는 단군신화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우리 민족 정체성을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은 어느 누구도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과 단군신화의 환인 사이의 관계를 연결할 확실한(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하나의 해석적인 시도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 민족의 8·15 해방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8·15 해방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8·15 해방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이 질문은 8·15 해방을 맞이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 기독교인이 대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에 해당된다. 이 질문에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8·15 해방을 성경적으로(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 약속을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오직 하나뿐인 구원의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인 모두에게 부과되는 선교적인 과제다.

그러나 애굽으로부터 해방 경험이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정리되고 고백되는 가운데 우리들에게까지 증거되고 우리 역시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듯이, 우리 민족의 해방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한국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행위를 세계만방에 전할 과제에 해당된다.

다른 민족은 우리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함께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곧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총'이라 생각되는 8·15 해방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길이 될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확신 있는 증거에 해당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신명기 28장 5절부터 11절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신명기 26장 5-11절 이해를 통한 출애굽, 8․15 비교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 경험 배경과 우리나라 8·15 해방을 비교해 본다면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우리 민족 역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말할 수 없는 불의를 당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독교인의 기도는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

망국의 전야가 펼치는 가슴 아픈 현실을 부둥켜안으며(1907년 길선주 목사 중심 부흥 운동), 또 빼앗긴 나라를 대신해 영원한 안식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영적인 운동도 없지 않았다(1930년대 이용도 목사의 부흥 운동). 그러고 나서 결국 서구 열강의 도움에 힘입어 해방을 맞았다.

빼앗긴 주권의 회복만 기도한 게 아니라 짓밟힌 정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8·15 해방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기도했던 사람들에게는 사실 자주적인 독립이냐, 아니면 외세에 의한 해방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의가 얼마나 회복되었느냐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정의가 회복되는 듯이 보였기에 8·15 해방을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는 것인가? 해방 이후 혼란과 이어지는 한국전쟁은 또 어떻게 생각될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주목할 점이 있다. 구원과 해방에 대한 고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지시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출애굽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기보다(참고: 시 106편) 오히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 직전에 이르기까지 과거 애굽 생활을 잊지 못했다. 자유보다 종으로서 삶을 영위했던 땅 애굽에서의 편안하고 풍족한 삶만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의 불신으로 사막에서 40년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애굽을 그리워하며 불평했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고백은 기대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고백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로, 연약한 소수민족인 자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자신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었다고 인정하기를 배워야만 했다(신 7:7).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소산물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제사를 해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 애굽으로부터 건져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는 십계명 속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계명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구약성경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고백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행위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다루고 있다(출 20, 신 7:7-11 등). 계명이란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태도를 지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이 구원자(호13:4)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시리아와 바벨론 같은 외세의 침입을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왕하 18:9-12, 24:18-25:7, 느 9:37).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애굽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고백은 오직 여호와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오직 그분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결단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자신들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계명을 통한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애굽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 백성으로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을 이렇게 이해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 해방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근원이면서 또한 민족사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출애굽기를 포함, 성경 여러 곳에서는 애굽으로부터 해방이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잘 보여 준다. 심지어 하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니라"(민15:41)라고 말씀할 정도다. 하나님조차 당신 스스로를 구원 사건과 관련해 인식하기 원하신다.

우리 민족은 36년 식민지 생활 속에서 온갖 불의를 다 겪었다. 수많은 사람이 죄 없이 죽어 가기도 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억울하고 한 맺힌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외세의 도움에 의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불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선물로 받았듯이, 우리 민족 또한 불의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의의 하나님은 불의를 당하는 모든 민족의 해방을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8․15 해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인들도 8․15 해방을 하나님 은혜라고 고백하기 원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도 이러한 고백에 대해 이의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8․15 해방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되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우리를 선택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오늘 우리가 바로 인식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공의로우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도대체 땅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법도 알지 못하는 우리 같은 이방인은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가? 이것은 신학적인 근거를 묻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성경을 통해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그 땅에서 쫓겨났다. 나라 잃은 백성인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확장되었다(사65:17-25, 66:22). 그들의 구원 역시 애굽으로부터 해방에 제한되지 않았다. 그들의 해방은 메시아에 의한 완전한 해방으로 바뀌어졌다(사9:1-7, 11:1-10).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과 긍휼, 공의를 경험하기 원했다. 여러 선지자가 증거하고 있듯이, 그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가운데 이러한 소망이 올바른 것임을 증거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구원하셨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백은 메시아에 대한 소망으로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새로운 소망,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우리는 누구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다(갈 3:13-14, 3:2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약속받았고 이미 창세전에 선택된 백성임을 알게 되었다(엡 1:4-5).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도 받았다(갈 4:28, 벧후 3:13, 계 21: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구원 약속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도 8․15 해방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할 수 있다.

그렇기에 8․15 해방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또 고백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8․15 해방은 기독교인의 선교 과제와 민족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부여해 준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뿐 아니라 민족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두 번째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출애굽기 20장 2절 이하에 나오는 고백과 계명의 관계가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들 삶 속에서 여호와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된 구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8․15 해방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의 부산물로 인식되거나, 민족 독립 운동의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해방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고백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죄인들 스스로 이런 고백을 결코 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도 이 고백을 하나님에게서 직접 배웠다. 죄인의 본질적인 속성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 있기 때문이다.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려져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성경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삼는 가운데 이스라엘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배울 수 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라도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된다. 8․15 해방이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것에 가슴 아파할 이유가 없다. 서구 열강이 우리 독립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였다고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 잠재되어 있는 일본인에 대한 미움도 사실 불필요하다. 일본인들에 대한 미움은 해방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모세가 그러지 않았는가? 그는 애굽인을 쳐서 죽였지만, 그는 출애굽 사건이 자신의 미움과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40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참고: 행 7:23-29).

8․15 해방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사건을 단순히 기독교적으로 채색하는 것(해석)에 불과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해석이 아니라 그것은 한국 기독교인에게 사실이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신뢰할 것이라는 결단이기도 하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신사참배를 뒤늦게 회개하였다. 개인적인 회개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총회 차원(1938년 9월, 제27회 조선예수장로회 총회에서 일본 경관의 강압적인 압력에 눌려 신사참배를 가결했다)에서는 한참 후에나 이뤄졌다.

그뿐 아니라 해방 후 보여 준 사분오열한 교회 모습은 한국 기독교인이 참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8․15 해방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바로 인식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위 한강의 기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날로부터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맞기까지, 우리들의 땀과 노력에 대해, 한민족 뿌리 깊은 전통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얼마나 자랑했는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한민족의 종교·문화·사상적 전통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여기면서, 믿음의 조상들이 순교의 피를 흘려 지켜 온 믿음과 비기독교적인 종교나 세속적인 문화와 혼합하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나님께 범했는가.

월드컵 4강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 국민 모두는 그것을 '신화'로 여기면서 한민족의 잠재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감격과 기쁨의 순간을 신화로 이해하는 것에서 우리 민족의 종교심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순간에 기독교인이 여호와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한다면 8․15 해방은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세속사로 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증거할 좋은 기회인 8․15 해방의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선물로 주셨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어떠한 순간에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만한 이유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에서 아무리 힘겨운 일이 가로막혀 있다 해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우리를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해 놓으시겠다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오히려 인내와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8․15 해방이 진정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되고, 또 증거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신다.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구주로 우리가 인정하며 우리 모든 삶에서 오직 여호와만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8․15 해방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 새로운 과제를 부여해 주시는 사건이었다(함석헌 선생과 유동식 교수는 한국 문화와 역사가 평가절하되던 때 각각 역사 및 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과제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것이 바로 인식되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 이기주의나 개인의 영달을 위한 기회로 받아들여졌기에 혼란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8․15 해방을 이렇게 이해할 때, 통일은 새로운 과제 인식의 기회로 기대된다.

8․15 해방은 불의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게 하는 사건이다. 8․15 해방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소망하게 하는 사건이다. 8․15 해방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된 주님으로 증거하는 삶을 촉구하는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8․15 해방은 이렇듯 우리 민족사의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하게 만드는 전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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