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지난 2월 말, 사람들 관심이 국회의사당에 쏟아졌다. 47년 만에 재개된 필리버스터 때문이다.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며 야당 의원 38명이 9일, 192시간 27분 동안 무제한 토론을 펼쳤다. 김광진·은수미·정청래 전 의원과 신경민·진선미 의원 등이 사람들 뇌리에 각인됐다. 시민들은 국회를 방문해 의원들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3월 중순, 1,344쪽에 달하는 속기록을 정리한 책 <필리버스터>가 나왔다. 관심이 뜨거웠다. 정가 3만 3,000원. 가벼운 가격이 아닌데도 책은 첫날 예약 판매로 1,500부가 나갔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애초 계획한 1,000부가 아닌 9,000부를 찍었다. 그중 6,000부가 팔려 나갔다. 발매한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 달에 100권 이상 꾸준히 나가고 있다.

▲ 지난 3월, 저작권이 없는 필리버스터 속기록을 정리한 책이 나왔다. 신생 출판사 '도서출판 이김'의 아이디어였다.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신생 출판사의 아이디어가 먹혔다!

규모와 자본이 막강한 대형 출판사들이 시장을 장악한 상황 속에서, 작은 출판사가 첫 책부터 성공을 거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심지어 필리버스터 속기록은 누구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문건으로, 저작권이 따로 없다. 누가, 왜 이 책을 냈을까?

<필리버스터>는 지난해 12월 문을 연 신생 출판사 '도서출판 이김'의 첫 작품이다.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함께 운영한다. 두 사람 성을 따 출판사 이름을 지었다. <필리버스터>의 시작은 김미선 대표 아이디어였다.

처음부터 출판을 계획한 건 아니다. 당시 준비하던 책이 있었다. 개인적인 관심으로 속기록을 보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속기록 폰트가 맘에 들지 않았다. 가독성이 떨어졌다. 쪽수도 많아 인쇄하기 어려웠다. 폰트를 바꿔서 개인 소장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 도중, 이럴 거면 차라리 출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이 대표는 내키지 않아 했다.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자료를 책으로 만드는 게 마음에 걸렸다. 판매하는 게 괜찮은지 고민했다. 김 대표는 굽히지 않았다. 특정 기간의 정치적 이슈를 책으로 출간해 장기간 기억하고 역사적 사건으로 만드는 아카이빙 작업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논의를 거쳐 책이 나왔다. 정치 이슈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4일 만에 작업을 뚝딱 마쳤다. 타 출판사처럼 수직적인 결재 시스템이 없는 게 한몫했다. 두 대표가 의견 조율만 하면 아이디어를 바로 실현할 수 있는 신생 출판사의 장점이 발현됐다. 전문 분야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도 도움이 됐다. 출판사 이미지를 구축해 가는 단계여서 관심 있는 분야는 무엇이든지 도전해 볼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6,000부까지 팔릴지는 기대도 못했다. 디자인에 신경 썼다. 딱딱한 정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표지를 핑크색으로 처리했다. 두꺼운 책이 무리 없이 펴질 수 있도록 제본, 종이 등 제작에도 힘썼다. 그 덕분인지 20~30대 여성에게 인기가 좋았다.

유통 경험이 부족해 진입 장벽이 낮은 서점을 골랐다. 서점 MD가 트위터에 <필리버스터> 홍보 글을 올렸다. 수천 회 리트윗 되었다. 그의 도움이 컸다. 영업이나 광고를 할 줄 몰랐던 이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방문해 <필리버스터> 속기록이 출판됐다고 스스로 홍보했다. 돈을 들여 광고하기보다 발품 팔아 알리고 싶었다.

▲ '도서출판 이김'의 이송찬, 김미선 대표. ⓒ뉴스앤조이 최유리

두 대표에겐 포부가 있다. 출판계에서 생존과 공존을 꿈꾸며 세상에 필요한 책, 재밌는 책, 갖고 싶은 책을 펴내겠다는 것.

작은 출판사이기에 직원은 따로 없다. 가정집에서 업무를 본다. 아마존에서 출판할 수 있는 콘텐츠를 찾거나, 함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 서점에서 신간을 확인하고 맘에 드는 출판사를 함께 공부한다.

이송찬 대표는 책과 과학을 좋아한다. 대학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했다. 이김에서는 과학 분야를 기획하고 유통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김미선 대표는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판 업무를 했다. 이김에서 책 디자인과 사회 분야 기획을 맡고 있다. 생존을 위해 출판 업무 외 브로슈어, 팸플릿, 명함 등 디자인 업무도 함께한다.

청년들에게 고마워 수익 일부 기부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운이 좋았다. 인쇄, 유통 분야에서 주변 도움이 컸다. 학자금 대출 상환, 취업 준비로 자기 앞길 챙기기도 바쁜 20~30대가 책을 구매했다. 고마운 마음에 종이책 판매 수익 일부와 전자책 판매 수익 전부를 청년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현재까지 전자책 수익이 많지는 않아 보낼 때 민망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다양한 형태로 청년들과의 접점을 만들어 갈 계획이다. 신진 작가 발굴도 여기에 해당한다. 새로운 작가의 책보다 어느 정도 안정성이 확보된 번역서를 출판하는 게 운영에 도움이 되지만, 그래도 도전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아직 생긴 지 6개월 남짓. 이들은 1인, 독립 출판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출판을 하고 싶다면 해야 하지만, 시작부터 생계를 걸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출판을 시작하고 적어도 3년을 지켜봐야 하는데, 생계가 달려 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져 좋은 책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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